이외수 '청년시절' 보냈던 춘천 석사동 집 모습
요즘 이외수님이 세간의 화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옳은 것'과 '바른 것'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한때 저도 이외수님의 열렬한 광신도가 되어 그의 흔적을 쫒아다닌적이 있는데
지금 보시는 이 그림들은 그를 고민하고 방황하게 만들었던 젊은 날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외수님의 홈피에 등장하는 둘도없는 친구 '최돈선'님을 '메사'에서 만난 후로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서면서 '이도행'님과 함께 당시 이 집에서 함께 기거한 모 여성과 동행하며
그의 '청색시대'를 거슬러 올라갔지만 이미 그곳에는 뱀허물 벗듯 벗어던진 낡은 집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승천을 위하여 화천에 몸을 뉘고 있을 때 였습니다.
이외수님이 '전교학신문'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그의 청년기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는데
"20대 때 가장 큰 고민은 세상과 타협해야 하나, 투쟁해야 하나였습니다.
타협은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결탁해야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지요.
투쟁을 하자니 심신이 고단하고요. 뒤늦게 내린 결론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협은 불의니 고민의 여지도 없는 것이고,
결국 싸우지 않고 감동을 시키려면 내 기본을 충실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는 그의 청년기를 춥고 배고프며 영혼까지 찌들어 들 것 같은
석사동의 한 'ㅁ字'집과 교대 담벼락옆 낡은 하숙집 방에서 거친 파도와 같은 세상에 맞섰던 것입니다.
그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기이한' 모습과 행동을 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기인'이라는 별칭을 붙이고 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의 그런 모습들은 전혀 기이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말한대로 그의 청년기의 모습은 '자신의 기본기'를 다듬는 자신과의 한판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싸움은 마치 '구도자'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비쳤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림들은 이외수님이 '청년시절' 한때 지냈던
춘천교대앞 석사동 집 모습입니다.
이곳은 개조가 되었지만 이외수님의 친구가 라면을 끓이며 파를 다듬던 곳입니다.
그의 둘도 없는 친구 최돈선과 이도행님이
"외수 몰래(?) 끓여 먹으려던 것이었는데 그때 그 친구가 불쑥 나타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외수를 가리켰는데
돈선이는 그 끄덕임이 외수 주라고 한 신호로 알아서 라면을 강탈(?) 당했지..."
이도행님의 술회였습니다.
이 방이 '강원문단'을 이루었던 이외수님과 친구분들이 젊은 날을 보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연탄대신 소주병이 쌓였던 곳입니다.
골방에 있는 창문입니다.
당시 집주인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교대 옆 '개구멍'으로 들락 거렸던 하숙집입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개구멍이 있던 교대옆 담벼락엔 낡은 물펌프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청색시대'를 기억하듯 청포도가...
(기회가 닿으면 그에 대한 이웃들의 기억을 제 포스트에 남기고 싶군요.)
이외수님과 그의 친구분들(강원문단 시절)이 청년기를 보냈던 이 집은
춘천교대 앞 석사동에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꽤나 흥분했었습니다. 3년전의 모습이지요.
그가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799번지 감성마을'로 떠난 직후였습니다.
이외수님과 그의 둘도없이 가까운 친구와 방문한 이 허름한 가옥은 '김유정문학관'에 필적하는
'강원문단의 문학관'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으로 물밑 논의가 진행될 때 디카로 남긴 그림입니다.
현존하는 적지않은 '작가의 생가'는 원형이 많이도 훼손된 듯 하고 인위적인 냄새가 많이도 풍겨서
교대앞에 있는 이 집을 원형을 보존하고 '문학관'으로 다시 꾸며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직접 방문해 봤던 곳입니다.
당시 이 집에는 이외수님의 청년기를 기억하는 분이 여전히 계셨으나
이 가옥은 이미 매매가 되어 다른분의 손에 넘어간 직후였고 이외수님이 감성마을에 자리잡은 후 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청년기를 고뇌케 했던 이 집을 뒤돌아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가 벗어던진 허물이 그에겐 별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나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흔적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의 '신도'가 된 마니아들이 그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일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성지순례'와 같은 모습이지요.
오늘날 이외수님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은
모두에 말씀드린 '옳은 것'과 '바른 것'에 대한 성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사람들의 가치관들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세상에 따라 변하고 사람에 따라 변하고 권력에 따라 변하고
돈에 따라 변하는 것에 대해서 그의 일성은 '회초리'와 같이 매서운데,
정작 그는 너털거리는 웃음으로 넌지시 뱉아내곤 합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백성이 자기에게 손가락질한다고
백성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왕들이 있었다.
지구를 통털어
지금은 그런 왕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백성이 자기를 손가락질 한다고
백성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왕이 있다면
백성들은
백성들 모두의 팔다리가 잘려져
절구통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왕에 대한 항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외수님의 홈피에 실린 '손가락질'입니다.
최근의 미친소정국과 관계없다고 할 수 없는 이외수님 만의 독특한 문체속에는
'옳은 것'과 '바른 것'에 대한 성찰의 모습이 '칼'이 되어 위정자들을 떨게하는 것입니다.
이외수님이나 그의 친구들이 청년기를 보냈던 이 가옥은 그들이 전부를 사용한 게 아니라
방 한칸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고 방값은 엄동설한의 온기를 더해 줄 소주로 다 태웠던(?) 곳입니다.
두평 남짓한 이 골방에서 이외수님이나 그의 친구들은 '거지꼴'을 한 채 고민에 고뇌를 거듭하며
'문학'을 향한 젊은날을 보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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