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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남해군수가 불지른 부소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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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수가 불지른 부소암
-보물섬,남해 금산에 숨겨진 귀중한 문화유산-



신비로운 꿈 이야기...


참 신비스러운 꿈을 꿨다. 생전 보지도 못한 할아버지 한 분이 새벽에 나타나 필자에게 술 한병을 선물해 주었다. 하얀 도포를 차려입은 할아버지 곁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술은 귀한 술이었다. 아버지가 곁에서 '손자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 손자를 소개하신 것이다. 필자의 할머니께선 청상과부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얼굴은 생면부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귀한 술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곁에서 그림을 그리시며 그림 위에 엷은 막의 도료를 칠하고 있었다. 그림의 변색을 방지하기 위한 니스칠 같은 작업을 하고 계시길래 곁에서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원본에 도료를 칠하니 보존은 오래 할 수 있겠지만 본래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색감이나 질감 등이 손상될 걸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꿈이 깬 시각은 대략 오전 5시 30분 경 개천절 아침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너무 오랜만에 꿈에서 만나 기쁘기도 했지만 생면부지의 할아버지께서 꿈에 나타나셨으므로, 놀라운 마음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기상을 했다. 그리고 곁에서 뒤척이던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잊어버리면 안 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개천절 아침에 꾼 꿈이 해몽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신비스러운 꿈 이야기는 이튼 날 남해 금산의 부소암에서 다시 듣게 됐다. 부소암을 지키던 한 보살님이 나를 향해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손님들과 귀빈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려준 것인데 보살님은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참 이상하지예. 오늘 새벽 3시쯤인가...기도하다가 깜빡 잠이들었는데 누군가 (목 뒷덜미를 가리키며)툭 치며 일어나라고 깨우시는 게 아입니까. 암자에는 저 혼자 밖에 없었거덩예. 그런데 누가 바로 곁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 아입니꺼. 참 신기하지예..."




갱상도 말씨의 보살님은 필자와 일행이 부소암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커피를 대접하는 등 귀한 손님 대접에 흥분하고 계셨다. 아마도 부소암이 생긴 이래 이른아침부터 많은 분들이 다녀간 일은 처음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행 중에는 정현태 남해군수가 함께있었다. 당신은 이른 아침 해 뜨기 전부터 동행하여 금산의 일출을 함께 보며 금산에 얽힌 전설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소상하게 일러주었다.


*남해 두모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부소암의 암자 앞 마당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이는 분이 정현태 남해군수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역사와 전설 속에는 꿈이야기가 당연히 포함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개국에 관한 흥미진진한 꿈이야기가 여행자 가슴에 슬슬 불을 지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은 마침내 부소암까지 번지고 종국에는 보리암까지 모두 활활 태우며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정작 불을 지핀 방화자(?)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소암에 아침이 점점 더 밝아오면서 전설 속에서 행복한 허우적거림을 맛 보게 됐다. 그 현장을 소개해 드린다.




우리에게 친근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 속에도 꿈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무장(武將)으로 활약할 당시, 이성계는 어느 날 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큰 기와집에 들어갔는데 워낙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붕괴가 불안하여 기와집에서 나오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등에 석가래 셋을 가로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흉몽(凶夢)인지, 길몽(吉夢)인지 스스로 알 수 없어 다음날 근처의 유명하다는 여무(女巫)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유명했던 여자무당은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강신(降神)하여 신의 해몽에 대한 신탁(神託)을 알고자 방울을 흔들어대며 신전에 고해바쳤지만 이상하게도 강신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정색하며 이성계에게 자기는 '도저히 그 꿈을 해몽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한편, 가까운 설봉산 토굴에 한 고승이 혼자 수행하고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면 해몽을 들을 수 있다고 권했다.




이성계는 혼자 토굴의 고승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대면했다. 그 고승이 바로 그 유명한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오기 전부터 이미 그가 온다는 것을 전조(前兆)를 통해 알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관상을 살핀 후 꿈 이야기를 들으며 금방 의미를 깨닫고, 이성계에게 누가 엿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으로 나직히 속삭이듯 말했다.




"낡아 붕괴되는 큰 기와집은 망해가는 고려국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집에서 나오면서 등에 석가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다는 것은 왕(王)을 의미하는 것이니, 장군께선 장차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천기를 미리 깨닫게 해주는 길몽입니다. 차후 어느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그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꿈 해몽을 한 그날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꿈 이야기를 두 번 다시 발설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여 대업을 스스로 망치는 일이 없도록 입조심을 하라고 강조하며 장차 준비해야 할 일 등에 대해 소상히 일러주게 됐다. 이날부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꽃과 나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건국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리고 무학대사가 일러준 지침(?)의 실천에 들어가게 되는 데 무학대사가 일러준 꿈 해몽법 내지 자문은 이랬다.




첫째, 백성의 민심은 물론, 수하의 변사들과 여타 병사들의 민심까지 얻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셔야 합니다. 
둘째, 신불(神佛)전에 이무도 모르게 기도하여 신의 가호를 얻어야 합니다.  




이날부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자문에 따라 백성들과 병사들의 민심을 얻는데 진력하고, 남해 금산(錦山)을 비롯한 명산에서 남몰래 산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성계는 자기의 신분을 승려들에까지 철저하게 숨기고 관세음보살전에 간절히 기도하고, 속마음으로 소원성취의 축원을 드렸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내면서 곡차(穀茶,막걸리)를 나누는 등 국운이 쇠진해가는 고려에 대해 우국.우민 등 나라의 태평성세에 대해 밤새워 토론하게 되었다는 것.




남해 금산에서 일출을 본 직후 부소암에 당도하자 바람이 몹씨도 불어댓다. 부소암은 커다란 암봉 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슬아슬해 보였다. 부소암은 최근까지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지난 9월 2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그동안 탐방객 출입을 통제했던 구간은 남해군 상주면 금산의 두모계곡~부소암~복곡헬기장 2.8㎞ 구간이었다. 새 탐방로가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그동안 금산의 보리암은 여러차례 방문해 봤지만 부소암의 존재를 잘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꿈을 잘 꿨는지 금번 여행길에 귀한 소식을 동시에 듣게 됐다. 부소암에 서린 전설이 까마득한 전설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었던 것인데 부소암으로 다가서자 바람이 몹씨도 불어댄 것이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든지 가만히 서 있기 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눈 앞에 나타난 듯 암봉을 잇는 철제다리 위에 올라서자 난간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곳에는 '서불과차(徐不過此)'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안내문에는 서불과차에 대해 이렇게 써 놓았다.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어 살다가 갔다는 전설과 단군(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 앉아 천일을 기도했다는 전설이 있다."




안내문을 읽으면서 서불과차 속의 '두 명의 부소는 누구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퍼뜩 든다. 하나의 암봉에 서린 두개의 전설. 진시황의 아들 부소와 단군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부소가 동시에 부소암의 전설 속에 서려있는 것이다. 그 중 한 분은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인데 또 한 사람은 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에 중국을 통치한 중국(진나라)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었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조정(趙政)이라 부르기도 했다.




진의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 나라'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그는 불로불사에 대한 욕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나라'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공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기도 했다.또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진시황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그 중 서불과차와 관련된 전설이 불로불사 내지 불로장생의 욕망이었다. 권력에 도취해 영원히 죽지않거나 늙지않는 불로초를 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열망이 얼마나 컷으면 당시 연금술사들로부터 신비로운 물질로 알려진 수은을 환약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결국 수은 중독으로 죽은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병마용 발굴 이후 기록에 따라 땅 속에 묻힌 진시황의 무덤을 표본조사해 밝혀낸 사실이다. 




권력욕과 불로장생을 부추긴 건 뇌와 중추신경을 망가뜨리는 수은 때문이었는지 보통 사람들이 꿈꾸지 못하는 임무를 서불을 통해 시켰다. 서불로 하여금 배 60척,일행 5000명,동남동녀 3000명(5000명, 3000명, 600명, 500명, 496명설 등이 있음)을 준 다음 불로초가 있다는 땅을 향해 바다를 건너고 영악으로 알려진 남해 금산까지 찾아왔지만 허탕을 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의 흔적을 남기고자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을 남기고 갔다는 서불설화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록했다는 서불과차문은 남해 상주면 양아리 금산 부소암의 평평한 바위 위에 새긴 것(부소암 아래쪽에 위치해 자료사진으로 확인 함)으로 '남해 양아리석각'이라고도 불리운다. 또 부소암은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진나라를 탈출, 서불과 합류하여 이곳에 와 여생을 마쳤다하여 붙여진 바위 이름이다. 중국 사서에는 부소가 변방에서 기원전 210년 사사(賜死)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관련 자료(http://cafe.daum.net/revelation1)에 따르면 "1860년 남해양아리석각의 탁본 해석[徐市起禮日出 : 서불이 일어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이 알려지자 서불과차라는 전설이 사실화 되었고, 이후 서세동점의 격동기에 모화사상가의 입으로 더욱 와전되었으며, 1919년 '조선금석총람 상 조선총독부(朝鮮金石總覽 上 朝鮮總督府)의 남해전서불제명석각(南海傳徐巿題名石刻)'이 유포되면서 항간의 실화로 회자(膾炙)되기에 이르렀다"는 것.




부소암의 전설에 대한 사실 여부는 1919년 일제강점기 당시 배포된 자료에 따라 실화처럼 회자되었다는 게 상당한 근거가 있어보인다. 일제는 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의 존재를 부단히 훼손하기에 이르렀고, 민족의 성산과 명당 등지에 쇠막대기를 박아 기를 차단하는 등의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소암에는 단군 할아버지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기는 한 것일까.




참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부소암을 돌아보는 동안 단박에 해소됐다. 부소암 틈새에 '호랑이를 탄 단군 할아버지 부조'가 뚜렷이 암각되어있었던 것이다. 이 부조의 조각연대는 뚜렷치 않으나 부소암에 전해져 내려오는 두 개의 전설 가운데 하나였던 단군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부소의 전설이 서린 게 직감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반가웠다.


 

정말 신비스러운 건 부소암의 입구 작은 동굴 속으로 샘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에 기록된 사진들은 부소암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열해 둔 것으로 부소암을 보면, 도무지 물을 저장할 만한 능력이 없어 보이는 암봉인데 작은 샘에 물이 고여있는 것이다. 마치 이슬이 응고되어 작은 샘을 이룬 듯 수원이 미약한 곳이었다. 그곳 한 쪽에는 샘물과 물을 저정하는 작은 탱크와 샘물이 있고 또 한 쪽에는 단군 할아버지를 은밀히 모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 것일까.




지금은 철제다리를 따라 암봉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만약 철제다리를 시설하지 않았다면, 부소암의 기도처는 아무나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성지나 다름없는 장소로 보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우리민족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시도 할 때, 그 누구인가 나라와 민족의 안위를 위한 기도를 부소암에서 올렸던 것인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다 아실 단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전설같은 흔적만 남긴 채, 딴나라 문화에 심취해 자기를 낳아준 뿌리 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자기 조상이 중동의 모처에서 왔다고 박박 우기는가 하면, 일본과 미국에서 왔다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된 참 희한한 세상이다.




대륙을 호령하던 요하문명의 주인의 피가 자기 피 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 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거나 잃어버린 채 살고있다고나 할까. 중국이 진시황제 이후 동북공정과 서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지우거나 모조리 바꾸고 있는 현재, 우리는 단지 남과 북으로 단절된 게 아니라, 우리 선조님들의 땅이었던 만주벌판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를 고아로 남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단군 할아버지께서 사셨던 단군조선의 영역은 개천이후 부침이 있었으나, 직.간접지배나 영향을 미치는 등 전체를 잡아보면 한반도와 만주, 몽골, 지나중동부, 연해주, 일본등지를 포함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왕검단군때 북쪽으로는 대황(大荒 : 만주북부, 연해주의 흥안령, 흑룡강 유수리강 지역), 서쪽으로는 설유(楔諭 : 몽골지역 훈육), 남쪽으로는 해대(海垈: 중국 산둥성지역), 동쪽으로는 창해(蒼海: 동해)에 이르렀다고 하여 한반도(조선반도)를 포함했다고 했으며, 왕검단군의 성교가 점점 크고 넓어짐에 따라 영토도 점차 넓어져 제4대 오사구 단군때부터 천하를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고 전한다.



* 새벽녘의 꿈 이야기를 전해준 이름모를 부소암 보살님, 이 기도처는 누구나 아무때라도 사용해도 좋다고 한다. 현재 암자의 주지스님 한 분은 출타중.
 

실로 방대한 면적이자 동북아 대부분이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병마용에서 자기를 과시한 흔적이 남긴 했지만, 그 영역에서 진시황이 어느날 권력욕에 사로잡혀 불로장생을 꿈꿨다면 남해 금산 부소암까지 흔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역사라는 게 두루뭉술 전설로 남았다는 건 가슴아픔 일이자, 기록물들이 주로 패자에 의해 왜곡.호도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부소암에 서린 전설은 고증을 거쳐 보다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부소암의 암자로 가는 길에 써 둔 안내문에는 단지 몇 줄 만으로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이 단절될 수 있는 위험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짧은 문구를 퍼나르며 두 전설을 용인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자꾸만 발걸음을 붙들고 놔 주지않는 것이다.




오래전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단기고사와 환단고기 등 민족의 뿌리를 통해 ,언제인가 우리 할아버지의 땅과 홍익정신을 되찾기를 꿈꾸었다. 육신과 영혼이 갈증을 느낄 때마다 그 책들은 해갈을 해 주었다. 꿈이 책 속에서 해갈되는 그 현상이 내 속에서 <내가 꿈꾸는 그곳>으로 자리잡고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육신이 쉽게 머물 수 없는 땅이자 마음을 편히 뉠 만한 장소가 못 됐다.남과 북은 철책으로 이념으로 국론분열로 고착화 된지 꽤 오래됐다. 압록강과 두만강은 이성계 이후로부터 두터운 벽으로 작용했다. 할아버지 땅으로 갈 수 없게 된 것이며, 조선의 백성으로 일제강점기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그동안 단군 할아버지께선 우리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다시는...두 번 다시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께서 개천절 아침에 내 꿈에 나타난 것인지. 부소암을 돌아보는동안 할아버지께선 나를 통해 부소암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을 살피고 계셨다. 주지하다시피 단군왕검은 단기 51년(BC2282년) 부루태자 등 세 아들과 운사인 배달신에게 강화도에 연인원 8천명을 동원, 삼랑성인 정족산성을 쌓고, 마니산 정상에 천하태평을 기원하는 참성단을 쌓게하여 3년만에 완공한데 이어 천제를 올렸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민족의 성지이자 국보라고 할 수 있는 유물유적이 우리 곁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신비스러운 꿈을 꾼 아침은 단기 4346년을 맞이한 개천절 아침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마산행 '케이티엑스'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 방문하게 될 금산의 명소와 남해의 명소 등을 돌아볼 팸투어 때문이었다. 꿈 속에서 할아버지께선 제게 귀한 술 한 병을 선물로 주셨다. 그 술의 의미가 무엇이었지 무지랭이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동안 잊고 지내고 체념해 버렸던 내가 꿈꾸는 그곳이 내 앞에 나타날 것이란 걸 암시해 준 예지몽은 아니었던지. 하필이면 그곳에서 한 보살님의 예지몽을 듣게될 줄 누가알았으랴.




그 신비한 곳을 정현태 남해군수가 앞장 서서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었다. 남해 금산에 숨겨진 보물이라니 그건 진시황의 흔적이 남은 부소암이 아니라, 필시 우리 단군 할배의 전설이 서린 부소암이 틀림없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이런 전설은 충분한 고증을 통해 역사적 가치를 발굴해 내고 관광객 유치는 물론 문화콘텐츠를 생산해 낼 기막힌 문화유산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사람의 뇌를 닮고 삼라만상의 온갖 만물상을 잉태한 부소암의 빼어난 형상을 보면서 느낀 점이다.
 




이성계는 조선을 도읍지로 만들기 전에 왕이 되는 꿈을 꾸고 무학대사에게 해몽을 들었다. 이성계에겐 더 없는 길몽이었고 장차 우리 민족에게 더 없는 흉몽을 잉태했던 조선 500년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조선의 도읍지 한양을 정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개천절 아침의 현몽(?)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널리 우주의 자연 만물과 인간을 이롭게 하라시던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가 너무 그립다. 남해 금산의 숨겨진 보물 부소암(扶蘇岩)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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