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은 막손금?
-화성문화제,정조대왕 역 윤성찬 씨 알아보니-
수원화성문화제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수원화성문화제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대왕이다. 그가 해 마다 화성행궁을 찾아온 지 어언 반세기, 화성문화제는 50주년을 맞이했다. 정조는 조선 시대 어느 임금보다 궁궐 밖 나들이가 많았던 임금이었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천 봉 한 후, 해마다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방문한 것은 모두 13차례나 되었는데, 그중 1795년(정조 19)의 방문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을묘(乙卯)년에 이루어져 '을묘원행(乙卯園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행차는, 표면상으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회갑도 같은 해에 겹쳤으므로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참배를, 살아계신 어머니께는 잔치를 베풀어 드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화성이었다.
그 행차를 그린 정조대왕능행차 연시가 시민퍼레이드와 함께 펼쳐졌는 데 그에 앞서 정조대왕이 머물렀던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에서는 과거시험이 재연되었다. 그곳에 정조대왕이 납시어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이 재연되고 있었다. 정조대왕은 화성으로 능행차 시 수원지역의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해 별도의 과거 시험을 치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화성문화제의 정조대왕 역(役)을 맡은 윤성찬 씨(한의사)를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비록 분장한 모습이지만 마치 정조대왕이 환생한 듯 했다. 그는 행사 곳곳에 나타나 백성(시민)들을 격려하고 있었는데 그의 역할은 주로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일'이었다. 넉넉하고 인자하게 잘 생긴 풍모는 화성행궁의 화령전(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 봉안각)에 모셔진 '정조어진'을 쏙 빼 닮은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은 당신이 나타날 때 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 때 마다 손을 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정조대왕 역의 윤성찬 씨 손금이 드러났다. 정조대왕은 막손금이었다. 정조대왕도 실제로 막손금이었을까. 궁금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주인공으로 각종 행사에 출연하는 정조대왕 역은 화성문화재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다고 한다. 수원 하면 정조대왕을 떠올릴 정도로 정조대왕은 곧 수원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손금까지 세세히 관찰해 가며 정조역을 선발하지 않겠지만, 수원시 SNS 팀장에 따르면 "정조 역의 윤성찬 씨가 옛날에 태어났으면 왕이되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만큼 윤 씨의 성품과 넉넉한 카리스마가 정조대왕을 쏙 빼 닮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막손금(막쥔금)의 운명'을 알아봤더니 놀라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에 알려진 막손금은 '로또'를 타고났을 정도로 좋은 손금이라고 하지만, 손금이 운명 전부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건 널리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막손금이 가진 여러 경우의 수 중에 어떤 운명이 도사리고 있을까. 한 경우를 보니 '막쥔금을 가진 사람은 변화에 매우 잘 대응하고 변화의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 막쥔금을 가진 사람은 이성과 감성이 혼합되어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변화의 상황에는 장점으로 발휘 된단다. 그래서 남들은 우왕좌왕할때 매우 순발력있게 상황을 판단해서 대응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변화에는 매우 민감해서 잘 대응한단다. 막쥔금은 변화를 줘야할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폭넓은 변화를 시도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 봉건시대와 단절하고 개혁적 성향의 효심깊은 정조대왕의 운명과 닮은 듯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정조 역의 윤 씨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 2010년 7월 11대 정조대왕으로 선발된 윤성찬 씨는 한의사로 수원한의사협회장을 맡고 있다. 윤 원장은 당초 임기인 2년을 넘겨 금년까지 4년째 정조대왕 역할을 맡고 있다. 새로운(?) 정조대왕을 선발해야 했지만 50회째를 맞이한 수원화성문화제에 맞춰 신임 정조대왕 선발을 1년 더 미뤘기 때문이란다. 그가 정조대왕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특별했다. 그는 한 언론(수원일보)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대표적인 조선시대 성군으로 꼽히는데, 개혁정신이 강한 성군이셨던 정조대왕에 대해 평소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신 아버님의 영향으로 정조대왕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더욱 흥미를 갖게 됐다. 그러던 중 1996년에 수원으로 이사를 오게 됐는데, 그 해에 처음으로 정조대왕 선발대회가 있었고, 화성능행차도 처음으로 재현됐다. 정말 멋있었다.
당시는 나이가 안돼 선발대회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정조대왕이 한번 돼 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고 2010년이 딱 나이가 되는 해였다. 그때 선발대회에 나가 정조대왕 역할을 맡게 됐다. 그리고, 수원시한의사회에서 정조대왕의 생애에 대해 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는데, 정조대왕은 수준이 높은 한의학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의학 서적을 저술한 최초의 군주이기도 하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할아버지 영조대왕이 아팠을 때 탕약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어의와 직접 토론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을 축성할 때는 노역에 참여한 백성들을 위해 제중단(濟衆丹)과 척서단(滌署丹, 더위를 쫒는 약)을 직접 처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한의학자로서의 정조대왕을 조명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윤 씨가 정조대왕으로 등극(?)한 게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대왕의 생애에 한의학 서적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술을 베푸는 한의사의 성품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고 사람을 귀히 여기는 성품을 쏙 빼 닮은 것이다. 정조대왕의 손금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윤 씨의 풍모와 한의사적 성품을 고려하면 괜히 정조의 손금이 막손금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의 생각도 남달랐다.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국가 지도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제일 커야 한다고 본다. 전체를 보는 눈, 국민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 역시 그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정조대왕 당시는 사회적으로 변혁기였는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매우 개방적이었다. 또,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소통의 도구들은 갖춰져 있는데도 여전히 사회전반에는 소통의 부재가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지도자라면 국민들과의 소통에도 더 노력해야 한다."
정조대왕 역의 윤 씨의 생각만 엿봐도 정조대왕을 쏙 빼 닮은 모습이다. 사회적 변혁기에 우왕좌왕 하지말고 순발력있게 상황을 판단해서 대응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요구되는 시대라는 말이다. 그 해답은 '국민들과 소통'이었다. 정조대왕 역의 윤 씨가 화성문화재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은 '불통의 군주' 모습이 아니라 소통을 즐기는 군주의 넉넉한 카리스마다.
그래서 그랬는지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이 재연되고 있던 봉수당 현장에서는 세상의 카메라가 다 모인 것 같이 복잡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진정한 주인공은 환호하는 백성들로부터 둘러싸인 정조대왕이었다.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 사람들이 화성문화제에 환생(?)한 정조대왕에 열광하는 까닭이다.
을묘(乙卯)년에 이루어져 '을묘원행(乙卯園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행차는, 표면상으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회갑도 같은 해에 겹쳤으므로 돌아가신 아버지께는 참배를, 살아계신 어머니께는 잔치를 베풀어 드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화성이었다.
그 행차를 그린 정조대왕능행차 연시가 시민퍼레이드와 함께 펼쳐졌는 데 그에 앞서 정조대왕이 머물렀던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에서는 과거시험이 재연되었다. 그곳에 정조대왕이 납시어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이 재연되고 있었다. 정조대왕은 화성으로 능행차 시 수원지역의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해 별도의 과거 시험을 치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역사적인 장소에서 화성문화제의 정조대왕 역(役)을 맡은 윤성찬 씨(한의사)를 가까운 곳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비록 분장한 모습이지만 마치 정조대왕이 환생한 듯 했다. 그는 행사 곳곳에 나타나 백성(시민)들을 격려하고 있었는데 그의 역할은 주로 환호하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일'이었다. 넉넉하고 인자하게 잘 생긴 풍모는 화성행궁의 화령전(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 봉안각)에 모셔진 '정조어진'을 쏙 빼 닮은 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은 당신이 나타날 때 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 때 마다 손을 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정조대왕 역의 윤성찬 씨 손금이 드러났다. 정조대왕은 막손금이었다. 정조대왕도 실제로 막손금이었을까. 궁금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주인공으로 각종 행사에 출연하는 정조대왕 역은 화성문화재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다고 한다. 수원 하면 정조대왕을 떠올릴 정도로 정조대왕은 곧 수원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손금까지 세세히 관찰해 가며 정조역을 선발하지 않겠지만, 수원시 SNS 팀장에 따르면 "정조 역의 윤성찬 씨가 옛날에 태어났으면 왕이되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만큼 윤 씨의 성품과 넉넉한 카리스마가 정조대왕을 쏙 빼 닮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막손금(막쥔금)의 운명'을 알아봤더니 놀라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에 알려진 막손금은 '로또'를 타고났을 정도로 좋은 손금이라고 하지만, 손금이 운명 전부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건 널리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막손금이 가진 여러 경우의 수 중에 어떤 운명이 도사리고 있을까. 한 경우를 보니 '막쥔금을 가진 사람은 변화에 매우 잘 대응하고 변화의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 막쥔금을 가진 사람은 이성과 감성이 혼합되어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변화의 상황에는 장점으로 발휘 된단다. 그래서 남들은 우왕좌왕할때 매우 순발력있게 상황을 판단해서 대응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변화에는 매우 민감해서 잘 대응한단다. 막쥔금은 변화를 줘야할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폭넓은 변화를 시도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 봉건시대와 단절하고 개혁적 성향의 효심깊은 정조대왕의 운명과 닮은 듯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정조 역의 윤 씨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 2010년 7월 11대 정조대왕으로 선발된 윤성찬 씨는 한의사로 수원한의사협회장을 맡고 있다. 윤 원장은 당초 임기인 2년을 넘겨 금년까지 4년째 정조대왕 역할을 맡고 있다. 새로운(?) 정조대왕을 선발해야 했지만 50회째를 맞이한 수원화성문화제에 맞춰 신임 정조대왕 선발을 1년 더 미뤘기 때문이란다. 그가 정조대왕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특별했다. 그는 한 언론(수원일보)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 대표적인 조선시대 성군으로 꼽히는데, 개혁정신이 강한 성군이셨던 정조대왕에 대해 평소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신 아버님의 영향으로 정조대왕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더욱 흥미를 갖게 됐다. 그러던 중 1996년에 수원으로 이사를 오게 됐는데, 그 해에 처음으로 정조대왕 선발대회가 있었고, 화성능행차도 처음으로 재현됐다. 정말 멋있었다.
당시는 나이가 안돼 선발대회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정조대왕이 한번 돼 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고 2010년이 딱 나이가 되는 해였다. 그때 선발대회에 나가 정조대왕 역할을 맡게 됐다. 그리고, 수원시한의사회에서 정조대왕의 생애에 대해 세미나를 가진 적이 있는데, 정조대왕은 수준이 높은 한의학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의학 서적을 저술한 최초의 군주이기도 하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할아버지 영조대왕이 아팠을 때 탕약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어의와 직접 토론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을 축성할 때는 노역에 참여한 백성들을 위해 제중단(濟衆丹)과 척서단(滌署丹, 더위를 쫒는 약)을 직접 처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한의학자로서의 정조대왕을 조명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윤 씨가 정조대왕으로 등극(?)한 게 우연이 아니었다. 정조대왕의 생애에 한의학 서적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술을 베푸는 한의사의 성품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고 사람을 귀히 여기는 성품을 쏙 빼 닮은 것이다. 정조대왕의 손금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윤 씨의 풍모와 한의사적 성품을 고려하면 괜히 정조의 손금이 막손금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의 생각도 남달랐다.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국가 지도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제일 커야 한다고 본다. 전체를 보는 눈, 국민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 역시 그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정조대왕 당시는 사회적으로 변혁기였는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매우 개방적이었다. 또,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소통의 도구들은 갖춰져 있는데도 여전히 사회전반에는 소통의 부재가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지도자라면 국민들과의 소통에도 더 노력해야 한다."
정조대왕 역의 윤 씨의 생각만 엿봐도 정조대왕을 쏙 빼 닮은 모습이다. 사회적 변혁기에 우왕좌왕 하지말고 순발력있게 상황을 판단해서 대응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요구되는 시대라는 말이다. 그 해답은 '국민들과 소통'이었다. 정조대왕 역의 윤 씨가 화성문화재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은 '불통의 군주' 모습이 아니라 소통을 즐기는 군주의 넉넉한 카리스마다.
그래서 그랬는지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이 재연되고 있던 봉수당 현장에서는 세상의 카메라가 다 모인 것 같이 복잡했다. 수원화성문화제의 진정한 주인공은 환호하는 백성들로부터 둘러싸인 정조대왕이었다.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 사람들이 화성문화제에 환생(?)한 정조대왕에 열광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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