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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창동예술촌에서 처음 본 한글판 독립신문 원본


Daum 블로거뉴스
 


창동예술촌에서 처음 본 한글판 독립신문 원본
-진품과 짝퉁 독립신문의 비하인드스토리 까칠까칠-

 창동예술촌에서 처음 본 서재필의 독립신문 원본 한 쪽


한글을 처음 사용한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이름 만큼이나 우리나라의 '독립'에 기여했을까.

Daum view


얼마전 도시재생사업으로 빈 점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마산의 창동예술촌을 다녀오면서 '참 괜찮은 골목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창동에 거주하시는 분들 한테는 익숙한 골목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초행길의 여행자들에게는 발걸음을 붙드는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골목길 곳곳에 입주해 있는 예술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 창동네거리에서 가까운 오동동의 통술집이나 마산어시장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살펴보면 이야기 보따리가 무궁무진한 것 같았다. 그야말로 버튼만 누르면 스토리텔링이 시작되는 그런 도시라고나 할까.


창동예술촌 꿀단지고서방 앞 골목길 풍경
 

창동예술촌에서 우연히 '독립신문'의 원본 한 쪽을 만나다

창동예술촌의 골목길을 여기저기 불러보는 동안 글쓴이의 발길을 오래동안 붙들어 둔 한 책방에는, 마치 시간을 박재해 둔 듯한 골동품들이 수두룩 하게 쌓여 이방인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곳은 이름 조차 달콤한 '꿀단지고서방(주인 김영철 사장)'이었다. 그곳에서 오래전 학창시절 때 달달 외운 바 있던 '서재필의 독립신문' 원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참 의외의 사건이 꿀단지고서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 맨 처음에 등장한 사진 한 장이 1896년 4월 7일 서재필 박사가 창간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한글판 근대적 민간신문(독립신문)의 모습이다. 

그러나 글쓴이의 머리 속에는 이런 신문이 오래토록 자리잡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 보통 사람들 처럼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독립신문이라는 존재는 어쩌다 시험지 한쪽 구석에 자리잡을 망정, 생활 속에서 다시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닐에 곱게 싸 둔 독립신문의 원본 한 쪽을 보는 순간 만가지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독립신문의 역사적 가치 등 신문이 현대인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김 사장께 부탁하여 포즈를 좀 잡아달라고 간청하며 꿀단지고서방 곳곳에 숨겨져(?) 있는 골동품을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었으며, 김 사장으로부터 꿀단지고서방에 얽힌 이야기 까지 덤으로 챙겨오게 됐다. 
 


▲ 창동예술촌 꿀단지고서방


 글쓴이는 꿀단지고서방(고서방이란 고 씨 성을 가진 서방님이 아니란 거 다 아시죠? 古書房... ^^)의 김 사장께 사장이라는 호칭을 붙이자 그는 "사장이 아니라 지킴이 입니다"라고 말했다. 꿀단지고서방에는 독립신문 뿐만 아니라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되고 귀한 자료들이 빼곡하게 쌓여 빛을 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사장은 이런 자료들을 "판매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께 보여주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럼 뭘 먹고 살아요? 하고 되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 창동예술촌 꿀단지고서방 지킴이 김영철 씨가 흘러간 노래(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담긴 LP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독립신문은 두 종류가 있다

물론 꿀단지고서방에는 오래된 자료들 외에 보통 서적들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소유한 골동품들의 보유 목적이 더 궁금했다. 그는 꿀단지고서방에 수집한 골동품 등 자료들을 언제인가 "모두 (사회에)기증하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이들 물건들을 자신의 가게에 보관하고 지키는 게 그의 사명이라니.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독립신문을 들여다 보며 당시 다 나누지 못한 독립신문의 비하인드스토리 때문에 손가락이 근질근질해 지는 것이다. 

오래전 까까중 머리로 학교에 다닐 때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독립신문'은 그저 암기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분들의 이름도 주로 그랬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단재 신채호 선생 백범 김구 선생 등도 서재필과 같은(?) 반열에 있었던 암기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분들이 독립운동을 했거나 어떤 이념을 가지고 우리 민족이나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없었다. 다만, 몇 몇 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신 분 정도로 기억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암기할 때도 '서재필의 독립신문'으로 암기하며 독립신문이 창간된 연대나 주요업적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신문'이라는 제호가 상징하듯 '독립'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한 독립군과 무관하지 않겠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 등에 기여한 최초의 한글판 신문 정도로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건 오류였고 최소한 글쓴이에게 독립신문은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수 십년 이상 흐른 지금 독립신문 뿐만 아니라 활자로 찍어낸 각종 신문들 조차 여전히 관심 밖에 머물고 있는 건 왜일까. 꿀단지고서방에서 독립신문 원본 한 쪽을 보면서 트라우마 처럼 도사리고 있던 기억들이 총알 처럼 튀어나오며, 신문이 나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이 어떠한 지 뒤돌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독립신문은 두 종류가 있었다. 
 


서재필의 한글판 '독립신문' 창간시 일제강점기가 아니었음
 

그 중 하나가 서재필로 기억되는 '독립신문(1896.4.7.~1899.12.4.)'이었고, 또 하나는 '독립신문(獨立新聞) 상해판(1919.8.21.~1926.11.30.)'이었다. 이 신문은 독립운동의 본산이 되는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이념을 널리 전파하고 중국 만주 지방의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외에 알렸던 신문이다. 신문의 제호는 '獨立'에서 '獨立新聞'으로, 다시 '독립신문'으로 바뀌었다.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과 한인들의 정신적 구심체로써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민족 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신문이다. 이를 테면 후자의 독립신문이 진품 독립신문이며 전자의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무관한 짝퉁 독립신문이었던 것이다. 

  

 ▲ 창동예술촌 꿀단지고서방 지킴이 김영철 씨가 들어보인 '서재필 독립신문'은 원본이나 '짝퉁 독립신문'이었다.
 

따라서 꿀단지고서방이 보유하고 있었던 독립신문 한 쪽은 원본이었지만, 우리나라의 독립과 무관한 독립신문이었던 것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에 붙자는 (친일의)속뜻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임금이 버젓이 있었고, 조선국이라는 국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므로 '독립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연대를 살펴보면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는 1890년대였으므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이후 일어난 치욕과 수치의 일제강점기 당시의 '독립'의 의미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역사 조차 무관심했다면 독립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어느 게 짝퉁인 지 쉽게 구분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만으로 진품과 짝퉁을 가리기는 쉽지않고 독립신문과 관련한 비하인드스토리는 숱하게 많다. 그 중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보여준 친일행위를 살펴보면 가관도 아니다. 이런 모습이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이 끄적인 무개념 친일 논조
 

"일본왕의 하루 (일황 폐하 동작) 일본 신문에 일본 황제의 날마다 하시는 일을 기재하였는데 말하였으되 일황폐하가 아침 오전 6시에 기침하시더니 근일에 와서는 5시에 일어나셔서 한시간 동안은 화원으로 다니며 운동하시고 그 동안에 일본 노래를 5∼6수 지으시고 6시에는 사당에 다니시고 조반 후에는 각처 신문과 공사를 보시고 그 다음에는 독일 책을 가장 주의하여 보시고 그 다음에는 각부 대신의 상주 내용을 보시고 오후 5시쯤 말타고 운동하시고 6시에는 사당에 다니시고 저녁 후에는 신문이나 책이나 읽으시고 10시나 혹 12시에 취침하신다더라.(국민일보 독립신문 웹사이트에서 재인용, 1898년 9월 15일 제139호)  

또한 독립신문은 당시 일본의 강탈에 맞서 떨쳐 일어선 의병과 지방관리의 부정부패에 맞선 동학교도들의 항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조로 친일적인 모습을 드러내며 비난하였다.  "흥해서 비도 1백명을 처부수었는데, 총맞아 죽은 놈이 10여명이요, 충주 월악산에서 총에 맞아 죽은 비도가 7명이요, 층암절벽 숲 속에 떨어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라, 7월 19일 도지휘관 김재은씨가 군부에 보고를 하였는데, 이달 20일 중대장 조관현씨의 보고를 보니, 군부대신 명령에 제천 비도괴수 류인석을 생금한 자 있으면, 당오전 만냥을 상을 주고 그의 큰 괴수도 잡으면 상을 주겠다고 각처에 방을 부쳤다고 하였더라."(김삼웅, 한겨레신문 1996년 4월 10일자에서 재인용)...<출처 
http://rage1976.tripod.com/mine/inde.htm>"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이 밖에도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대한 비판 글이 수두룩 한 데,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에는 정부에 협조적이었고 국민에게 정부 시책을 계몽하는 입장을 취하는 척 하다가 독립협회가 생기고 난 뒤부터는 본색을 드러내 반정부적인 태도로 바뀌어 갔으며, 애국지사를 헐뜯고, 일제 앞잡이를 두둔하며, 반청친일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우리 군대의 증강에 반대하면서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기를 원하고, 일본 화폐의 사용을 주장하며 일본 국왕 어미의 죽음에 대해서는 32일간 애도를 표시하면서도, 명성황후 국장(이장)에는 "죽은 뒤라도 황후의 존칭을 받았으니 사기에 빛나는 일"이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했다고 전하고 있다. 독립협회 기관지로 충실했던 독립신문, 독립협회 초대 회장은 안경수였는데. 그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참살할 때 이를 도왔고, 고종을 시해하려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경술국치 때 일제로부터 그 유족이 은사금을 받았던 부왜인이었고, 독립협회 초대 이사장은 (매국노)이완용이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오늘날 조중동(동아.조선) 및 편파보도를 일삼고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등, 샴쌍둥이 같은 <찌라시 언론>들과 숙명적 관계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대략 이 정도만으로도 짝퉁 독립신문을 보는 순간 머리 속을 스쳐간 만가지 생각 중 한 두가지 정도이다. 그 역사적 사료가 창동예술촌의 꿀단지고서방에서 글쓴이를 기다리며, 2012 대선을 앞둔 오늘날 나라와 민족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찌라시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그냥 봐 넘길 게 아니었다. 그게 하필이면 '신문의 날'을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일에 맞추었다니. 우리나라는 언제쯤 친일.숭미세력들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롭게 될까. 
독립신문에 뒤엉킨 비하인드스토리는 까칠까칠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왜곡된 역사인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마산의 창동예술촌을 다녀오면서 '참 괜찮은 골목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역사적 자료들을 잘 보관해 우리의 정체성 등을 되찾게 만드는 한 지킴이의 노력이, 정론을 거부하고 왜곡된 역사를 만들고 있는 조중동 등 찌라시들 보다 더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위대함이 무엇인 지 보여준 한 골목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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