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 둔 대한민국 국민들은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증언 중 아래 증언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몇이나 될까...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증언이 김재규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말은 밖에 안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각하(박근혜의 애비 박정희)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명령하겠다."하니까.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라고 하는 것도 희생을 시켰는 데 우리 대한민국은 100,200만명 희생한다고 문제될 거 있느냐"고 이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이 끼칠 그런 이야깁니다.-10.26거사 후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증언-"
지난 9월 23일, 글쓴이는 '경남도민일보 해딴에'가 주최하는 1박 2일의 팸투어에 참가하고 있었다. 1박 2일 동안 우리 일행이 둘러본 곳은 도시재생 프로잭트가 진행중인 창동예술촌과 오동동 등 창원시 원도심(옛 마산) 일원이었다. 1박 2일의 일정은 참 바쁜일정이자 옛 마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뿌듯한 일정이었다. 생기를 잃어가던 창동 네거리의 빈 점포에는 예술인들이 입촌하여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고, 향토 사학자 박영주 씨의 안내로 이어진 3.15의거 발원지나 부마항쟁의 발원지인 창동네거리 등을 둘러보는 동안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노래 속에 그려진 잔잔한 바다 '가고파'의 고장 마산이 격동기의 현대사를 다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간밤에 우리는 꽤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어느덧 새벽이 다가오고 곧 날이 밝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자리에 든 시간이 새벽 4시였으므로 이야기의 주제가 만만치 않았거나 한 배 두 배 나눈 술잔 때문에 객기가 발동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향토사학자 박영주 씨와 부마항쟁 등 민주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박 씨는 부마항쟁사를 엮은 장본인이기도 했으므로 당시 부산대학교에 재학중이었던 죽마지우 S 씨가 앞장서게된 부마항쟁 당시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끼어든 것이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 속에 부마항쟁으로 이어진 10.26의거는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언필칭 '부마항쟁'이라는 키워드를 등장시킬 때 마다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게, 유신의 심장으로 불리우던 박정희와 그 심장을 겨눈 김재규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것이다. 마치 샴쌍둥이 같은 존재가 이들 두 사람의 운명이었던 지.
팸투어를 끝마치고 귀가한 후 3.15의거 발원지나 부마항쟁의 발원지인 창동네거리에 얽힌 이야기를 10.26의거날 즈음 되새겨 보고자 마음 먹었던 것이다. 겨우 눈을 붙이다 만 것 같은 데 창밖으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마산관광호텔 테라스에서 바라본 합포만(合浦灣)은 면경같이 고요했다. 이렇게 고요한 바다 때문에 이은상님은 '가고파'에 마음을 실어보냈던 것일까. 가고파의 노랫말은 이러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 같이 살고 지고 내 마음 색동옷잎혀 웃고 웃고 지내고자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우리가 즐겨 불렀던 '고향의 봄'과 '가고파'를 부를 때 마다 잘 알지도 못할 아득한 그리움에 빠져드는 건 왜일까. 사람들은 가고파의 배경이 된 합포만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적지않은 분들은 가고파가 쓰여진 1932년 당시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고도 하지않는다. 이은상님의 시 가고파는 일제강점기 당시(1932년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할 때)에 쓰여졌다. 당신이 노랫말 속에 그린 합포만은 비유적으로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시인의 외침을 토로한 저항시(抵抗詩)였던 것이다.
나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컷으면, 그 잔잔한 바다와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의상이었던 오방색 색동옷을 입히고 눈물없이 평화롭게 살던 때를 그리워 하고 있었을까. 부시시한 채 깨어나 마산관광호텔 테라스에서 내려단 본 합포만은 너무도 잔잔했다. 누구인가 돌맹이 하나를 주워 던지면 퐁당 하는 소리가 글쓴이가 묵고있는 방까지 들릴 정도였고, 햇살은 눈부셨다. 합포만이 잔잔했던 것 처럼 우리 민족의 명운을 가른 근현대사의 민주항쟁 발원지는 모두 잔잔한 바다 처럼 평온했고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있는 지역이었던 것 같다. 그곳은 부마항쟁의 발원지 옛 마산이었으며 빛고을 광주였다. 모두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었다.
아침을 합포만 가까운 해장국집에서 새콤한 복국으로 가볍게 먹은 우리 일행들이 찾은 곳은 3.15의거 및 부마항쟁의 발원지였다. 오늘날 진해시.마산시.창원시가 합해 창원시(옛 마산)로 이름이 바뀐 창동네거리에서 부마항쟁의 흔적을 찾게되었는 데,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을 때만 해도 부마항쟁을 알 수 있는 표지석 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가고파의 노랫말 속 뜻이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 처럼 부마항쟁이 가져다 준 역사적 의미는 부마항쟁의 현장에서 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지 부마항쟁이 일어났던 창동네거리 한편에 기념물을 세운다는 게 우리를 안내한 향토사학자 박영주 씨로부터 알게된 사실이었다.
이곳이 한국의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부마항쟁의 발원지였다. 마산이 3.15의거 및 부마항쟁을 통해 민주성지로 거듭나게 된 장소가 창동네거리를 중심으로 이어진 거리였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마산'이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올리는 키워드 몇개를 손꼽아 보면 가고파의 고장, 마산 아구찜의 고장, 3.15의거, 부마항쟁 등이다. 그런 마산이 창원시로 통폐합 되면서부터 옛마산은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져가고 있었던 것인데 그 중에 창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창원시가 부랴부랴(?) 도시재생 프로잭트를 통해 창동예술촌을 만들고 창동의 옛 영화를 되살리는 건 좋았지만,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민주화의 성지' 만큼은 여전히 정치적 바람을 타고있는 게 현실이었다. 3.15의거 및 부마항쟁의 당사자와 다름없는 오늘날 새누리당(박근혜 후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지. 창동네거리에 설치하고자 계획했던 부마항쟁기념조형물 사업이 취소되기에 이른 것이다.
▲부마항쟁의 발원지 창동네거리 모습, 당초 창원시는 이곳에 부마항쟁 조형물을 조성하기로 했으나 10.26의거를 얼마 앞두고 돌연 취소했다.
경남도민일보의 한 칼럼<유신 그림자, 민주성지 더럽혀선 안돼>에 따르면, 글쓴이 등이 다녀온 부마항쟁 발원지의 기념물 조성 사업이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이전허가가 취소되었다는 암울한 소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의 전말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향토사학자 박영주 씨께 전화를 걸어 부마항쟁 발원지 조형물 설치가 취소된 사건의 경위를 알아봤다.
"...박 선생님, 지난달 방문한 창동네거리의 기념물 조성 사업이 취소되었다는 데 어떻게 된 일이죠?..."
"...제가 알기로는 창동의 상인회와 입주단체 등이 반대 민원을 시청에 넣어서 허가가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정인옥 씨)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참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김륭 시인님'의 글에 그 경위가 나와 있을 겁니다. 참고하시고요..."
"창원시장은 어느쪽이지요?..."
"네...그렇지요. 창원(시장)은 한나라당(새누리당) 쪽이지요."
"그렇다면 (이번 결정이)금번 대선과 무관하지 않겠군요."
"하하...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 향토사학자 박영주 선생이 창동네거리에서 노동운동에 헌신한 '소담 노현섭 선생'의 생애 등에 대해 일행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모습
오랜만에 전화를 통해 목소리를 듣게된 박 선생은 전화기 너머에서 반가운 표정이었지만, 글쓴이의 문의 내용의 결과가 썩 반가운 눈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마산을 방문하게 되면 뵙기로 하고, 박 선생도 넌지시 알고 있었던 '김륭 시인'의 칼럼을 통해 부마항쟁기념사업회가 추진 중이었던 조형물 이전 사업이 어떻게 되었는 지 다시 살펴보니 이랬다.
"...이 조형물은 부마항쟁 20주년을 맞아 옛 마산시 예산과 시민성금으로 지난 1999년 10월 제작, 신마산 청소년공원에 설치했다. 이를 항쟁의 역사적 현장인 창동으로 이전하는 것이 부마항쟁 정신을 살리는 한편, 창동 도시재생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와 창동상인회, 창원시가 지난 4월에 합의, 이후 유관 부서에서 심의해 최종 이전허가를 내려 시의 지원으로 이전을 위한 기초공사(9. 10)까지 마쳤다.
그런데 느닷없이 3·15의거기념사회와 관련단체의 민원을 접수한 시당국이 이전허가 취소를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통보하고(9. 24), 단 하루 만에 허가취소(9. 25)를 통보했다.이쯤 되면 마산시민 그 누구라도 눈치 챌 것이다. 이게 갈등인가? 이건 차라리 '억압'이다. 굳이 갈등이란 용어를 빌려야 한다면 행정기관의 어처구니없는 조치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해당 단체들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조정해야 할 당국이 시민들의 의견이나 행정의 기본을 도외시한 채 특정단체의 민원에 일방적으로 이전허가 취소까지 강행하는 졸속행정에 대하여 시민들은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까..."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을 기고한 김륭 시인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여태껏 잘 진행되고 있던 부마항쟁기념사업이 10.26의거 33주년을 코 앞에 두고 돌연 취소된 것이다. 겉으로는 일부의 민원이 문제라고 하지만 부마항쟁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관련 단체 등의 입장이나 부마항쟁기념사업이 뜻하는 바를 참조하면 그건 핑게거리 외 더도덜도 아닌 셈이었다. 따라서 칼럼의 저자는 이 사업을 중도에 취소하도록게 민원을 제기한 3.15의거 관련단체와 부마항쟁의 대상이었던 유신독재자와 그의 딸 박근혜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고 있었다.
"...부산서 시작해 마산서 끝장을 본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현대 민주화운동의 금자탑이다. 이를 상징하는 조형물 이전을 같은 민주화 단체의 맏형이 반대한다? 뭔가 있다는 느낌 아닌가. 행여 그 이유가 이른바 유신공주의 치마폭에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부마항쟁의 역사적 가치를 외면한 정치권에 마산 시민항쟁의 맏형인 3·15는 이렇게 말하는 게 상식이고 원칙이다.
"과거사위원회 조사결과 이미 드러난 대로 위수령 이전에 불법적 군대 동원으로 진압하고 사망자까지 발생한 데 대하여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당시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창동으로 이전한 부마민주항쟁 상징조형물 앞에 고개 숙여 사죄하라"고 말이다."
부마항쟁의 발원지가 위치한 창동은 부마항쟁 뿐만 아니라, 3.15의거와 4.19의거 민주혁명 당시 마산 시민이 분연히 일어나 항쟁하던 민주 항쟁의 성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마산에는 민주항쟁과 거리가 먼 친정부 어용 단체가 난립하면서 주민들 간에 갈등을 유발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 10월 18일자 <한겨레>에 따르면 부마항쟁 관련단체들은 부마민주항쟁의 진상 규명 등을 위해 새누리당이 설립하려는 '부마민주주의재단(새누리당 100%)'과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에 대해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이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에 따른 조처를 이뤄내기에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기 때문이다. 평가를 받아야 할 대상이 스스로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부마민주항쟁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애비 박정희 등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 지 등에 대해 짧게 언급하며 글을 맺도록 한다. 부마민주항쟁(오늘날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불렀던 것 처럼 당시엔 '부마사태(釜馬事態)'라 불렀다.)을 <브리테니커> 사전에 기록된 내용으로 개관하면 이렇다.
"부마사태는 1979년 10월 16~20일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던 (박정희)유신체제는 1979년 들어서 '백두진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 등을 겪으며, 각종 시국사건에 대해 강경대응하여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체포·연행·연금 등이 잇달았다. 더욱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변칙으로 통과시켜 정국을 파국상태로 치닫게 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은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저녁에는 부산시청 앞에 집결하여 부산시내 중심가까지 진출, 애국가 등을 부르고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0월 17일 저녁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충무파출소·한국방송공사(KBS)·서구청·부산세무소 등이 파괴되고 경찰차량도 전소 내지 파손되었다.
경찰력만으로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여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계엄군에 의해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부산의 시민·학생들은 진압되었으나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마산지역에서 마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을 타격하는 등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10월 19일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의 근로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마산시내는 한때 치안부재의 상태가 되기도 했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의 강경책을 전개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산시켰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지난달 23일 글쓴이 포함 1박 2일의 팸투어에 참가하고 있었던 전국에서 초청된 블로거들은, 도시재생 프로잭트가 진행중인 창동예술촌과 오동동 등 창원시 원도심(옛 마산)을 둘러보며 3.15의거 발원지 및 부마항쟁 발원지였던 창동네거리 등을 둘러보고 있었다. 휴일(일요일) 아침 창동네거리는 합포만의 바다처럼 정적이 흐르는 듯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그러나 33년 전 창동네거리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유신독재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이 부산에서 시작하여 마산 창동을 중심으로 활활 타오르며 전국적으로 확산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다급해진 쪽은 박근혜의 애비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중정부장 김재규 등 유신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궁정동의 안가에 모여 부마항쟁에 대한 대책 등을 논의하며 '시바스리갈'을 마시는 마시는 한편, 가수 심수봉과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구고 있었다.
심수봉은 '그때 그사람'을 신재순은 '사랑해'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노래 제목과 전혀 딴판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사랑하기는 커녕 두 눈에 독이올라 금방이라도 불이붙을 듯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사람들의 주요 대화는 부마항쟁의 성격 등에 대한 판단이 주요 관심사였다. 당시 부마항쟁의 모습은 MBC가 다룬 다큐 <다큐멘터리 - 궁정동 사람들(10.26 사태)> 속에서 "전체 학생들이 민중과 더불어 소위 민란을 일으킨 상황입디다. 그게 끔찍한 이야기거든...-故이재전, 전 경호실 차장- "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신독재의 폐해가 민란을 불러왔던 것이며 그 시작은 부산에서부터 마산으로 불이 옮겨붙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 차지철은 김재규와 다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당시 차지철은 부마항쟁의 원인이 김영삼과 신민당의 야당의 사주를 받은 소수 사회 불만세력(깡패.부랑아. 구두닦이. 심지어 목욕탕 때밀이 등)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부산 마산 지역에서 보고된 보고서 내용은 주로 폭동이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사태 파악이 잘 못 된 것이었다. 그게 10.26의거를 불러오게 될 운명일 지 박정희나 차지철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유신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27살 처녀(?)시절이었다.
하지만 김재규의 생각은 달랐다. 김재규와 박흥주는 부마항쟁 직후 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민심이반이 심각하며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청와대 안보소회의에 보고했던 것이다. 그가 본 부마항쟁의 발원지에는 "시민들이 물을 떠나주고 시민들도 같이 호흡을 하는 데 이것이 굉장히 심각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마치 잘못되면 다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궁정동 안가에서 맨 처음 끄집어 낸 화제도 부마항쟁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날 박정희와 차지철은 강경진압을, 김재규는 온건한 진압을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김계원(전 대통령 비서실장)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산사람들을 김영삼이가 선동해서 그렇게 된 거다. 대통령은 그냥, 철두철미하게 머리에 그렇게 생각이 박혀있었어요. 그걸 이제 차지철이 그렇다 하고, 그게 그날의 근본적인 문제죠." 하고 당사 상황을 증언했다. 이를테면 차지철은 김재규 앞에서 깐죽깐죽 약을 올리는 상황이었다.
또 김재규의 머리 속에서는 박정희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차지철은 물론, 차지철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며 김재규 자기를 무시하며,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는 박정희를 당장이라도 권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싶었던 심정이었던 것인 지. 10.26 거사는 차지철의 깐죽거림과 박정희의 판단력이 오락가락하는 등 어우러지며 죽음의 시간을 서서히 앞당기고 있었다. 이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절로 돋게 만드는 발언이 박근혜의 애비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로부터 나왔다. 김재규의 증언이었다.
"이 말은 밖에 안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각하(박근혜의 애비 박정희)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명령하겠다."하니까.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라고 하는 것도 희생을 시켰는 데 우리 대한민국은 100,200만명 희생한다고 문제될 거 있느냐"고 이러한 얘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이 끼칠 그런 이야깁니다."
김재규는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당긴 권총의 방아쇠에 대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일제에 피로 맹세하고 우리 독립군을 못살 게 군 박정희의 유신독재 18년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박정희 나이 62세되던 해였다. 10.26의거에 대해 반대론을 펴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게 돌발적인 '사태'이지 어떻게 계획된 '의거'라는 말이냐는 등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증언 등을 참조하면 박정희나 차지철은 죽음을 자초한 게 맞는 말이다.
역사란 만약을 허용치 않지만,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하지 않았다면 한국 사회는 자칫 정치적인 이유로 300만명이 희생된 도무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킬링필드'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김재규가 '한국판 킬링필드'를 막은 사건이 10.26의거였던 것이다. 김재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평소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박정희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고 명령'을 하겠다는 불순한 생각만으로 총살을 당했으며, 차지철은 '킬링필드를 부마항쟁에 적용해도 별 문제를 못 느낀다'고 말하는 순간 총살을 자처한 것이다. 유신의 심장부는 이렇듯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김재규는 그 심장부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10.26의거가 진행될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의 대국민관이었다. 이를테면 충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간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화를 자초한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 등이 총살 당한 33년 이후 비록 시대상황은 다르지만,오늘날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 등 여권의 사람들도 10.26의거 직전 상황과 역사인식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특히 박근혜 후보는 사람들의 진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며 어찌 그렇게도 애비의 운명을 닮아가는 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정부 언론을 통해 국민들을 향해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사실을 왜곡 호도하는 가 하면, 정치검찰을 통해 민주.애국시민들을 탄압하고, 유신독재의 숙제를 고스란히 간직한 5.16군사쿠데타,인혁당사건,정수장학회 망언을 통해 과거사를 합리화 하는 모습 등은 김재규가 들어도 소름돋을 만큼 발칙한 일들이라 사료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가슴 속은 가고파의 고장 합포만 처럼 고요하고 빛의 고을 광주처럼 평화롭기를 원한다. 하지만 한 순간 국민들의 마음을 잘 못 파악하여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땐 부마항쟁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처절한 응징의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를 40년 전으로 거꾸로 돌리고 있는 한국판 킬링필드 음모의 후손들이 잘 새겨 듣기 바란다. 역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10.26의거를 잘 그린 '다큐멘터리 - 궁정동 사람들(10.26 사태)'을 참조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