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내린 비의 양은 꽤 많았다. 한국에서 장마철에 내리던 비 같았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가을 비가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산티아고 분지의 하늘은 온통 먹구름 투성이였다. 가을비가 내리던 사흘 전에는 음산한 기운까지 맴돌아, 깊숙히 넣어 두었던 옷을 하나 더 챙겨입는 한편 숙소의 침대에 히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가뜩에나 일교차가 큰 이 도시에 가을비가 내리니 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한국의 가을이나 겨울은 사계가 뚜렷하여 환절기 마다 때에 걸맞는 신호를 보내면서 계절을 알리는데 비해 산티아고의 겨울 준비는 한국의 장마철을 쏙 빼 닮았다. 곧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셈이다. 그런데 산티아고의 늦가을 풍경은 우기의 풍경 외 보다 극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사흘 전 가을비가 내린 산티아고는 그 다음날 산티아고 시민들을 설레게 했는데, 산티아고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내려다 보고있는 로스 안데스에 새하얀 눈을 뿌린 것이다. 금년들어 처음 내린 눈이자 산티아고 분지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안데스의 고봉에는 눈을 뿌리는 것이다.
그 장면들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 안데스 자락을 여행해 본 경험이 있는 여행자들은 다 아실 것이다. 마치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을 안데스가 지니고 있다고나 할까. 그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넋이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데스로 빨려들고 마는 것이다.
이틀 전,...
나는 다른 일정들 때문에 이 도시 한 곳을 배회하다가 안데스가 하얀 옷을 두른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게 됐다. 첫 눈이 내린 안데스의 고봉은 마치 지남철 처럼 가슴을 설레게 만들며 강한 자력으로 당기고 있었다. 그 자력이 얼마나 강했으면 마치 특정 종교 단체의 광신도와 교주 관계 이상이었던 같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처럼, 나는 그 장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땐 알량한 볼 일 때문에 그저 속으로 애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안데스의 강력한 자력은 그 날 저녁나절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가을비는 앞으로 수도 없이 더 내릴 것이며, 겨울 내내 안데스는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을 텐데, 그 사이를 참지못해 발길을 로스 안데스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만큼의 기분은 '두 번 다시 이런 광경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꽉 채워두고 있었다. 그게 첫 눈이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곳에 가면 이 세상에서 다 하지못한 일들이나, 가슴 깊숙한 내면에 숨겨진 슬픔이나 희열이 한꺼번에 폭발할 것 같은 생각들이 자꾸만 아른거리면서 발길을 재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슬픔인지 노여움인지 기쁨인지 우울한 기분인지 보다 자세히 더 들여다 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그 품에 안기기만 한다면, 모든 게 치유되거나 희열이 증폭되어 마침내 안데스의 하늘과 하나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안데스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같은 경외심을 가지게 만들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비단 나 혼자 뿐만 아니었다.
이 도시에 살고있는 다수의 사람들 중에는 병풍처럼 둘러처진 안데스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자, 안데스의 장엄한 기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데스가 하얀 옷을 갈아입고 두 팔을 벌리는 순간 너도 나도 로스 안데스로 발길을 돌리는 한편,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시민들은 동쪽의 안데스를 잘 바라볼 수 있게 만든 '라스 꼰데스' 지역에 남미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짓고, 그 이름을 '남미의 자존심'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높이가 400미터에 달하고 약 78층의 이 빌딩이 다 지어지면 안데스의 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사람들이 짓는 빌딩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특정 공간 속에 가두어 두지만, 안데스는 그런 구속을 원치않았다.
늦가을이 되어 산티아고 분지에 비가 오시면, 하얀 장삼을 두른 채 사람들을 향해 그저 두 팔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틀전,...이제 막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안데스의 매력에 깊이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그 허우적 거림은 숙소로 돌아오는 시간 까지 이어지며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게 만들었다. 안데스의 넉넉한 카리스마가 여전히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우리가 산티아고를 통해 전설의 땅 빠따고니아로 발길을 돌리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안데스가 우리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한편의 서사시를 보는 듯한 그 장엄하고 넉넉한 안데스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자'고 마음먹으며, 다시 한 번 안데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내린 가을 비가 만든 운명치고는 설명하기 힘든 숙명같은 게 안데스의 품 속에 숨겨져있었던 것 같다.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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