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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IAGO

노벨 문학상 '파블로 네루다'의 에로틱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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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파블로 네루다'의 에로틱 우물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 생가를 찾아가 보니-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위 파블로 네루다의 사랑의 시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중 '한 여자의 육체(출처: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사랑하고 투쟁하다')중에서 인용된 에로틱한 시다. 참 오래전 나의 청색시대 때 태평양 너머 칠레의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생몰1904년 7월 12일 ~ 1973년 9월 23일 용띠 ,이하 '네루다'라 부른다.)반공교육을 열심히 받던 70년대 그의 시를 접하며 시 속에 녹아든 사랑의 시에 매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랑의 시는 청색시대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며 사상 보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을 할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네루다는 에로틱한 사랑의 시 때문에 알게 되었을지도 모를 멋진 인간이었다. 그가 스무 살 언저리에 끄적였던 사랑의 시는 그가 죽을 때 까지 세 명의 여성을 만나 살게한 운명적인 계기가 되었을까. 
 



나는 산티아고의 산끄리스토발 산 기슭에 있는 네루다의 생가를 찾아가는 동안 그가 내 기억 속에 남겨준 노랫말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네루다가 발파라이소 언덕에서 태평양을 내려다 보며 정치적 제기를 노리며 지하방에 숨어들어 한 여성을 사랑하는 장면만 떠올렸다. 군사 쿠데타로 빼앗긴 좌파정권을 되살리려 노심초사 하며 피신해 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네루다의 생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으로 부터 반공교육을 열심히 받던 70년대 그의 시를 접하며 시 속에 녹아든 사랑의 시에 매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랑의 시는 청색시대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며 사상 보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을 할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내게 네루다는 그런 사람이었고 수십년 이상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한국에서 가장 먼 나라이자 기후가 정반대인 칠레의 지정학적 위치처럼 남미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철저한 반공주의를 교육하고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파고들 여지가 희박할 때 였다. 그런데 150일간 파타고니아 투어를 마치고 산티아고에서 여독을 풀고있는 동안 네루다가 자연 스럽게 다가왔다. 
 



사흘전 네루다의 우물 곁을 지날 때도 관심이 없었는데 이틀전 우연히 산티아고에 살고있는 한 교민으로 부터 네루다의 생가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여, 저녁을 먹고 산책겸 아내와 함께 교민이 일러준 주소를 따라 네루다의 생가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젊은 네루다가 산티아고에서 사랑의 시를 쓰며 한 우물만 파고(?) 살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었다. 칠레 정부가 그를 기억해 낼 수 있도록(?) 생가 주변을 정리해 놓았던 것인데, 사흘전 그 골목을 지나칠 때만 해도 그곳이 네루다가 장차 사회주의 운동을 하며 민중시인의 자리를 잡을 수 있던 장소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참 묘한 건 산끄리스토발 산기슭을 배회하며 이곳의 고택과 고택에 새겨진 각종 문양이나 인테리어 등에 빠져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네루다가 살던 생가 근처는 참 고고한 기품이 흐른다고 생각했는 데, 그 장소에 네루다의 생가와 에로틱한(?) 우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네루다 생가 근처를 구경하고 다니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끙)...서울은 한참 멀었어. 네루다를 보유했던 칠레의 산티아고 문화는 100년은 더 앞선 거 같어."
 




우리는 1971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네루다의 문학세계나 그의 사회주의 운동 등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생가 앞에 파 놓은 우물 하나 때문에 내가 한마디 더 거들었다.

"흠...네루다가 마시고 놀았던 물이 다르긴 달라."




아내가 씨익 웃었다. 안데스에서 떠오른 태양이 동태평양 너머로 뉘엿거리며 산끄리스토발의 산그림자를 산티아고에 길게 드리울 저녁 나절이었다.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동안 우리의 관심사는 파타고니아의 자연이었다. 굳이 몇 개의 테마를 설정해 놓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여행한 건 <사람과 자연과 길>이었다. 우리는 파타고니아를 향해 칠레의 까르레떼라 오스뜨랄(Carreterra Austral)을 통해 150일간의 여정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며, 다시금 첫 출발지였던 남미의 관문이자 칠레의 관문인 산티아고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네루다의 성적표현이 진한 사랑의 시나 네루다의 사상 내지 문학세계 등에는 관심 조차 없었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숨을 고르며 다음 순서를 계획하고 있는 동안 네루다의 생가는 이방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사상적 루트를 되짚어 보는 것과 동시에 남미를 여행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남미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파타고니아를 투어하는 동안 한국에서 출국한 적지않은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한결같이 바빠보였다. 짧은 일정에 빡빡한 투어여정이 그들을 양떼 몰 듯 몰고 다니는 듯 했다. 이를테면 산티아고 내지 리마 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같은 남미의 수도는 그저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정거장 정도로 생각한다고 할까.
 


 
산티아고를 통해 남미 여행에 나서는 분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발파라이소 내지 뿌에르또 몬뜨 등을 통해 잽싸게 남미의 유명장소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끝으로 귀국길에 오르는 것이다. 파타고니아 투어를 통해서 느낀 바, 최소한 파타고니아만 해도 100년 정도는 걸려야 투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판된될 정도이므로 한달 또는 두어달 정도로 남미를 일주하는 일정은 여행자들을 피곤하게만 할 뿐이었다. 우리도 자칫 산티아고를 그냥 지나칠 뻔 했지만, 주지하다시피 산티아고의 매력을 찾아나서면서 부터 부랴부랴 느려터진 컴에 박차를 가하며 남미투어에 나선 분들에게 네루다와 같은 열정과 사랑으로 남미땅을 진정한 맛과 멋을 느꼈으면 하는 것이다. 
 


 
한국은 봄을 맞이하고 있지만 칠레의 산티아고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지구인들을 한 곳에 묶어 지구촌을 만든 인터넷 등 문명의 이기는 사람들을 매우 편리하고 만들고 또 바쁘게 만드는 등 디지털 시대로 만들고 있지만, 남미의 시계는 매우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네루다가 사랑한 이 땅은 시방 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려 쪼이지만 한국은 봄볕이 언 땅을 조금씩 녹이고 있을 뿐이다. 기후가 다르고 기후에 따른 정서적 변화는 시공을 동일하게 살아가는 디지털 시대에 또다른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네루다의 삶의 괘적에 빠져 문화적 충격을 통해 허우적 거리는 것 처럼, 한국사회는 봄 기운을 맞이하며 가을햇살이 내려쬐는 칠레의 산티아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안데스에 떠오른 붉고 뜨거운 햇살이 네루다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사랑의 시를 쓰게 만들었으며, 그가 왜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반공주의자 피노체트 등과 싸울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나는 네루다의 우물을 바라보면서 자주 사용하던 문구에 낱말 몇 개를 바꾸며 혼자 주절거렸다.
 



 ("그래 우물이라고 다 같은 우물이겠나. 네루다의 우물은 그를 도와준 한 여성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사랑의 시와 자본과 반공에 찌든 권력자들의 편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시로 가득했지만, 나를 낳아준 조국의 글쟁이들 다수는 베스트셀러만을 꿈꾸며 돈이 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게 아닐까.")
 



네루다의 생가는 허름했다. 산끄리스토발 산기슭 아래에는 저택들이 즐비하고 옛성주들이 살았던 어마어마한 고택들이 숱하게 널려있는 곳이다. 또 한국의 신도시 처럼 이곳 산티아고에도 라스 콘데스(Las Condes) 지역과 미국 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은 네루다가 살았던 시대의 풍경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미땅이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급격히 자본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네루다의 생가가 위치한 산기슭 앞에는 네루다가 조국과 여인의 사랑에 열병을 앓았던 것 처럼, 젊은 남녀가 우리들 앞에서 열정적인 딥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네루다의 생전에 이 모습을 우물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끄적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사랑이란,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핥고 빨아대는 것이야."  
 

 



파타고니아 투어에 나서면서 마음에도 없던 네루다는 우리가 그의 생가를 방문하면서 네루다의 문학과 사상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안데스를 운명처럼 짊어지고 사는 칠레의 산티아고는 북부 이끼께에서 부터 남극의 동토에 이르기 까지 모든 칠레노들의 로망이었다. 그들이 산티아고를 사랑한 힘은 자본이 가득한 신도시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아니라,네루다가  모든 열정을 바쳐 사랑한 민중과 대자연이었다. 그 대자연 속에서 가을이 무르익고 있는데, 그 속에는 칠레산 과일들 처럼 향기가 짙고 꿀맛 처럼 달콤함이 가득한 곳이다. 




네루다의 문학적 정치적 사상 등을 이해하려면 네루다가 그러했던 것 처럼 열정적으로 이 땅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미 땅 곳곳을 네루다가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라고 노래했던 것 처럼 남미땅 구석구석을 음미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네루다가 탄식한 것 처럼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을 마감하고 영원히 샘 솟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생가를 이틀 연거푸 방문했지만 그의 집은 문이 닫혀있었다. 또 그의 마당에 파 놓은 우물 조차 그물망을 덧씌워 두었다. 하지만 그의 우물을 들여다 보니 그 우물 속에는 산끄리스토발 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샘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위 그림들은 네루다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목과 생가 앞의 풍경 등이다.

네루다는  반공주의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 당시, 암으로 입원한 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피노체트는 좌파시인 네루다의 장례식을 공개거행할 것을 반대했으나, 수천명의 칠레사람들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통행금지를 어기고 공개적으로 애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 네루다의 장례는 칠레 군사독재정권 최초의 항거였다. 네루다라는 필명은 체코의 작가이며 시인인 '얀 네루다'에서 얻어졌으며, 나중에는 그의 법적인 이름이 되었다"위키백과가 전하고 있다. 남미여행 등을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네루다의 생가를 방문해 보면 남미여행의 참 맛이 배가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동시에 강추해 드린다. 곧 파타고니아의 생생한 다큐가 포스팅 될 예정이다. 많은 성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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