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아내는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한국에서 온 한 가족을 배웅하면서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그 표현이 사실인 것 같았지만, 산티아고의 한 숙소에서 늦은 밤 까지 삐스꼬(Pisco)를 마시며 주고받은 가족사 속에는 슬픔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미래가 이들 가족에게 어떤 행불행을 가져다 줄지 모르지만, 젊은 치과의사는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아내를 끔찍히 사랑했는데 말 수가 적은 그가 하나 둘씩 가족사를 이야기 하며 삐스꼬를 비울 때 마다 우리는 탄식을 하고 있었다.
(아...천지신명이시여...이들 가족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ㅜ)
간밤에 한국에서 여행을 온 한 가족을 만나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이들 가족 앞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대화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 가족의 여행에는 부부와 함께 초등학교 5학년의 딸아이가 동행한 특별한 모습이었다. 딸래미가 엄마 아빠와 함께 파타고니아 투어에 동참한 것이다.(학교는 어떻게 하고 여행을 왔지?...)
이런 상황을 금방 이해하지 못한 건 술좌석에 동석한 숙소의 사람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상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딸래미가 학교를 휴학(?)하고 파타고니아 투어에 나선 건 전적으로 아빠의 결정이었다. 어린 딸래미는 여전히 아빠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정이 아내를 위한 배려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아내가 물었다.
"...어떻게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게 됐나요." 안경을 끼고 말 수가 적은 40대 초반의 젊은 아빠는 한국에서 치과를 개업한 분이었는데, 삐스꼬 잔이 여러번 비게 되자 다소 경직되었던 표정이 밝아지면서 이번 파타고니아 투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 놓았다. 그는 금번 투어를 위해 잠정적으로 치과를 패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약 1년에 이르는 장기간 투어에 올랐는데 그 결정을 하게 만든 건 그의 아내 때문이었다. 30대 후반의 아내는 모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로 남편을 도와 열심히 치과 일을 해 오고있었다. 그녀는 성격이 얼마나 밝은지 시종 깔깔 거리며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외모에서 웬지 모를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됐는데 작은 얼굴이 붓기가 느껴질 정도로 몸 전체가 부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눈동자가 더욱 더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몸상태가 일반인에 비해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 것은 숱이 적은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가족의 생계가 달린 사업장을 패쇄하고 온가족이 함께 여행에 나선 이유가 아내 때문이란 게 자연스럽게 남편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아내는 5년 전에 유방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태는 (유방암 말기로)온 몸에 암세포가 전이돼 있고요..."
남편은 아내가 유방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좌중에 알렸다. 온가족이 여행에 나선 이유나 목적이 단박에 밝혀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의 얼굴에 붓기가 있는 건 항암치료 때문이었고, 그가 치과를 패쇄하고 투어에 나선 이유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유방암 말기의 생존율 하고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일반에 알려진 유방암 3기의 생존율이 50%에 이른다면, 유방암 말기의 생존율은 20% 이하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아...지금 우리들 앞에 앉아서 깔깔 거리며 좌중을 즐겁게 만드는 한 여인 앞에 놓인 운명이 그렇다는 말인가...ㅜ)
치과의사인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겪고 있는 암투병의 결과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일까. 한참 재밌게 살아갈 가족 앞에 청천벽력 같은 유방암 선고가 내려진 지 5년 만에 이들 가족이 선택한 건 파타고니아 투어였다. 그게 아내를 위한 남편의 마지막 선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딸래미는 왜 자신이 학교를 쉬면서 까지 엄마 아빠를 따라나섰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림들은 산티아고 '베야 비스타' 거리에 그려진 그래피티로 포스트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남편의 입으로 부터 아내의 유방암 선고가 전해진 직후, 우리는 화제를 즉각 돌려 파타고니아의 황홀한 정경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댓다. 어두운 표정의 남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행중에 느낀 파타고니아의 비경은 아마도 천국을 복제해 두었거나, 천국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은 정도였는데, 오늘 아침 우리 곁을 떠나 장도에 오른 세명의 단촐한 가족이, 그 천국에서 오붓한 시간을 함께 가지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투병중인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여보...병이 다 나으면 어떤 선물을 받고 싶어?..."
아내는 짧막하게 대답했다.
"음...여행이나 갔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장도에 오른 이들 가족을 꼭 포옹하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숙소 앞에서 저만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배푸는 가장 귀한 선물이 파타고니아 여행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족을 떠나 보낸 직후 아내는 연신 탄식하며 속상해 했다. 간밤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여행자를 만나고 이른 아침에 커피를 나누며 행운을 빌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기념으로 남겼는데, 그 모습은 암투병 중인 치과의사의 아내가 건강하게 돌아올 때 까지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지상 최고의 선물을 준 남편과 엄마의 소원에 따라나선 딸래미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만날 때 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