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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fondamento della Cheonan

천안함, 해군명예 살려줄 최원일 함장 증언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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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명예 살려줄 최원일 함장 증언 한마디
-누가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해군을 욕되게 하는가?-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보고있자니 마치 임진왜란 당시 조선시대를 보는 듯 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1592년(임진년, 선조 25) 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졌으므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니 대략 419년 정도의 시간차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419년 전이나 현재 서기 2011년이나 여전히 일본국과 관련된 전쟁과 다름없는 정치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개전 초기에 한성(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개전 1년여만에 창원 이남으로 패퇴하였으며 결국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조선 수군의 대 활약상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그 조선의 수군 속에 불멸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우리 국민들 중에 이순신의 활약 등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왜국으로 부터 조선을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광화문 앞을 지나칠 때면 남쪽을 향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라를 수호하고 있는 모습에서 왠지모를 용맹함과 든든함이 느껴지는 한편, 지갑을 열 때 마다 마주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모두 지키는 수호신과 다름없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의 명성은 동북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해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맹장이자 지략가였는데, 한산도대첩에서 사용했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鶴翼陣)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럴까. 국외에서 이순신 장군의 평가는 놀랍다. 잠시 살펴보자.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history of Japan>-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나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青柳南冥),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다시금 들여다 봐도 놀랍지 않는가. 그러나 천안함 침몰사건을 뒤돌아 보니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등장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난중일기 등 이순신 장군의 무용담을 보고 있노라면 419년 전의 일이 바로 곁에서 진행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다. 국외에서 남긴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이나 칭송만 봐도 조선의 수군 내지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들인 대한민국 해군은 저절로 영예로운 지위를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맹장 아래 약졸 없다는 등식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일이 하필이면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인 대한민국 해군에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누가 우리 해군을 천하의 약졸로 만든 것일까.


그 불행은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을 지키던 PCC-772 천안함으로 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천안함 침몰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지난해 3월 26일 오후 9시 00분경(침몰시간은 사실이 밝혀질 때 까지 여지로 남겨둔다.), 졸지에 승조원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패닉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생존자와 사망.실종자들은 거의 정확히 갑판부와 기관부를 둘로 나뉘게 했고, 기관부쪽 승조원 전부가 사망 또는 실종됐다. 천안함은 모두 세동강으로 쪼개졌다. 최원일 함장은 용케도 생존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함장 포함 생존자 다수의 증언은 석연치 않거나 증언을 통해 드러난 천안함 침몰원인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함장은 승조원 유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몰순간을 증언하고 있었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천안함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1초만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유가족들의 분노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모습이 방송카메라에 잡혔다. 천하의 무적함대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가 국민들로 부터 쫒겨다니는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는 왜 일어난 것일까. 먼저 최원일 함장의 증언을 들어보면 답이 나올 듯 하다. 그의 최초 증언은 오늘날 도청사건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이명박 정권을 곤혹 스럽게 만들고 있는 관제방송 KBS에 의해 이렇게 밝혀지고 있었다.

"쾅 하는 충돌음과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직각 90도로 기울었습니다. 이후 발전 통신 교신 모두 두절됐습니다...방에서 5분간 갇혀있다가 문을 깨고 올라가 보니, 이미 함정 반쪽은 없어진 상태였습니다...생존자를 탐색하고, 줄과 로프 등을 이용해서 끌어올리고, 이양을 했습니다...굉음이 외부 충격인지 내부 충격인지는 진상 규명이 필요합니다...혼자만 살아남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출처 http://news.kbs.co.kr/society/2010/03/27/2070707.html#//>

오늘날 KBS는 김인규 등 이명박정권에 의해 관제방송으로 추락되기 전 까지 공영방송으로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위 최원일 함장의 증언이 기록된 방송자료 속 앵커멘트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쾅' 하는 충돌음과 함께 배가 직각으로 기울어졌다. 최원일 천안함 함장의 말입니다." 최 함장이 언론을 통해 전한 천안함의 침몰원인은 어뢰에 의한 폭발이 아니었다. 뭔가 원인미상의 물체와 충돌한 것이며 그 소리는 함교 뒷쪽에서 난 소리라고 증언하고 있었다. 함교 뒷쪽이라 하니 언론들은 모두 프로펠러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방면에 전문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함교 뒷쪽이란 천안함 마스터를 중심으로 뒷쪽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방송에서는 생략되었던 내용이지만 한 인터넷매체에서는 "침몰 '천안함' 함장 "사고당시 화약냄새 없었다"는 등의 기사를 통해 "폭발음이 들린 뒤 1~2초만에 선미가 가라앉은 것 같다"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자 실종자 가족들은 격분해 "네가 함장 맞냐? 함장이라면 죽더라도 모두 구해왔어야 할 것 아니냐"며 언성을 높였다고 전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닷컴이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27/2010032700889.html>
조선닷컴은 최 함장의 증언을 곧바로 각색하여 쾅 하는 충돌음을 '폭발음'으로 바꿔 허위사실을 보도하고 있었다. 충돌음과 폭발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최 함장이 아닌데 조선닷컴은 최 함장의 진술을 이명박 정권에 맞춤식으로 각색하고 있었다. 또 이같은 현상은 중앙일보 편집인이라는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유사한 소설을 끄적이고 있었다.

"함장의 증언은 실감난다. 익명을 부탁한 예비역제독은 이렇게 분석한다. "함장이 느낀 '한방'의 정체는 어뢰나 기뢰다. 그가 의심한 '적'은 북한이다. 그런 판단은 상식이다. 그런 직감은 훈련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 판단, 직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함장의 증언은 위기대응의 출발점이다. 사건 원인을 예단말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맞다. 하지만 그런식의 청와대 주문은 너무 잦다. 군의 전문적 판단,경험,사기도 고려해야 한다.참모들의 대통령 보좌에도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 그 속에서 김태영 국방부장관의 소신과 침착함이 돋보인다...(중략)" <출처 http://blog.naver.com/poi2520/30084159834>

똑 같은 물이라도 뱀이 핥으면 독이되고 양이 마시면 젖이되는 것일까. 천안함 침몰원인을 전한 최 함장의 최초 증언은 충돌음이었지만 조중동을 거치는 순간 폭발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일보 편집인이라는 인간은 아예 북한을 일찌감치 천안함을 폭침시킨 당사자로 보고 있다. 조중동을 가리켜 반민족 찌라시라고 평가절하되는 이유가 이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이 앞장서 역사를 심히 왜곡하고 천안함의 진실을 감추는 한편, 반민족 비민주적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국민들의 알권리를 무참하게 짓밟고 있었던 것이다.

최 함장이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브리핑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가자 흥분한 실종자 가족들이 뒤를 따르며 욕설을 퍼붓는 등의 소란은 유가족 입장에서 이해해 줄만 하다. 하지만 최 함장의 최초 진술을 참조하면 그는 최소한 양심에 따라 증언에 임하고 있었다는 판단이 든다. 어쩌면 그는 생존 직후 군 당국 등으로 부터 '천안함이 좌초되었다는 사실과 잠수함과 충돌했다는 사실과 정황증거만 빼고 진술에 임하라'는 모종의 압력을 받고 거짓진술에 나섰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 좌초설 내지 잠수함 충돌설을 확인해 주진 못할 것이었지만, 그는 천안함의 침몰원인이 충돌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전달해 주고 있었던 셈이었다.


왜국으로 부터 조선을 구한 성웅 이순신 장군은 안타깝게도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게 된다.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역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왜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그 유명한 말씀을 남겼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 모습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매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한 바다를 가로막으매 그대 힘만 믿었더니 지난해에 패전한 것 원통한 말 어이할꼬. 그대 그냥 두었던들 그럴 리가 있었으랴. 대장을 잘못 바꿈, 이 나의 허물이라 누구더러 도와 달란 들 기운 짐 어이하리. 두 번 다시 부임하여 무너진 뒤를 이어 혼란을 수습하고 군졸을 불러 모았도다...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 -선조,<卒逝後賜祭文>-

다 아시는 일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은 간신배 원균 등과 불화로 선조 임금으로 부터 불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보여준 그의 전략과 죽음 때문에 선조 임금은 땅을 치고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탓하기에 이르렀다. 충무공 이순신은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찰라에도 자신의 죽음이 적이나 아군의 병사들에게 미칠 사기를 고려하여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41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상황은 그때와 많이도 달랐다. 충무공 이순신이 그토록 싫어했을 일본국 출신 대통령이 버젓이 청와대를 차지하고 앉아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했던 것일까. 꽤 길게 끄적인 포스트가 의도한 바가 잘 전달 되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정부와 군 당국 등은 천하의 무적함대 충무공의 후예들을 졸지에 약졸로 만들며 천안함의 진실을 은폐하는 노력에 전력하고 있었다. 이들은 친정부 합조단을 통해 천안함이 북한의 잠수정이 발사한 1번어뢰에 의해 폭침되었다는 가설을 세워두고, 이른바 이명박 정권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께 써 먹었던 짜맞추기식 침몰원인 규명으로 <천안함을 피격사건>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도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천안함은 북한에 의해 폭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과연 그런가.


천안함 침몰사건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자칫 반민족적 수꼴들에 의해 역사속으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지만 김태영 국방장관 등이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을 고소하는 동시에 기적처럼 부활하고 있었다. 지난 11일 4차 준비기일 공판에서 천안함의 침몰 당시를 증거해 줄  생존자들의 진술 전부가 증거로 채택됐다. 그리고 천안함이 쾅 하는 충돌음을 내고 배가 직각으로 기울었다고 진술했던 최원일 천안함 함장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이명박 정권이 레임덕에 허덕이며 법무장관을 비서로 삼고 대통령의 마누라 김윤옥의 동창을 검찰총장으로 삼으려고 할 때, 천안함의 침몰원인 규명 과정은 저승사자 처럼 이들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과응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아닌가. 애시당초 없던 사실을 짜맞추고 있었던 집단과 이명박 정권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 419년 전 임진왜란 당시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데, 당시 조정의 무능과 부패는 수군과 육군을 막론한 일선 지휘관들에게 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게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이랬다.

"조선은 정치와 경제면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연산군 집권 이후 명종 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 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의 사이의 계속된 당쟁으로 인해, 정치 기강은 해이해지고, 전제(田制)와 세제(稅制)의 문란 등 여러 곳곳에서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중앙에서의 당쟁은 곧 지방으로까지 번져 국내는 정치적 불안 속에 놓여 있었으며, 부당한 관리 임명에 따른 시정의 문란으로 조정을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떠났다. 더구나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노력과 관심은 찾아볼 수 없어 각 군영의 병기들은 녹슬고 있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조정이나 일부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시정과 방비에 관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 명령은 형식적으로만 행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출처 http://www.e-sunshin.com/e-sunshin/life/yimjin_01.jsp>


자료를 들여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이명박 정권과 닮아 있었던 게 조선의 조정 모습이다. 나라가 총체적 부실로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부당한 관리 임명에 따른 시정의 문란으로 조정을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떠났다는 표현은, 현대에 사는 우리가 시간여행을 통해 419년 전 임진년 속에 살고 있는 듯 거울을 보는 듯 하다. 요즘 한창 논란중인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인선을 둘러싼 잡음과 흡사하다. 또 당시 조선을 괴롭히고 있었던 왜넘들이나 오늘날 친일 반민족 세력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일제의 만행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은 아예 친일 반민족 세력이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 청와대에서 뻔뻔스럽게도 백주에 부정부패와 비리를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 처럼 천안함 침몰사건에 적극 가담한 김태영 전 국방장관 등 간신배들이 우글거리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지 못한다면, 장차 이 나라는 반민족적 수꼴들에게 영원히 자리를 내 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할 운명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조선국에 성웅 이순신을 통해 조선을 구한 것 처럼, 대한민국에도 그와 유사한 정도 이상의 기회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게 천안함 침몰사건 재판이며, 공교롭게도 이 재판의 핵심에 해군장교 출신의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명박 정권이 깔아뭉게다시피한 충무공 후예들의 명예를 되찾아 줄 것은 물론, 천안함의 진실을 통해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가 충무공 이순신과 해군을 욕되게 하는가.
 
그 역사적 공판이 째깍째깍 초침을 돌리며 하루 하루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 맹장 아래 약졸은 없다고 한 역사의 일침이 충무공 후예 최원일 함장의 입에서 증언될 수 있기를 학수고대 한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투에 임하기 전에 말씀 하셨다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기를 꾀하며 싸우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오늘 처럼 가슴에 와 닿은 적도 흔치않다. 민주세력들이 불협화음을 내지 말고 전심전력으로 천안함의 진실을 밝히는데 힘을 쏟아야 하는 한편, 내년 총선과 대선 까지 줄기차게 마음속에 다짐해야 할 사자성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이다. 나라와 민족을 반민족 비민주적 친일패거리들로 부터 지켜내고 살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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