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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박완서 선생 빈소 생각보다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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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 빈소 생각보다 화려했다
-故박완서 선생 빈소를 다녀오면서-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박완서 선생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중-



"문인들은 돈이 없다"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박완서 선생 유지-


"저에게는 1988년 당시 26세였던 아들을 잃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1년 정도 붓을 꺾었으니까요.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문학입니다."

-2009 가을 조인스 인터뷰 중-


주말(22일) 오후 우리 문단의 거목이자 '나목'이었던 故박완서 선생의 빈소를 다녀왔다. 선생의 타계 소식을 미디어에서 접하며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선생의 눈에 비친 우리 문단의 문인들 모습이었다. "문인들은 돈이 없다"며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하신 말이다.


알려진대로 선생은 그동안 담낭암과 싸우다 주말 아침 새벽 6시 17분께 타계 했다. 선생은 마지막 수필집 <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를 통해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던 것일까. 선생의 흔적을 찾아 두 해 전 가을날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니 그곳에는 당신의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문학의 힘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였다.


"저에게는 1988년 당시 26세였던 아들을 잃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입니다.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1년 정도 붓을 꺾었으니까요.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문학입니다."


그러고 보니 빈소에 마련된 영정 곁에는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사위며 딸들이었다. 선생의 삶 속에는 아버지를 3살 때 일찍 여읜것과 남편을 먼저 보낸 것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8년 아들 마저 먼저 보낸 참 고독하고 외로운 삶의 여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독 가족과 여성의 삶의 모습에 집착하신 당신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 모습 전부를 빈소에서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에게 남은 건 네 딸과 문학이 전부였던 것일까.


당신께서는 평소 유지를 통해 "문인들은 돈이 없다"며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따라서 빈소에는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안내문을 걸어 두었다. 네 딸들과 사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키운 피붙이였고 딸들에게는 당신이 살아왔던 아픈 삶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지않았던 모습으로 잘도 커 주었다. 내가 본 빈소 풍경 중에 가장 바람직한 풍경이 또한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내가 본 선생의 빈소 모습은 문인들이 빈소를 찾아왔을 때 어딘지 모를 위압감을 느낄만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선생의 유지에 따라 비록 부의금은 거절하며 접대만 하려는 모습이었지만, 빈소 앞에 마련된 방명록 뒷편으로 매달린 리본들을 보니 문인들이 기가죽을만 했다. 우리 문단의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면 이름도 잘 기억할 수 없는 수 많은 문인들은,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채 일반인들로 부터 잊혀지고 있는 마당에, 당신이 그토록 당부한 유지와 다른 모습이 빈소에 펼쳐지고 있었다.


밀려드는 수 많은 조화들은 리본만 남긴 채 돌려보내지고 있었는데, 빈소 입구에는 리본 이름만 살펴봐도 그들이 누구며 이 땅에서 어떤 권력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 빈소를 수놓고 있었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길에 권력자의 모습을 누리고자 했을까. 선생의 문학 속에 등장한 삶은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선생의 빈소는 생각보다 화려했다.  


선생은 우리들 곁을 먼저 떠나신 故박경리 선생 처럼 고독과 외로움 때문에 글을 썼을 테고, 당시 무명화가 박수근의 삶을 보면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궁핍할 수 밖에 없었던 예술혼들에 대해 늘 고민한 결과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라며 회상할 수 있었지 않겠나.


어쩌면 선생은 나목을 탄생시킨 배경의 박수근과 시대적 삶의 흔적을 통해 등단한 이후, 당신이 느꼈던 불행감을 문인 등 후학들에게는 터럭 끝 만큼도 전해주고 싶지않았을 것이다. 화가나 글쟁이는 모름지기 자신의 혼을 불어넣는 작품이어야 하며 그 외롭고 고독한 작업들은 돈벌이와 멀어져 있었고, 가난할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 체득했을 터 였다.


네 딸들이나 사위들은 선생의 유지를 몰랐을까. 빈소 앞에는 최고 권력자로 부터 최고 재벌가와 정치인들의 조화만 살아(?)남았고, 대부분의 조화는 끗발(?) 등에 따라 리본만 남은 채 도배되어 가고 있었다. 방명록 앞에 세워둔 안내문의 '부의금은 정중히 사절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무색해 보였다.


이 땅에는 많은 문인들이 있고 그 중에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글을 통해 우리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따뜻하게 보듬고 간 진짜 글쟁이의 빈소는 권력이나 재벌에 둘러쌓인 듯,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내가 괜히 부끄럽고 미안했다. 정말 당신이 느꼈던 불행감이 어떠했는지를 느꼈다고나 할까. 빈소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 돌아서는 길에 대를 이어 불행을 가슴에 안고 살았던 선생의 눈물이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당신의 불행을 승화시켜 한땀 한땀 눈물로 수 놓았을 작품들이 베스트 셀러가 아니었던가. 아버지와 지아비와 아들 까지 가슴에 묻고 살았던 한 여성의 삶은 '아들을 잃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을 끝으로 우리들 곁을 저만치 떠나고 있었다.


빈소를 돌아서는데 식당 입구 맨 낮은 자리에 눈에 익은 리본을 단 조화가 버려진듯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생이 문인들에게 대접하고자 했던 음식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께서 한번도 가 보시지 않은 길을 떠나실 때 당신의 영정 앞을 지키고 있는 권력과 재벌의 조화를 보셨다면 어떤 기분이 드셨을까. 차라리 그 자리에 당신이 그토록 사랑한 가족과 이웃들의 이름들만 올려진 모습을 보고싶지는 않았을까. 실타래 얽키듯 마구 뒤엉키고 얼룩진 근현대사를 맑고 고운 수채화 처럼 그려간 선생의 작품 속에 이런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면, 사람들은 결코 이 시대 최고의 작가가 떠나는 길에 꽃을 놓아드릴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또 큰 별들이 하나 둘씩 우리들 곁을 떠나는 저문 밤에 괜히 문학도 덩달아 죽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빈 자리를 기계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 마케팅이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선생이시여... 당신의 유지처럼 문인들은 돈이 없어야 (?) 맑고 영롱한 글로
세상을 따뜻하게 할것이라 일러준 말씀 한마디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부디 하늘나라에 가시면 그토록 보고 싶었을 아버지와 지아비와 아들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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