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조봉암과 노무현의 유언 차이점?


Daum 블로거뉴스
 


조봉암과 노무현의 유언 차이점?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다.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겠는가. 

화장해달라...
마을 주변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라.


돈 문제에 대해서는 깨끗하다 나름대로 국정을 위해 열정을 다했는데 국정이 잘못됐다 비판받아 정말 괴로웠다. 아들딸 지지자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퇴임후 농촌마을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되지 않아 참으로 유감이다. 돈 문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깨끗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먼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당신께서 이런 유서를 작성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대로 느껴진다. 포스트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소식이 알려진 직후 서울에서 김해로 한걸음에 달려가 촬영한 모습이다. 봉하마을에는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었다. 노 대통령의 주검이 양산에서 봉하마을로 막 운구되었을 때다. 서거 당일 아침 불길한 뉴스에 귀를 기울이다가 혹시나 하던 생각이 맞아 떨어지면서 패닉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서울에서 김해로 달려가는 동안 라디오를 통해 노 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으며 안타까워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던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듯 하다.

조봉암과 노무현의 유언 차이점?

그동안 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대한민국은 아예 정부가 실종된 나라나 다름없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3년 동안 예산을 날치기 하며 이 땅에 풀뿌리 민주주의 씨를 말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명박 정권이 집권 4년차에 접어들면서 레임덕에 시달리는 동안 눈에 띄는 보도가 있었다.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대법원 판결내용이었다. 이미 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죽산 조봉암 선생은 1898년 인천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YMCA 중학부에 수학하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첫 옥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분이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 노선에 근거해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1920년대 조선공산당 중국공산당에 참여했고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7년간 복역했다. 아마도 요즘 이명박정권에서 보면 죽산 선생의 이런 이력이 즉각 '좌빨'로 몰아세울지도 모를 정도의 이력이다. 최소한 몇개의 키워드가 매우 빨간색 처럼 보인다. 죽산 선생에 대해 좀 더 살펴볼까.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형에 이른 내용을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1946년 박헌영 계열과 노선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며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미군정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며 협력했다.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초대 농림부장관을 거쳐 국회부의장 자리까지 올랐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맞서 80여만표와 200여만표를 얻는 등 대중적인 지지를 넓혀가다 1956년 11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민의원 총선을 앞둔 1958년 1월 진보당 간부들과 함께 국가변란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체포됐고, 그해 2∼3월 육군 특무대에서 조사를 받은 뒤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육군첩보부대(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 공작요원의 진술 등을 토대로 간첩 혐의까지 추가됐다. 조봉암 선생은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2심과 3심에서 각각 사형을 선고받았고, 재심 청구가 기각되면서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죽산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을 보면 이승만 친미 장로정권의 음모와 술수가 눈에 띈다. 이승만은 결국 3.15부정 선거 등 장기집권 음모를 꽤하다가 하와이로 쫒겨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과정을 노무현 참여정부가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조봉암 선생 사건을 '위협적인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 구제 및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따라 조봉암 선생의 유족이 2008년 8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작년 10월 받아들여졌고, 재심에서 무죄 선고로 확정되며 사형 집행 반세기 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재판부는 "당시 조봉암 선생은 군인.군속이 아닌 일반인이므로 국군정보기관인 육군 특무부대에서 수사할 권한이 없었다"며 "특무대 소속 중령 등이 선생을 수사한 것은 헌병과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에 관한 법률 위반, 형법상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 등에 해당한다"고 밝혔다.죽산 조봉암 선생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기 전 유언을 남기셨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정치를 하면 늘 패자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죽산 선생이 간첩 누명을 벗은 소식을 듣자마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떠 올렸다. 참 많이도 닮아 있었다. 우선 죽산 선생과 노 전대통령이 죽음에 이른 상황이 공교롭게도 친미정권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며 두 대통령은 장로라는 직을 가진 점 까지도 동일했다. 그 뿐 아니다. 친미정권이 그러하듯 두 대통령은 동족인 북한을 좌빨 이상 대우한 적이 없다. 또 노 전 대통령이나 민주당 등이 언론이나 검찰 등 이명박정권으로 부터 무시로 듣게 된 좌빨 등의 표현 조차 이승만 정권이 내세운 공작요원의 진술 등과 너무도 닮아있어 흠칫 놀라고 있는 것이다. 

형식은 다르지만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이명박 장로정권의 정치검찰 등으로 부터 받는 수모를 보면 죽산 선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나. 정치를 하면 이승만 친미 장로정권 처럼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이며 인권유린과 정치탄압 등을 통해 정적을 죽여야만 직성이 풀리며 후한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죽산 선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승만 장로정권 처럼,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정치인과 집단 등 치명적으로 작용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다가 패하면 죽음을 당하는 사회에서 부활한 죽산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나 
노 전대통령의 유언을 참조해 보니 정치보복이 부른 대가는 너무도 커 보인다.
이명박 정권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명언이 두 분의 유언이다.


내가 꿈꾸는 그곳의 PhotОтправить сообщение для Марта с помощью ICQ 이야기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SensitiveMedia 세상에서제일 작고강력하며너무 따뜻~한 Media 내가 꿈꾸는 그곳    
 www.tsori.net / Boramirang 내가 꿈꾸는 그곳.

Daum 검색창에 내가 꿈꾸는 그곳을 검색해 보세요. '꿈과 희망'이 쏟아집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