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포항 '짱구바위' 어디서 굴러왔나?
오랜 세월 풍파에 맞선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곳은 강화도 후포항 갯벌이다. 갯벌에 섬 처럼 박혀있는 이런 모습은 보기드문 모습인데 먼 발치에서 이 바위를 봤을 땐 꼭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고도孤島 처럼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포항 한켠에 덩그러니 그 모습을 드러낸 이 바위는 괜한 호기심을 자아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의 찾지않는, 아니 찾을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이는 그 바위로 가 보기로 했다. 후포항을 둘러싸고 있는 방파제에서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바위를 향해 가려면, 꽤 넓은 갯벌을 지나쳐야 했고 갯벌에서 유기물을 잡아먹고 사는 '칠게' 무리들을 귀찮게 해야 했다. 그리고 호기심을 자극한 이 바위 까지 도착하자 바위는 좀 우스광스러운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에니메이션 '짱구' 머리를 닮아 있었다. 지난 여름에 본 모습이었다. |
후포항 '짱구바위' 어디서 굴러왔나?
꽤 많은 분량의 사진과 영상을 담은 후포항과 갯벌 모습이 담겨있는 이 포스트는,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포항 방파제에서 '짱구바위'를 돌아 다시 처음 위치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촬영한 그림과 영상을 담았다. 짱구바위가 주제가 되었지만 실상은 짱구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갯벌과 후포항 주변의 평범한 풍경이 시각에 따라 변모되는 모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세상사는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고 어떻게 관조하느냐에 따라 사물의 위치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일까? 폭염이 계속되던 지난 여름 강화군 화도면 내리에 위치한 후포항에는 땡볕과 함께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다. 후포항 근처에서 수채화 스케치를 하던 중 잠시 들른 이곳은 방파제가 빤히 보이는 '소루지' 앞에서 본 후포항 풍경인데 풀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후포항이 잘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연출되었다.
그곳에서 쪼그리고 않았다가 일어서면 후포항 곁의 갯벌이 짱구바위와 함께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는 곳이었다.
강화도 후포항은 병어로 유명한 곳이고 또 강화 여인의 억척스러움이 깃들어 '뻔뻔이'라는 이름을 남길 정도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정작 짱구바위의 존재는 이곳 사람들이나 관광객들 눈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화도면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이 바위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었다. 이를 테면 바위의 형상을 따라 촛대바위나 형제바위 등으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놓을만 한데 이 바위는 무명의 설움을 이겨내며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 처럼 후포항 한켠에서 우두커니 갯벌을 지키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짱구바위란, 사상최초(?)로 그곳을 탐사(?)한 내가 붙여놓은 이름이었다. ^^
짱구바위는 그렇게 어느날 낮선 이방인으로 부터 이름을 하사 받으며 인터넷에 등재되고 있었다.^^* 위 <다음스카이뷰>에서 확인되는 것 처럼 짱구바위의 존재는 파도에 떠 밀려온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바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짱구바위를 통해서 본 후포항의 내력을 보면 에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짱구만큼 뻔뻔스럽고 엉뚱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잠시 언급한 '뻔뻔이'라는 말이 이곳엣 유래될 정도였으니, 짱구바위도 뻔뻔스럽게 갯벌 한가운데서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일까?
뻔뻔이라는 말은 강화도 여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강화도 사람들에게 이런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는데 강화도에 살아왔던 여인네들의 억척스러움이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은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 과거사 속에서 강화도 남정네들은 도도한 자존심이 철철 흘렀다. 물론 강화도 뿐만 아니라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우리네 여성들의 삶은 남성에 비해 꽤나 고달팟지만 강화도는 유독 심했다.
강화는 고려가 몽고에 맞서 항쟁할 당시 39년 동안 수도였다. 그래서 나라는 물론 왕족을 지켜낸 선비의 자손이라는 우월감을 목숨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들이 강화 남자들이었다. 참 속쓰린 역사이긴 해도 강화도는 <강화도령>을 탄생시킨 역사의 땅이기도 했는데 강화 남자들의 자존심은 결국 강화 아낙들을 피곤한 삶으로 내 몰았다.
그녀들의 6.25전쟁 이후 참으로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에 화문석을 짜며 버텼다. 강화도 하면 특산물이 화문석이었는데 강화의 여인들은 베와 무명, 비단 등 옷감을 짜는 직조 솜씨 하나 만큼은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 일은 대부분 여자들 몫이었고 도도하기로 유명한 남자들은 그나마 공들여 짠 물건들을 장에 내다팔면 오죽 좋았으련만 그 마저도 회피하여 생산에서 판매 까지 모두 여자들의 몫이었다.
아마도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왠만한 여성들은 모두 보따리를 싸고 친정으로 돌아가던지 이혼도장을 꽝 찍었을 법 하건만 강화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살아남고자 했으면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허기에 찬 자식들을 매몰차게 떠밀어 버린 뒤 옷감을 이고 길을 재촉했겠나. 그녀들은 그렇게 강화에서 가까운 서울과 김포,인천 등지로 먼 길을 마다않고 나서며 잘살고 있는 집을 찾아 옷감을 파는 방물장수로 나서기도 했다.
강화 여인들의 삶은 그렇게 억척스러웠는데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녀들은 곧잘 너스레를 떨며 물건을 '에누리' 없이 물건을 팔고도 숙식까지 물건을 산 집에서 해결했다. 타지에서 기왕에 먹여주고 잠자리 까지 제공해 주었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밥을 할 때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밭 맬 때 풀도 좀 뽑아 줄일이지만, 강화 여인들은 꼼짝 않고 죽은 듯이 잠만 자다가 날이 새면 보따리를 챙겨 바람처럼 냉큼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타지 사람들은 이를 보고 뻔뻔스럽다며 '뻔뻔이'라고 빈정거렸던 것이다.
그런 질곡의 삶을 살아온 강화 여성들의 이야기는 후포항에서 더욱더 힘들게 이어지고 있었다. 후포항의 내력을 전하고 있는 소식에 따르면 후포항은 예전에 '노루매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었고, 한국전쟁 중이었던1951년 1.4후퇴 때 강화에서 엎어지면 코에 닿을 듯 가까운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 우연찮게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루매기 중턱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렇게 피난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 살면서 피난민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기도 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전혀 못된 황량한 바닷가에서 그들은 동력이 없는 조각배 서너척에 몸을 의지하고,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나가 오늘날의 후포항의 모습을 이루어 낸 것이다.
본래 강화도에 살던 <강화도령>의 모습과 너무다른 모습이며, 한국전쟁의 등살에 떠밀려 그야말로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듯이 그들은 마침내 이곳 후포항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후포항의 갯벌에 박혀있는 엉뚱하고 뻔뻔스러운 이름의 짱구바위는 그렇게 이방인의 가슴에 다가오고 있었다.
억척스럽고 고단한 삶이 후포항 갯마을에 잔뜩 베어 있었던지 겉으로 보기엔 꽤 단단해 보이던 갯벌은 발목과 정강이 까지 들쑥 날쑥하며 걸음을 떼기 만만치 않았다.
갯벌에 살고 있는 자그만한 칠게들은 이방인이 나타나자 마자 저 만치서 작은 갯벌 동굴 속으로 냉큼 사라지며 콧배기도 내밀지 않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포항의 갯벌에는 작은 골짜기가 생기고 그곳에는 칠게들이 부지런히 파 낸 뻘이 피난민들이 노루매기 중턱에 만든 움막 처럼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런 모습이다. 칠게들이 썰물 때 작업해 둔 모습을 보니 이들의 삶도 녹록지 않아 보였다.
녀석들은 밀물 때 메꾸어 버린 수해(?)를 이렇게 복구하고 있었다. 그 작은 몸둥이로 이 정도의 뻘을 파 내고 있었으니 강화 여인들의 모습을 단박에 연상 시키고 있다.
가까이서 들여다 본 칠게 구멍이다. 녀석들은 이 구멍으로 흘러들어온 유기물을 먹고 살며 갯벌을 건강하게 만들고 있는 고마운 녀석들이다. 어쩌면 후포항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피난민들이 고된 삶이 오늘날 후포항을 만들었던 것 처럼, 녀석들의 수고 덕분에 갯벌과 강화도가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이방인을 즐겁게 해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갯벌을 따라 바닷가로 다가가자 발가락 사이로 스물거리며 삐져드는 갯벌의 감촉이 참 좋다.
방파제에서 본 짱구바위는 손에 잡힐듯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갯벌에 들어서니 꽤 멀게 느껴졌다. 또 갯벌에 들어서서 짱구바위와 함께 후포항의 모습을 보니 후포항 너머 선수선착장 가는 길의 언덕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과 또 다른 풍경이 연출 됐다. 갯벌 한가운데서 보면 짱구바위는 늘 후포항의 모습을 바라보며 뭍을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이자 후포항을 지켜낸 뻔뻔이 같은 모습 같기도 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본 후포항 갯벌은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옛 강화도 사람들이 오늘날의 강화인들과 다른 모습처럼
갯벌은 그저 평범한 바닷가의 풍경이 아니라 정감이 흐르고 있는 이곳 사람들의 인심을 닮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약삭빠른 상술 때문에 그 지역 조차 정이 떨어질 정도인 반면에 강화는 비록 우리 선조들의 아픔이 서린 땅이기도 했지만, 자존심 강한 강화도령이 이 땅을 지켜낸 곳이며 아무 때나 들러도 우리네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고향같은 곳이기도 했다.
마침내 짱구 바위가 눈 앞에 다가왔다.
뻔뻔 스럽고 우직해 보이는 짱구바위는 오랜 세월 파도와 풍상에 쩔어있는 모습으로 내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짱구바위는 마치 누워있는 지아비 곁에서 에미가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듯한 형상이었다. 어쩜 이 바위들이 강화 여인네들의 고단한 삶과 이토록 닮아있었던지 에니메이션 짱구와 너무도 다른 숭고하고 거룩해 보이기 까지한 바위군이었다. 강화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울며 매달리는 허기에 찬 자식들을 매몰차게 떠밀어 버린 뒤 옷감을 이고 길을 재촉할 때 얼마나 가슴이 쓰리고 아팟을까?... |
후포항에서 자리를 잡은 피난민 뿐만 아니라 교동도나 강화 곳곳에는 칠게들의 삶 만큼이나 고단했던 흔적이 널려있는 곳이다.
갯벌을 따라 바닷가에 서서 외포리로 가는 양도면 산자락을 보니 이들의 고단했던 삶을 품어주기라도 한듯 정겨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후포항 갯마을 사람들이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들락거렸을 이 바닷가에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준 그물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후포항 갯벌 위로 내려쬐는 볕이 몹씨도 따가웠다.
그러나 폭염속이라지만 아주 잠시 1시간 남짓 갯벌을 돌아보는 동안의 수고는 그저 엄살일 뿐이었을까?
짱구바위에 다가서자 갯벌은 더욱 물러서 발을 옮기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이 바위 이름을 짱구바위라 했던 것 처럼 짱구 모습을 닮은 이 바위를 보는 순간 절로 미소를 만들기도 했다.(퓹!...^^*)
에미메이션 속의 짱구머리는 머리숱이 꽤나 많았는데 오래전 용암이 바닷물에 급히 냉각되면서 화강암 덩어리로 변한 후포항 짱구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짱구바위 아래 부분을 살펴보니 둥그런 모습으로 정말 굴러들어온 돌 모습 같다. 화강암의 생성과정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화강암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데, 화강암은 맑은 지하수의 수원이 되기 때문에 주변에 도시가 많이 발달한다고 하며 서울, 부산 동래, 대구, 전주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금수강산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셈이며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우는 마니산도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니산에서 멀지않는 곳에 위치한 후포항 갯벌의 짱구바위는 그때 이곳으로 떨어져 나온 것일까?
어쩌면 너무도 평범한 커다란 바위 하나 때문에 갯벌을 질퍽거리며 돌아다닌 흔적이 오히려 우스광스럽기도 하다. ^^
그러나 후포항 갯마을에서 느낀 짱구의 모습은 이방인에게 즐거움을 선물해 주고도 남았다. 정말 짱구가 퍼뜩 떠 올랐으니 말이다.ㅋ
정말 묘하게 생긴 바위 덩어리다.
멀리 외포리 선착장과 석모도를 바라보고 있는 짱구네 일가들...^^
그 일가들이 낮선 땅에서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후포항 갯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람에 날려 귓전을 두드리는듯 하다.
멀리 방파제에서 갯벌을 따라 바닷가 까지 당도하여 본 짱구바위의 모습은 방파제에서 본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모습을 영상과 그림으로 담으며 돌아섰다.
맨 처음 짱구바위는 그냥 지나칠 정도로 존재감 조차 없었지만 후포항 갯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에 오랜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그저 어느 곳으로 훌쩍 떠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여행길에서 만난 돌덩어리 하나만으로도,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며 나의 좌표를 확인하며 되돌아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세상사는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고 어떻게 관조하느냐에 따라 사물의 위치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인지, 후포항 갯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었던 갯벌에는 칠게들이 만들어 둔 삶의 흔적들이 갯벌 곳곳에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멀리 방파제에서 볼 수 없었던 기막힌 삶의 현장이었다. 후포항 갯벌에 굴러들어 온 듯한 짱구바위는, 사람들로 부터 쓸모 때문에 외면을 받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코 고도가 아니었다. 그들 곁에는 칠게가 널려있었고 부지런한 그들의 손놀림으로 갯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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