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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실패한 세계 최초의 '드르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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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세계 최초의 '드르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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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풍경이 펼쳐진 이곳은  맑은 바닷물이 하루에 두번씩 들락 거리는 '드르니 운하' 풍경이다. 드르니 운하는 우리나라에 있는 운하며 오늘날 안면도를 섬으로 만든 역사적 사실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안면도는 처음부터 섬이 아니라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말이며  세계 최초의 운하가 우리나라에서 건설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계의 내륙에 건설된 운하나 바다와 인접한 곳에 만들어 둔 운하는 운하로 흐르는 물의 흐름이 정체되어 수질이 혼탁하지만 드르니 운하는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늘 맑은 바닷물이 흐르며 서해바다와 천수만을 잇는 친환경 운하였다. 이 운하는 조공선들이 거센 바람에 좌초가 잦아지자 서해의 암초를 피해 안전한 뱃길을 만들고자 건설된 것이나, 535년에 걸쳐 10여 차례나 실시한 운하공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굴착기가 없었던 당시 암반과 왜침(임진왜란) 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공사는 고려 제17대 인종 12년(1134)에 드디어 첫 번째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뱃길을 단축하기 위해 1669년에 만든 수에즈 운하나 1914년에 만든 파나마 운하 보다 약 500년이나 앞서 우리 선조들이 운하공사를 시작했고, 그 흔적이 드르니 포구로 부터 천수만에 이르는 운하와 함께 충남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와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 사이에 굴포운하의 흔적과 함께, 오늘날 '안면도'를 만들고 세월 속에 묻히며 우리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안면도의 운명을 바꾼 드르니 운하는 천수만의 숨통을 터 준 귀한 운하로 작용하고 있고 규모면에서는 파나마 운하나 수에즈 운하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 최초의 운하가 아닌가 한다. 안면대교에서 드르니 운하(굴포 운하)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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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Daum 지도' 켑쳐 그림속의 점선은 서해쪽 드르니 포구에서 천수만으로 이어지는 '드르니 운하'의 모습이며  '안면대교'를 너머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77번 국도를 따라 '안면도'가 이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운하의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드르니 운하는 인위적인 손길이 간 흔적이 역력하게 운하의 폭이 일정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점선을 따라 천수만으로 이동하면 (포스트 맨 아래 그림 참조)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로 이어지고 있고, 그곳에는 저수지가 만들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드르니 운하를 통과한 '조운선 [漕運船]'이 세곡을 다시 저수지로 운송한 후 육로를 이용하여 오늘날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까지 운반한 후 다시 조운선에 실어 개경이나 한양으로 실어 나른 '조운로'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매우 힘들고 효용성이 뒤떨어지면서 곧 폐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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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을 다녀 오신분들은 잘 아시는 일이지만 바람이 보통 거세게 부는 정도가 아닙니다. 제주도에만 바람이 많은게 아니라 서해안 대부분이 바람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 그 바람은 안면도 사구를 만드는 역사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심청전에서 황해도 인당수의 산재물이 될 정도였겠습니까? 그런 곳은 비단 황해도 뿐만 아니라 서해 전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유독 황해도의 인당수와 더불어 태안 앞바다 안흥량에는 바람이 심해 뱃사람이 풍랑을 만나 여에 걸려 좌초하기 일쑤였습니다.

실패한 세계 최초의 '드르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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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은 당시 우리나라의 왕실에서는 큰 근심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세금과 같은 세곡(稅穀: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는 곡물)이 풍랑을 만나 바다에 수장되는 안타까운 일이 거듭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림들은 드르니 포구 앞 백사장 포구에서 바라 본 드르니 운하(굴포 운하) 서해쪽 모습입니다. 멀리 (구)안면대교가 보이는군요. 그곳으로 이동하여 세계 최초 '드르니 운하'를 만나 보겠습니다. 함께 가 보실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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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안면도를 다녀오신 분들은 이 다리가 낮설지 않을 겁니다. 안면대교를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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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대교를 건너자 마자 천수만 등지에서 잡히는 조개껍질만 가득 쌓여 있습니다. 이 조개껍질은 안면대교 건너자마자(태안쪽에서) 바로 좌측에 있는 '안면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이름도 특이한 '뒤웅조개' 껍질 입니다. 아이들 주먹만한 큼지막한 뒤웅조개는 칼국수와 함께 푸짐하게 끓여져 나오는데 안면도에 가시는 분들은 한번씩 들르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뒤웅 조개는 '뒤웅박' 처럼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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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니 운하가 뚫리면서 천수만은 긴 호흡을 쉬다가 하루에 두차례씩 들락날락하는 밀물과 썰물로 인해 건강한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문에 천수만의 어패류들이 건강해 지지 않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뒤웅조개는 그래서 그런지 빨리 자라고 큼지막하게 자라서 안면도를 찾는 분들에게 바지락 칼국수 이상의 별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 드르니 운하를 통해 운반되어온 조개들과 낚지 등 해산물이 안면도를 넉넉하게 만들며 이곳을 찾는 분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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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대교 곁에서 바라 본 드르니 운하의 모습입니다. 오른쪽에 위치한 나지막한 가옥들을 제외하면 운하는 대부분 석축으로 쌓여 운하를 구분짓는 경계석 같아 보입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진풍경입니다. 이 뱃길을 따라 노를 젖거나 돛을 이용하여 옛사람들은 세곡을 실어 나르는 조운로로 이용했던 것이죠. 바닷길이 얼마나 힘들고 사고가 많았으면 당시 사장으로 봤을 때 이렇듯 큰 토목공사를 시작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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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산시와 태안군 사이에 위치한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에는 이상하게 패인 골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흐르는 하천은 묘하게도 곡선이 아닌 직선이어서 평범한 하천과 대조적이므로 운하를 판 흔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소문이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 까지만 해도 운하에 대한 기록등이 부실햇던 까닭이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정밀하게 측정을 해 본 결과 거대한 인공 수로(운하)였음이 밝혀졌던 것입니다. 굴포 운하였습니다.
 
(**드르니 운하라는 명칭은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굴포'와 햇갈릴 수 있는 이름이고, 역사적으로 굴포 운하라는 말 보다 드르니 운하라는 명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아 제가 이름 붙여본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굴포 운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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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쪽에서 바라본 안면대교 상판 모습입니다. 안면교에 이어 새로만든 안면대교 모습입니다.

굴포 운하는 굴포 운하는 고려 인종 때 시작하여 조선 현종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년간 11차례나 시도된 국가적 대공사였는데, 이 토목공사를 하게된 목적은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곡을 나르는 조운로로 이용하기 위함이었고 안흥량의 파도가 너무 거세고 좌초가 거듭되어 힘들게 지은 세곡미가 수장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고려시대)에는 대략 한해 40만 석의 세곡미가 나라 재정의 기본이었고, 수도인 개경으로 보내지는 전체 세곡미 40만 석 중 약 30만 석이 충청도와 전라도 및 경상도 등 삼남에서 서해안 뱃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으므로 풍랑을 만나 조운선이 좌초라도 하는 날이면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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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대교에서 바라 본 운하 곁의 가옥이 너무도 평온해 보이더군요. 마치 별장같다는 생각이...

주로 아랫 지방에서 개경으로 향하던 배들은 서해를 거슬러 올라갈 때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목을 통과하는 일이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요즘 처럼 동력선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나 노를 젖거나 전적으로 돛에 의존하던 당시의 배들이 거센 바람에 떠밀려 암초에 부딪치는 장면은 쉽게 연상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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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흥량 관장목은 황해도 장산곶의 인당수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뱃길이 험했던 곳이었죠. 따라서 뱃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항로를 죽음의 항로로 여겼을 것이며 실제로 열심히 농사지은 세곡미 다수가 안흥량 등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나라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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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대교 위에 서면 굴포 운하로 다니던 옛 뱃사람들이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험한 항로를 피해 돌아가자는 안을 실행에 옮기게 된 게 굴포 운하를 파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며, 충남 서산시 남쪽에 위치한 천수만과 서산시 북쪽에 위치한 가로림만 사이를 가로막은 좁은 땅을 파서 운하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때가 고려 제17대 인종 12년(1134)이었고 마침내 첫 번째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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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사를 시작한 직후 잘 진행되던 운하 공사는 다시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6.8㎞ 가운데 태안읍 인평리↔도내리 사이 2.8㎞ 구간에 암반이 형성되어 운하공사는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육지에서 만난 암초였던 것이죠. 고려 조정이 내시 정습명을 보내 군정(軍丁) 수천 명을 동원하여 4km 정도의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든 후 맞이한 복병이었습니다. 제가 서 있는 안면대교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최초에 공사에 성공한 굴포운하의 모습이지만 천수만에서 가로림만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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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대교에서 바라 본 안면교(구안면대교) 모습입니다. 운하의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더군요.

그리고 그 후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에 당시 실권자였던 이성계가 세곡 조운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 왕실 인물이었던 왕강으로 하여금 다시 공사를 시행하도록 했지만 암반을 제거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요즘 처럼 화약이 발달했더라면 다이너마이트로 발파를하여 손 쉽게 운하를 개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굴포운하 때문에 안면도만 섬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오늘날 태안 전체가 섬으로 바뀌는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운하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부터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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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대교 아래로 내려가 운하를 살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6번 째로 큰 안면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드르니 포구를 거쳐 개경으로 뱃길을 만들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고려 말의 충정왕 때부터 공양왕 때까지 약 40년 동안 나라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져 옵니다. 조운로 공사 실패와 세곡 조운선들의 거듭되는 난파와 업친데 덮친격으로 왜구들의 조운선 약탈 등이 겹쳐 조정의 관리들에게 녹봉조차 줄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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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세곡에 의해 유지되던 나라가 계속되는 세곡미 운송 부진으로 왕도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을 정도로 먹을 곡식이 없을 정도였으니 굴포운하의 중요성은 매우 중요한 토목공사였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결국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드르니 포구를 통과한 조운선들이 굴포운하를 통과하여 천수만과 가로림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면 나중에 조선이라는 국호가 불필요 했을지도 모를 역사적인 분수령이 굴포운하로 인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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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고민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 의해 다시 시도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다시 세곡 조운로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최유경과 남윤을 파견하여 태안 굴포 운하공사의 가능성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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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교와 안면대교 사이에서 바라본 안면대교 모습입니다.

태종 3년(1403)에는 세곡 조운선 34척이 난파를 당하여 아까운 세곡미와 인명의 손실을 입었고, 태종 14년(1414)에는 66척이 태안 앞바다 안흥량에서 난파를 당해 많은 세곡은 물론이고 300여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기도 했으므로 태안 굴포 운하 공사는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었으며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세곡을 그렇게 어이없이 바다에 수장해버리면 백성들에게 더 많은 부담이 돌아가므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 지는 것은 물론 민심이 매우 흉악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굴포 운하 공사는 백성 모두가 마음속 깊이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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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실패를 거듭하며 공사를 재개 하기로 했습니다. 달리 뾰족한 대안이 없었던 것이죠. 제3대 태종 12년(1412)에 하륜의 발의로 다시금 대규모 공사가 시행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태안에 강무장을 설치할 정도였겠습니까? 강무장(강무장 講武場, crown hunting forest)은 조선조 초기 국가는 강무를 위한 장소로 일반 국민의 산림이용을 제한하는 구역을 설정했는데 조선건국 직후부터 국왕의 빈번한 사냥, 강무행사 기록으로 미루어 왕이 상당 기간동안 태안에 머물면서 사냥을 하며 운하 공사를 독려한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강무장은 대체로 오늘날 경기.강원지역에 만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것으로 운하공사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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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에서 빠져 나와 안면교 아래로 흐르는 물살이 매우 거셉니다. 

그러나 왕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운하 공사도 암반 때문에 어려움이 겪고 있어서 하륜의 건의로 5개의 저수지를 만들어 대강 개통을 시켰습니다. 변칙적인 방법이었고 오늘날 갑문식(저수조 또는 저수지) 운하와 비슷한 형태의 운하를 시공했던 것이죠. 그러나 드르니 포구를 통과한 조운선의 세곡을 여러 번 옮겨 싣는 어려움 때문에 그 방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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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굴포운하 공사는 조선 제7대 세조 7년(1461)에 신숙주의 건의로 3년 동안 계속된 일이 있고, 11대 중종 16년(1521)에 다시 타당성을 검토한 일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계획이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제18대 현종(1660-1674)때도 공사가 시행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하공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고려 인종 12년에서 부터 조선조 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535년 간에 걸쳐 10여 차례나 실시한 공사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그 흔적만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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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교(구 안면대교) 아래서 바라 본 백사장 포구 모습입니다. 서해쪽이죠. 저곳에서 부터 안흥량의 바람을 피해 이쪽으로 조운선들이 이동했지요.

그러나 용케도 굴포 운하의 시작점이었던 드르니 포구 쪽에 드르니 운하만 댕그러니 남겨 놓았습니다. 제가 굴포 운하를 '드르니 운하'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진 대토목공사의 흔적은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6.8㎞ 가운데 태안읍 인평리↔도내리 사이 2.8㎞ 구간에 걸쳐 남아 있어서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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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니 운하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마치 강물이 흐르듯 물살이 빠르게 느겨지는 곳입니다.

아울러 드르니 운하를 돌아보는 동안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었는데 우리 정부가 국민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경부대운하를 위한 기초공사로 알려진 4대강 정비사업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애시당초 경부대운하 공사는 물류비 절감을 이유로 건설하겠다고 했다가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수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으로 목적을 바꾸며 국민들을 속이며 국회에서 조차 날치기통과로 국민들의 뜻을 거역하고 있는 사업입니다. 드르니 운하를 공사해야 겠다는 고려 때 왕실의 집요한 모습이나 조선조 왕실의 모습과 전혀 다른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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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그나마 드르니 운하는 천수만의 숨통을 틔우며 천수만 방조제로 오염되기 쉬운 천수만을 살리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지만, 이미 수중보 건설을 시작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은 물길을 막거나 흐름을 막는 공사로 인해 천혜의 자연이 황폐화 되는 국토를 망치는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님들이 피땀 흘려 만들고자 했던 굴포 운하와 성격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공사일 뿐인 것이지요. 장장 535년 동안 굴포 운하 공사에 매달렸던 선조들은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굴포 운하공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정권의 5년 임기중에 누구의 미래를 위해 그나마 남은 마지막 우리 산하의 4대강을 굴삭기 등으로 파헤치는지 그저 속이 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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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니 운하 조차도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잇는 6.8㎞ 가운데 태안읍 인평리↔도내리 사이 2.8㎞ 구간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안흥량의 암초와 인평리와 도내리 암초 및 또다른 암초인 '하늘의 암초'가 아닐까요? 왕실을 위해 무리하게 백성들이 피땀흘려 지은 곡식을 거둬 들이지 말라고 하는 경고의 메세지 말입니다. 굴포 운하가 개통되었다면 백성들은 세곡미를 포함하여 각양각색의 조공품들이 개경이나 한양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드르니 운하가 얼마나 다행한 운하인지, 태안 전체가 섬으로 변하지 않고 안면도만 섬으로 변한 게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나 저나 실패한 운하라 해도 드르니 운하가 세계최초의 운하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

위 그림속의 두 안면대교 중 붉은색 안면대교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신온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안면도와 육지를잇는 연륙교며 649번 지방도로 상에 있는 다리입니다. 요즘 우리가 안면대교라고 부르는 다리입니다. 1970년에 완공한 길이 208.5m의 안면교(파란색)가 노후 되면서 1994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공한 다리죠. 길이는 300m에 이르며 폭은 9.5m에 이릅니다. 안면대교 건설 이후 안면교는 노후로 인해 16톤 이상의 차량과 높이 2.5m 이상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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