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번 국도 되살아 나다
-44번 국도 기분좋게 다시 만나다-
지난 17일 오후 4시경 한계령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원통에서 바라본 멀리 한계령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름끝자락에 떠나는 여름 피서는 오대산 자락 하늘 아래 첫동네인 '부연동'으로 목적지를 잡고 있었고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꽤 긴 여정 동안 도회지를 떠나 있고 싶었다. 말이 여름 피서지 입추가 지나서 떠나는 여름 피서는 그냥 '여행'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전하는 여름소식을 컴 앞에 앉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론가 떠나긴 떠나야 했고, 평소 가 보고 싶었던 부연동을 다시 찾고 싶었다. 대략 목적지를 정하고 보니 일정에 걸맞는 코스를 정해야 했는데 설악산이나 동해를 오가며 뻔질나게 오가던 한계령을 너머 주문진을 거쳐 주로 부연동에서 머물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되면 바다와 강과 계곡 등을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으므로 목적지를 정하자 마자 설레임이 일었다.
하지만 설레임도 잠시였다. 벌써 3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도인 44번 국도변 한계령의 물난리와 홍수가 만든 생채기가 떠 올랐다. 나나 이 길을 너무도 좋아했던 사람들은 2006년 7월 중순에 불어닥친 물폭탄이 휩쓸고간 한계령의 처참한 모습 때문에 한동안은 한계령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믿었고 당시 한계령 주민은 최소한 10년 동안은 한계령의 수려한 풍광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원통에서 양양으로 이어지는 44번 국도 대부분이 한계령이다.
수해 당시 남미에 있었던 터라 참상은 나중에야 알았고 당시 내 눈으로 확인한 한계령은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어서 나는 내 블로그를 통하여 절망적인 글을 남기며 더딘 복구공사를 괜히 나무라기도 했는가 하면 하천변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었다. 나는 생전에 예전 한계령의 절경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당시 물폭탄이 남긴 참상을 전하는 글은 다시금 봐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여름끝자락에 떠나는 여행길에 나는 흥분하고 있었다. 한계령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44번 국도변에 늘 보이던(?) 굴삭기가 사라진 대신 황폐했던 하천은 물길을 되찾아 맑은 물을 쉼없이 흘려 보내고 있었고, 8월 중순의 설악산 자락은 짙은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수선 하던 하천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잘 정비되어 있었고, 휴가철이 마무리되고 있는 44번 국도는 간간히 자동차가 오가고 있었는데 깔끔한 도로가 정글로 변한 짙은 숲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나는 한계령에 들어서는 순간 부터 정차를 거듭하며 달라진 한계령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하고 탄성을 지르며 안사람에게도 달라진 모습을 같이 확인하며 기뻐했다. 44번 국도가 되살아 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시 복구해 둔 한계령은 분명히 예전의 한계령 모습을 닮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3년의 세월동안 세번의 여름을 다시 나면서 한계령을 휘감아 돌아 흐르던 냇물이 제 길을 찾으면서 물길 곁으로 풀숲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인간이 간사한 것인지 내가 간사한 것인지...) 쉽게 절망한 나를 위로하듯 멀리 한계령 휴게소에 구름을 걸어 두고 한계령은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뒤늦게 폭염을 피해 달아나듯 떠난 나의 선택은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대견한(?) 선택이었다. ^^
한계령을 들어설 때 마다 가슴 설레게 하는 장면인데
금년 가을 한계령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래킬 것인지...
천 한가운데 살아남은 작은 솔 숲 주변에 석축을 쌓은 모습이 약간은 부자연 스럽지만 솔 숲 곁으로 휘돌아 흐르는 물길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스럽게 자연의 위대한 치료방법에 감탄을 하고 만다.
나는 다시금 이 아름다운 하천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3년의 세월이 수 놓기 시작한 한계령은 밑그림을 새로 그리며 황량한 천변에 풀꽃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와...!!) 자동차를 정차해 둔 채로 10월을 노오랗고 붉은 빛으로 물들일 한계령을 떠올렸다.
새로 심은 성질 급한(?) 나무들은 벌써 잎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형체만 남았던 44번 국도는 더 넓어지고 반듯하게 만들어 졌고...
도로가 정비되자 국도변 나무들이 더 울창해 보였는데 가을이면 44번 국도 전부를 물들일 나무들이다.
그때쯤 이 길을 지나면 숨이 막힐 테지?...
서울을 출발하면서 늘 보고 싶었던 야생화 같은 한 사람을 떠 올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를 만난 이후로 내가 좋아하고 우리가 좋아하는(그렇죠? ^^) 한계령을 떠 올릴 때 마다 버릇이 되었다. 그는 이 산자락에서 태어나 이 산자락의 구름과 바람을 벗하며 살아왔으며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한사 정덕수' 선생이다. 아마도 그가 노래한 '한계령'의 모습이 한계령을 가장 적절하게 그린 게 아닌가 하여 그의 글을 옮겨 보니 구름 속 한계령이 마치 꿈을 꾸는듯 하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한사 정덕수-
야생화를 닮은 정덕수 선생을 만나 구엽주를 나눈 곳은 오색약수터 앞 산나물을 찬으로 내 놓는 한 식당이었고 그 때문에 일정은 하루가 더 길어져 7박 8일이 되었다. 가수 양희은님이 노래를 불러 더 유명해진 '한계령'은 그의 힘들었던 삶 전부가 구엽주에 우러난 쓴 맛과 별 다를바 없었지만, 그가 작사한 한계령 때문에 사람들은 또 얼마나 행복해 하고 넉넉해 지는지...그가 노래한 마지막 연의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라는 구절에서는 산사람의 고된 모습이 그대로 그려지고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을 노래한 대목에서는 그가 더욱더 야생화를 닮은 고고하고 올곧은 사람의 향취가 묻어난다.
산사람으로 야생화 도감을 보는듯한 그의 해박한 야생화에 대한 지식 속에 구엽초는 산양들이 즐겨먹는 풀이지만 벼랑끝에서 구름과 바람을 늘 머리에 이고 사는 여러해살이 풀(약초)이였고 '삼지구엽초'와 전혀 다른 약초로 담근 술이었다.
"...거 있잖아요.
산양 숫컷이 여러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사는데
그 수컷이 구엽초를 뜯어먹고 강하게 된 게 바로 구엽초 때문입니다.
사람들 눈에 거의 띄지않는 귀한 약초래요..."
그는 취기가 적당히 오르자 산에서 직접 켄 산삼이야기를 실감나게 하며 시간 가는줄 몰랐다. 44번 국도에 얽힌 이야기 다수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 야생화가 되어 있었고, 그가 서 있던 자리는 노랫말 속 "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처럼 한계령을 넘나드는 바람과 구름이 그를 달래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바람과 구름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그에게서 풍기는 그윽한 약초향에 취하고 있었다. 그의 삶 대부분을 적신 한계령은 아마도 그의 삶에 한계를 가져다 준 힘겨운 고개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고고한 향기를 더해준 분수령이 되기도 했을 것 같았다.
한계령 정상이 가까워지자 짙은 구름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이었는데 비상등을 켜고 느릿느릿 기듯이 정상에 도착해 보니 동해안에서 피서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자동차들이 한계령 휴게소 가득했다. 모두들 피서를 마친 마당에 찬바람을 머금은 구름 속 한계령 정상에서 귀경길에 오른 그들을 바라보며 여름 한철 북적이는 한계령이 아니라 곧 다가올 단풍철에는 한계령 휴게소에서 머물 수 있는 공간도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1년전과 많이도 달라진 풍경이며 한계령이 복구된 이후로 도로가 정비되면서 한계령은 다시금 예전의 명성을 서서히 되찾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계령휴게소는 한계령휴게소는 미국의 '타임 誌'에서 '한국의 가장 경탄할 만한 훌륭한 건축가'라고 평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축물로 유명한 곳인데, 미시령이나 한계령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풍경도 일품이지만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무엇보다 돋보이며, 양양에서 원통으로 이어지는 44번국도를 따라 구비구비 돌 때 마다 한계령 정상에 서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소등라령 所等羅嶺"이고 소등라령을 국역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바드라재'로 번역하였는데, 한계령의 본래 이름은 '바드라'였다고 한다.
그후 조선시대 후기 문헌인 택리지, 대동여지도,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전부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고 있으며, 현재와 같이 한계령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1968년 공병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인제쪽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인제군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개인적으로는 한계령이라는 이름보다 보다 여행 등으로 자주 오가던 '44번 국도'라는 도로 이름이 친숙하기도 하다.
한계령이 대부분인 44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늘 그렇듯 양양쪽 동해로 갈 때는 설레임으로 시작되었다가 여행 등을 마치고 한계령을 따라 귀경길에 오르면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한계에 봉착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며, 여행 증후군으로 일상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않은 한계를 경험하게 된 것도 한계령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짧은 시간 여행을 마치고 한계령을 넘어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더 멀어져 가는 한계령 때문에 아쉬움을 가득 안고 귀경하는 길 또한 44번 국도인 한계령 도로가 아닌가 싶다. 그 고락의 길이 물난리를 겪은 후 3년이 지나면서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회복해 가니, 이 길을 따라 추억을 만들었던 분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설렐 것인지 이번 가을 단풍철에 꼭 한계령을 통하여 동해로 또는 서울로 귀경길을 잡아 보시기 강추해 드린다.
나는 운 좋게도 여름끝자락에 여름 피서를 떠나면서 44번 국도 한계령 정상부근 까지 내려온 구름속에 갇혀서 행복해 할 수 있었다. 길 위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이런 풍경들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갇혀 지내면 더 없이 행복할 텐데 한계령 정상에서 꿈꾸듯 이어지는 선경을 벗어나면 금방 현실로 돌아 온 모습 때문에 한계령은 또한 꿈과 현실의 경계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44번 국도를 따라 동해쪽 양양을 거쳐 주문진으로 향하면서 다시금 별천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 본 주문진 바닷가는 먼 나라 같은 풍경으로 우리를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44번 국도가 우리에게 선물한 풍성한 풍경이었다. 그 선물들은 3년전 나를 절망에 빠뜨리며 몸부림 치게 만들었던 한계령의 모습을 기억 저편 까마득한 곳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기분좋게 44번 국도를 따라 한계령을 벗어나며 7박 8일의 여름끝자락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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