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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광화문광장 육조거리 최대 '수혜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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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육조거리  최대 '수혜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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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광화문 세종로에서는 서울시로 부터 새로이 조성된 '광화문 광장 새빛들이 축제'가 거행되었고 나는 서울시민 자격으로 초대를 받아 행사장으로 향했다. 잘알려진대로 광화문광장이 조성되기 전 세종로는 출퇴근 시간 자동차로 북적거렸고 자동차의 소음이 가득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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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을 개창한 이태조는 민심수습과 풍수지리설 등을 명분으로 송악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태조 3년(1394) 9월 1일 신도 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되고, 이어 종묘, 사직, 궁궐, 관부 및 시가도로의 설치계획도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에 의하여 작성되어, 그 해 겨울 12월 4일에 종묘와 궁궐의 공역이 시작되고, 이듬해(1395년) 2월 29일 경복궁과 종묘, 관아 등이 육조거리와 함께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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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종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조치로 '육조거리'를 없애는 한편 대로를 조성했고, 일제시대에 들어와 육조거리는 1914년 '광화문통'으로 개칭되었으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완공과 함께 광화문이 이전되고 육조거리 양편에 건설되었던 장랑들이 사라지게 된 슬픈 역사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 역사적인 장소가 새 모습으로 단장되어 개장되는 행사에 들뜬 마음으로 참석했던 것인데 말끔하게 단잔된 광장 곳곳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뷰파인더 속에 연속으로 잡히는 '조선일보'가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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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을 바꾸어도 로고는 계속 잡혔고 로고를 피하니 원하는 풍경이 나오지 않아 여러번 앵글을 고쳤던 것인데, 솔직히 이런 짓은 사내가 할짓이 못되었고 마음이 쪼그라든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조중동으로 불리는 언론 속 '시사'에 대한 견해는 보수정권에 아부하는 모습으로 비춰졌고, 최근에는 미디어법 논란 속에서 조중동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극도로 악화된 점을 고려하면 조중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나로 하여금 로고를 회피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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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반일 논조의 기사로 인해 정간과 압수처분, 발매금지 및 기사삭제 등의 곤욕을 치렀던 일이나, 제8대 사장 조만식의 권유로 1932년 6월 영업국장으로 입사한 방응모(方應謨)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 만주사변 등 일제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고 한반도의 병참기지화 및 조선민중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더욱 강화되면서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함께 제6913호로 강제 폐간"<자료: 다음백과> 될 당시 가졌던 조선국에 대한 충성심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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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조선일보는 민족적 자존심을 내팽게 치고 민족주의자나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친미 보수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모습 등은, 신선한 이름인 '조선朝蘚'의 국호를 딴 신문 이름을 무색케 하고 있는 것이어서, 광화문 육조거리가 1914년 '광화문통'으로 개칭되고 1926년 조선총독부의 완공과 함께 광화문이 이전된 이후, 80년도 더 된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고 있다가 복원된 현재 조선일보 로고가 새삼스럽게 눈에 거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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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는 먹고사는데만 급급하여 선조들이 만들어 둔 찬란한 문화유산을 잘 유지하고 발전시킬 엄두는 커녕 되돌아 볼 시간도 없었고, 해방이후 60년이 넘도록 광화문 육조거리를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 정권 또한 전무했다. 따라서 금번 서울시에 의해 만들어진 광화문 육조거리 재현 행사인 '새빛들이 축제'는 서울시민인 내게 모처럼 잃어버렸던 자긍심을 되찾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조님들도 기뻐하실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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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종로에서 태평로 쪽으로 바라본 풍경 속에 우뚝 쏫아있는 조선일보가  "1920년 1월 16일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시사신문〉 등과 함께 민간지로서 발행을 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일제가 창간을 하면서 의도한 길을 가고 있어서, 앞서 언급한 바 국민정서에 반하는 반일 논조를 쓰며 정간과 압수처분, 발매금지 및 기사삭제 등의 곤욕을 치렀던 것과 같은, 다수 우리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왜곡된 정치적 논조로 '조중동'으로 불리는 게 무엇보다 싫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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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광화문광장에서 남대문 쪽을 바라보면 그 어느곳에서도 볼 수 있는 로고가 눈에 거슬렸던 것이며, 태평로에 우뚝쏫아 있는 로고는 광화문광장을 복원하면서 시민들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오는 최대의 수혜를 입은(?) 조선일보 광고 간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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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광화문 앞에서 바로보면 조선일보만 눈에 띄는 게 아니라 조선일보를 피하면 좌측으로는 동아일보가 눈에 띄고, 세종로와 태평로 좌우 빌딩에 설치한 각종 광고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제로 부터 강점당한 시절, 일제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창간된 조선일보가 창간의도를 간파하며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 것 처럼, 조선 600년사가 다시금 복원되는 이 시점에서 광화문광장의 역사적 상징은 굳이 서울시장(오세훈)이 언급한 '국가상징 가로나 정체성의 재확립'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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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은 문화유산 뿐만 아니라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언론 등은 새로 복원된 광화문광장과 함께 우리 민족의 정서에 부합하는 언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로고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광화문광장 육조거리 복원 최대 수혜자는 '조선국'이어야 마땅했던 것인데, 조선국의 자존심을 괜히 조선일보가 가로챈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운해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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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면 공교롭게도 이순신장군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 바로 앞에도 로고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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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해전사에 유래가 없는 한산도대첩으로 왜적을 무찌른 불멸의 이순신장군이 지켰던 조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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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사적인 광화문광장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광화문광장 복원 후 새로 창간하는 기분으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드 높였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오늘날 국론이 분열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모두 외세에 의한 것들인데 외세를 물리치고 마지막 까지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 육조거리에 서 있는 이순신장군과 선조님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언론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때쯤 광화문광장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조선일보의 로고는 또 얼마나 자랑스러울 것인가?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은 4대강 바닥을 뒤져가며 모래를 퍼 올려 건설되는 게 아니라, 선조님들이 물려준 소중하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잘 간직하고 발전 시키는 문화민족의 몫이며, 일제에 의해 문화정치로 태어난 신문이라 할지라도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새 조선을 빛낼 새로운 언론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광화문광장은 청계천광장 처럼 정치에 악용되는 사례가 없어야 할 것이며 정치적으로 독립된 시민들만의 공간이기를 소원한다.

가정에서도 어른들 앞에서는 다투지 않는 것 처럼 조선국의 법통이 이어진 광화문광장 육조거리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다투는 모습은 볼썽 싸납다. 광화문광장 복원은 선조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한 자리며 후손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숙원 사업이었다. 제발 광화문광장을 두고 티격태격하지 말기 바란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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