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품격 '남한산성'의 슬픈 봄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번지에 있는 남한산성은 우리 옛 성들과 함께 갈 때 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성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석조 예술품 같이 느껴진다. 중세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 있는 성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피신처로 삼기위해 만들어 둔 성 같지만 우리네 성들은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되 적으로 부터 위압감을 자아내거나 난공불락의 성 처럼 보이지 않고 아기자기하면서도 귀품있는 고품격 예술작품 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인조임금께서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남한산성에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 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고만 것이다. 어제 오후, 볕이 좋은 남한산성 길을 따라 가면서 문득 떠 오른 생각이다. 남한산성 주변에는 산벚꽃이 곳곳에서 하얀 꽃들을 피우며 품격을 드 높이고 있었다.
남한산성 동문에 봄이 찾아왔다.
나는 남한산성 둘레로 이어지고 있는 오솔길을 따라서 산성 담벼락이 풍기는 품격에 매료되는 한편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수어장대로 향했다. 그곳에 다다르기 전 서울 강남 일대와 서울 강북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에는 요즘 말썽을 빚고 있는 송파구의 제2롯데 신축 부지가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손에 잡힐 듯 서울 공군기지가 먼발치로 보인다. 뿐만아니라 이미 보상이 끝나고 개발에 들어간 '위례신도시' 지역에 있는 '남성대골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남한산성을 방문한 이유는 봄놀이를 위한 것도 아니고 고품격 예술품을 관람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군 장성들의 상식밖의 행동으로 인하여 상식밖의 소식이 전한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인조임금께서 수어장대에 머물다 청나라에 항복한 것 처럼 우리 군은 요즘 세간의 구설수에 올라있고 군의 위상이 이 정도라면 인조임금의 굴욕보다 더한 굴욕이 우리 대한민국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南漢山城
남한산성에 찾아 온 봄의 모습입니다.
산성에 걸터앉은 듯한 진달래가 운치를 더해줍니다.
남한산성 밖에 핀 매화는 두말할 나위도 없구요.
뒤돌아 보니 봄이 무르익기 시작한 산성의 모습이 고즈녘합니다.
남한산성 담벼락에는 봄이왔는데 장안에는 암투가 치열합니다.
멀리 남한산성내 촌락이 봄꽃에 둘러싸였습니다.
남한산성 벌봉 봉암성에서 내려단 본 서울 송파지역은 서울 공군기지 활주로 앞에 건설된 도시다.
守禦將臺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당초에는 단층누각(單層樓閣)으로 축조하고 서장대(西將臺)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를 맡았던 수어청(守禦廳)(전(前), 좌(左), 우(右), 중(中), 후(後)의 5관(官)이 소속되었음) 중 우영장(右營將)이 진(陳)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인조(仁祖)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淸太宗)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45일간을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英祖) 27년(1751)에는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왕명(王命)으로 서장대(西將臺)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扁額)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겪은 시련과 인조(仁祖)의 아들인 효종(孝宗)이 볼모로 심양(瀋陽)(현 봉천(奉天))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淸國)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英祖), 정조(正祖)가 효종(孝宗)의 능소(陵所)인 여주(驪州) 영릉(寧陵)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恥辱史)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고종(高宗) 건양(建陽) 원년(1896) 유수(留守) 박기수(朴岐壽)가 개건(改建)하였는데 2익공계(二翼工系)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하층 평면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을 구획하여 고주(高柱)를 세우고 주위 4면에 퇴칸을 돌렸으며 중앙에는 단(壇)을 만들었다. 상층은 하층에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변주(邊柱)가 되어 평면 비례상 급격히 줄어든 감이 있다. <자료 문화재청>
봄볕 완연한 수어장대 출입문이 너무 정겨운 곳이다.
인조임금의 굴욕을 보았을 수어장대 출입문은 여전한데
사람들은 외세에 대한 굴욕을 잊어버린 것일까?
수어장대 곁 서문으로 가는 성곽 옆에 핀 진달래 꽃잎이 예사롭지 않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하고 있었으나 외침에 대해서 이렇다할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곳인데, 오늘날 우리군의 지휘관들인 장성이나 국방부장관과 정부는 골프장 하나를 놓고 서울 공군기지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는 협상을 벌였다는 의혹이 들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혹들은 민주정부라 불리는 참여정부에서 부터 실용정부라 칭하는 이명박정부에 이르기 까지 이어지는 한편, '제2롯데와 위례신도시'가 정치인들의 보신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례신도시 개발 문제가 국방부로 부터 제동이 걸린 직후, 제2롯데 신축허가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나의 뒷통수를 때린 것 같은 멍한 기분이 남한산성 오솔길을 걷는 동안 내내 묘한 기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발길은 서울 공군기지 활주로 앞 비행구역에 면한 남성대골프장과 제2롯데 신축부지가 빤히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오늘날 군 지휘관들이 국가안보는 뒤로한 채 정치인들과 협상을 벌였다는 곳이고 정치군인을 만든 곳이기도 했다.
인조임금께서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이유는 우리의 국력이 조정이나 백성들의 생각보다 허술했다는 점이고, 임금의 판단을 흐리게 한 무관들이 당시에도 존재했음은 물론이다. 자주국방을 소홀히 하고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외세에 의존했던 결과가 빚은 참담함일까? 품격이 넘치는 남한산성은 그리하여 내게 웃음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다음편은 서울 공군기지 앞에 건설될 예정인' 제2롯데 112층 건물(555m)'과 군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남성대골프장'에 얽힌 미스테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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