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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그곳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보시면 느낌이 배가 됩니다.
정조가 능행 당시 머물렀던 용양봉저정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동작구 초롱길 8-1, 본동사무소 뒷편에 자리잡은 용양봉저정은 지하철을 두번 갈아타고 다시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동작동 국립묘지 가까운 곳에서 하차하여 다시 걸어가야 하는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자동차를 직접운전했으면 나았겠지만 여러모로 번거러울 것 같아서 도보를 이용했는데 정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가 머물렀던 용양봉저정으로 찾아가는 길은 마치 임금님을 알현하러 가는 것 같은 설레는 마음 가득했다.
마침 중국발 황사가 가득하여 동작구 한강변에서 보는 서울 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시간을 200년전으로 되돌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록화 속에서 정조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이었고 능행을 마치고 노량진에서 한강진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영상을 보는듯 생생했다.
'정조대왕 능행도' 속의 '노량주교도섭도' 속 1번의 그림은 정조임금을 태운 가마의 모습이고
2번의 홍살문 뒤이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뒤따르는 모습과 3번은 노량진 행궁터 '주교사'가 있던 곳이며 4번이 포스팅 속 용양봉저정이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써 정조임금님께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 참배을 다녀올 때 사용했던 건물로써 정조가 먼길을 오갈때 잠시 휴식하며 점심 수라를 드시던 장소로 '주정소'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세자인 아버지(사도세자)가 반대파들로 부터 억울하게 매도되어 뒤주 속에 갇혀 죽은 후 영조대왕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눈에 선한 어리적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능행길을 떠났던 것일까?
효심이 지극한 왕으로 알려진 정조는 당시 어지러운 국정을 되돌아 보는 가운데서도 10여차례 배다리를 건너 화성(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수시로 참배했던 것이다. 정조는 즉위한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가져 활발한 서적편찬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영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탕평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개혁정치를 지향하는 등 선정을 펼쳤지만 1800년 6월, 개혁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만 것인데 정조의 죽음에 대한 구구한 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용양봉저정으로 가는 길에 본 한강대교, 약 200년전 저곳에 배다리가 설치되었었다.
현충원 방면에서 용양봉저정으로 걸어오면서 제일먼저 눈에 띈 모습이 '한강대교'의 모습이었고, 200년전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교각이 있던 노량진과 한강진을 잇던 배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현대식 다리 위로 자동차들이 쉼없이 오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서울은 정조의 죽음이후 그의 죽음이 잊혀진 것과 같이 희비가 엇갈리는 근현대사를 통해서 완전히 세인들의 관심으로 부터 멀어진 듯 보였지만, 최근 정조의 내의원 '심환지'가 어명을 어기고 보관한 정조어찰 299통이 발견되는 등 방송과 드라마를 통해서 나타난 정조에 대한 관심은 사도세자의 죽음만큼 억울했든지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용양봉저정 바로 앞 모습
한강대교가 등뒤로 보이는 용양봉저정 앞에 도착하자 제일먼저 눈에 띄는 모습은 왕이 거처하던 행궁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정조가 머물렀던 행궁터는 도로가 완전히 잠식했을 뿐만 아니라 행궁속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용양봉저정은 동작구 본동 동사무소와 대형교회의 위용에 가려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200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살아 숨쉬는 선조님들의 유적이 이렇게 홀대를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버럭 문화재를 관리하는 우리나라의 관리들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본 한강대교 모습,
정조임금이 이곳에 서면 멀리 북한산 아래로 궁궐이 보였을 위치다. 초라한 관리사무소가 눈에 띈다.
정조가 능행길에 올라 화성으로 오가던 중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본 궁궐의 모습은 황사로 덮여 보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가 다시금 현현하여 행궁에 모습을 나타내고 한강 이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 기가찰 노릇이었다. 도로가 뚫리고 다리가 놓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용양봉저정에서 배다리가 놓였던 한강을 바라보면 제일먼저 토막난듯한 콘테이너 사무실 하나가 보이는데 이 사무소가 용양봉저정을 관리하는 사무소다.
정조임금이 용양봉저정으로 걸어서 올라갔을 용양봉저정 입구 모습
정조의 능행에 사용된 행궁터에서 용양봉저정으로 발길을 옮기는 동안 심경이 불편했던 것은 정조가 배다리를 통과한 후 가마에서 내려 걸어 올랐을 길은 급조된 조경수 몇이 봄볕을 맞이하고 있었고 너무 심하다 싶었던지 용양봉저정을 가로막고 있었던 집은 헐린채 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용양봉저정 모습
용양봉저정은 철제휀스로 보호되고 있었지만 잠궈두지 않았고 관리사무소 아저씨에 의해 쉽게 열렸다. 나는 정조가 걸어서 올랐을 돌계단을 따라 이동해 봤다. 주지하다시피 위 그림 '정조대왕 능행도' 속의 '노량주교도섭도' 속 #4에 위치한 용양봉저정의 부속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그나마 한채의 건물만 남았는데 내 기분을 언잖게 한 것은 칼로 자른듯 한 채의 유물 곁에 있는 풍경들이었고 성의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리를 포기한듯한 용양봉저정의 모습이었다.
용양봉저정을 맨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은 곧바로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이어지고 있었다. 임금이 머물던 용양봉저정과 맞붙은 곳에 민가가 붙어있었고 '정조대왕 능행도' 속 유적을 알리고 있는 팔폭병풍을 소개하는 전시물 뒤로 쓰러질듯한 낡은 가옥이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었다.
가까이 가 보면 우리 역사속의 소중한 유물이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용양봉저정 겹처마 지붕에서 추녀 위에 올려진 사래가 이웃하고 있는 민가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모습이고
사래 끝의 다시만든 토수는 비닐제품인듯 못으로 고정시켜 둔 모습이다.
유적과 민가가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보기 흉하여 용양봉저정 뒷뜰로 가서 살펴봤더니
오래된 벽돌 담장 하나 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용양봉저정 지붕이 담 너머로 걸쳐있는 것이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장면은 정조가 용양봉저정에 오를 때 제일먼저 발을 디뎠을 마루에 새까만 때가 낀 모습이었다.
나의 방문에 동행하여 곁에있던 관리자의 말에 의하면 '마루의 나무가 썩지 않게 기름을 칠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림과 같이 기름을 얼마나 성의없이 칠했던지 기름걸레가 지나간 자리는 찌든때 처럼 새까맣게 변했고 걸레는 마루바닥에서 건물 주변을 함부로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용양봉저정 터를 중심으로 좁디좁은 이 유적지 속에는 부속건물들의 초석들과 함께 개보수를 하면서 남겨둔 기와가 뒷뜰 한켠에 보관되고 있었다.
용양봉저정의 건물 전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 '용양봉길'로 명명된 작은 골목길을 따라 위에서 내려다 본 지붕 모습은 곳곳에 보수한 흔적이 있고 보수를 할 때 마다 훼손된 기와를 새 기와로 얹어 놓은 모습이었는데, 이곳에서도 유적을 함부로 대할 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용양봉저정과 벽돌담으로 마주한 민가는 폐가로 변해있었는데 비닐천막으로 덮어둔 가옥 지붕위에서 바람에 날리지 않게 얹어둔 기와와 벽돌들 중에는 용양봉저정에서 개보수 때 들어낸 기와로 보이는 기와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용양봉저정 뒷쪽에서 바라본 유적은 이곳이 우리 선조님들의 유적인지 의심케 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눈에 띈 기와장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았다.
개보수를 거치며 용양봉저정에 보관된 기와는 가깝게는 1988년도에 만들어진 신식기와였지만 오래된 기와들은 투박한 모습으로 제작년도나 제작사의 이름이 찍혀있지 않았다.
1988년에 제작된 기와에는 제작사와 년도가 찍혀있다.
그런데 이곳 용양봉저정과 이웃하고 있는 폐가 지붕에서는 용양봉저정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들이 함부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위 그림의 기와는 최근에 제작된 기와의 모습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기와의 모습이고 아직도 쓸만한 기와로 보였다.
그런 기와들이 아무렇게나 사용되고 이렇듯 홀대를 받으며 쓰레기로 둔갑되고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들은 용양봉저정의 기와로 추정되는 기와편들이 널린 모습들이다.
우리 문화재 관리 현주소 잘 보시기 바란다.
용양봉저정이 좁은 터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흉하지만, 좁디좁은 터 위에서 폐가에 의해 위엄있던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은 유명한 문화재 일부를 제외한 역사적으로 소중한 문화재들이 세인들의 관심이 소홀한 동안 얼마나 함부로 다뤄왔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글로벌 코리아'를 꿈꾸며 세계속에 대한민국을 심으려 하고 있고 다양한 계획들을 쏟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에서는 '한강 르네상스'를 꿈꾸며 우리의 젖줄인 한강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개발에 떠밀려 하지못한 친환경적인 모습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을 '문화도시'로 탈바꿈 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용양봉저정은 거대한 교회와 동작구 본동 동사무소 등에 가리고 잘린 채
숨도 못쉴 것 같이 답답한 모습이다.
그러나 정조가 머문 용양봉저정의 관리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가장먼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고 그에 앞서 우리민족의 고유자산인 유적들에 대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여 가장 가까운 과거의 우리 모습을 잘 보존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특히 용양봉저정은 한강 르네상스를 돋보이게 할 역사속 한강문화에 남은 몇 안되는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외치고 있는 문화강국이 얼마나 허울좋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떠 올릴 때 가장먼저 '남대문'을 떠 올리는데 용양봉저정과 같이 정조 생전 조선조의 역사는 우리 선조님들이 만든 역사며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한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속 한 부분인 것이다. 요즘 위정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국민들로 부터 대우를 받기 원하고 있고 그들은 그들의 행실을 돌아보지 않고 대우받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연로한 어른을 돌아보지 않고 고려장 시키듯 한 모습과 같이 버려둔 유적들은, 우리들의 정체성을 내팽개치고 우리 문화와 관계없는 외래문화에 심취하는 동안 더불어 사라진 '권위'의 한 현상일 뿐인것이다. 세계속에 대한민국을 위상을 제대로 세우려면 우선 우리민족의 고유문화를 먼저 지키고 잘 보존해야 한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나?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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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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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용양봉저정' 관리 이래서야!
얼마전 조선 제22대 왕 정조임금님(이하 '정조'라 함.)의 독살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던 중 한강최초의 부교인 '배다리'에 대한 자료를 접하고 정조 당시의 기록화인 '정조대왕 능행도' 속의 '노량주교도섭도'를 예의 주시하며 평소 그림속 곁을 여러번 지나친 그림속 '노량진 행궁'을 답사하기로 마음먹고, 지난 16일 지금으로 부터 약 200년전 정조가 능행을 다녀올 때 배다리를 통하여 한강을 건너거나 건너기 전에 휴식하던 장소인 노량진 행궁의 '용양봉저정'을 방문했다.
정조가 능행 당시 머물렀던 용양봉저정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동작구 초롱길 8-1, 본동사무소 뒷편에 자리잡은 용양봉저정은 지하철을 두번 갈아타고 다시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동작동 국립묘지 가까운 곳에서 하차하여 다시 걸어가야 하는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자동차를 직접운전했으면 나았겠지만 여러모로 번거러울 것 같아서 도보를 이용했는데 정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가 머물렀던 용양봉저정으로 찾아가는 길은 마치 임금님을 알현하러 가는 것 같은 설레는 마음 가득했다.
마침 중국발 황사가 가득하여 동작구 한강변에서 보는 서울 모습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시간을 200년전으로 되돌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록화 속에서 정조는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이었고 능행을 마치고 노량진에서 한강진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영상을 보는듯 생생했다.
'정조대왕 능행도' 속의 '노량주교도섭도' 속 1번의 그림은 정조임금을 태운 가마의 모습이고
2번의 홍살문 뒤이어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뒤따르는 모습과 3번은 노량진 행궁터 '주교사'가 있던 곳이며 4번이 포스팅 속 용양봉저정이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써 정조임금님께서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 참배을 다녀올 때 사용했던 건물로써 정조가 먼길을 오갈때 잠시 휴식하며 점심 수라를 드시던 장소로 '주정소'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세자인 아버지(사도세자)가 반대파들로 부터 억울하게 매도되어 뒤주 속에 갇혀 죽은 후 영조대왕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눈에 선한 어리적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능행길을 떠났던 것일까?
효심이 지극한 왕으로 알려진 정조는 당시 어지러운 국정을 되돌아 보는 가운데서도 10여차례 배다리를 건너 화성(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능을 수시로 참배했던 것이다. 정조는 즉위한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가져 활발한 서적편찬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영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탕평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개혁정치를 지향하는 등 선정을 펼쳤지만 1800년 6월, 개혁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만 것인데 정조의 죽음에 대한 구구한 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용양봉저정으로 가는 길에 본 한강대교, 약 200년전 저곳에 배다리가 설치되었었다.
현충원 방면에서 용양봉저정으로 걸어오면서 제일먼저 눈에 띈 모습이 '한강대교'의 모습이었고, 200년전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교각이 있던 노량진과 한강진을 잇던 배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현대식 다리 위로 자동차들이 쉼없이 오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서울은 정조의 죽음이후 그의 죽음이 잊혀진 것과 같이 희비가 엇갈리는 근현대사를 통해서 완전히 세인들의 관심으로 부터 멀어진 듯 보였지만, 최근 정조의 내의원 '심환지'가 어명을 어기고 보관한 정조어찰 299통이 발견되는 등 방송과 드라마를 통해서 나타난 정조에 대한 관심은 사도세자의 죽음만큼 억울했든지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용양봉저정 바로 앞 모습
한강대교가 등뒤로 보이는 용양봉저정 앞에 도착하자 제일먼저 눈에 띄는 모습은 왕이 거처하던 행궁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정조가 머물렀던 행궁터는 도로가 완전히 잠식했을 뿐만 아니라 행궁속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용양봉저정은 동작구 본동 동사무소와 대형교회의 위용에 가려 납작 엎드려 있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200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살아 숨쉬는 선조님들의 유적이 이렇게 홀대를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버럭 문화재를 관리하는 우리나라의 관리들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본 한강대교 모습,
정조임금이 이곳에 서면 멀리 북한산 아래로 궁궐이 보였을 위치다. 초라한 관리사무소가 눈에 띈다.
정조가 능행길에 올라 화성으로 오가던 중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본 궁궐의 모습은 황사로 덮여 보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가 다시금 현현하여 행궁에 모습을 나타내고 한강 이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 기가찰 노릇이었다. 도로가 뚫리고 다리가 놓인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용양봉저정에서 배다리가 놓였던 한강을 바라보면 제일먼저 토막난듯한 콘테이너 사무실 하나가 보이는데 이 사무소가 용양봉저정을 관리하는 사무소다.
정조임금이 용양봉저정으로 걸어서 올라갔을 용양봉저정 입구 모습
정조의 능행에 사용된 행궁터에서 용양봉저정으로 발길을 옮기는 동안 심경이 불편했던 것은 정조가 배다리를 통과한 후 가마에서 내려 걸어 올랐을 길은 급조된 조경수 몇이 봄볕을 맞이하고 있었고 너무 심하다 싶었던지 용양봉저정을 가로막고 있었던 집은 헐린채 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용양봉저정 모습
용양봉저정은 철제휀스로 보호되고 있었지만 잠궈두지 않았고 관리사무소 아저씨에 의해 쉽게 열렸다. 나는 정조가 걸어서 올랐을 돌계단을 따라 이동해 봤다. 주지하다시피 위 그림 '정조대왕 능행도' 속의 '노량주교도섭도' 속 #4에 위치한 용양봉저정의 부속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그나마 한채의 건물만 남았는데 내 기분을 언잖게 한 것은 칼로 자른듯 한 채의 유물 곁에 있는 풍경들이었고 성의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관리를 포기한듯한 용양봉저정의 모습이었다.
용양봉저정을 맨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은 곧바로 이곳에 도착하자 마자 이어지고 있었다. 임금이 머물던 용양봉저정과 맞붙은 곳에 민가가 붙어있었고 '정조대왕 능행도' 속 유적을 알리고 있는 팔폭병풍을 소개하는 전시물 뒤로 쓰러질듯한 낡은 가옥이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었다.
가까이 가 보면 우리 역사속의 소중한 유물이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용양봉저정 겹처마 지붕에서 추녀 위에 올려진 사래가 이웃하고 있는 민가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모습이고
사래 끝의 다시만든 토수는 비닐제품인듯 못으로 고정시켜 둔 모습이다.
유적과 민가가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보기 흉하여 용양봉저정 뒷뜰로 가서 살펴봤더니
오래된 벽돌 담장 하나 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용양봉저정 지붕이 담 너머로 걸쳐있는 것이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장면은 정조가 용양봉저정에 오를 때 제일먼저 발을 디뎠을 마루에 새까만 때가 낀 모습이었다.
나의 방문에 동행하여 곁에있던 관리자의 말에 의하면 '마루의 나무가 썩지 않게 기름을 칠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림과 같이 기름을 얼마나 성의없이 칠했던지 기름걸레가 지나간 자리는 찌든때 처럼 새까맣게 변했고 걸레는 마루바닥에서 건물 주변을 함부로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용양봉저정 터를 중심으로 좁디좁은 이 유적지 속에는 부속건물들의 초석들과 함께 개보수를 하면서 남겨둔 기와가 뒷뜰 한켠에 보관되고 있었다.
용양봉저정의 건물 전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 '용양봉길'로 명명된 작은 골목길을 따라 위에서 내려다 본 지붕 모습은 곳곳에 보수한 흔적이 있고 보수를 할 때 마다 훼손된 기와를 새 기와로 얹어 놓은 모습이었는데, 이곳에서도 유적을 함부로 대할 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용양봉저정과 벽돌담으로 마주한 민가는 폐가로 변해있었는데 비닐천막으로 덮어둔 가옥 지붕위에서 바람에 날리지 않게 얹어둔 기와와 벽돌들 중에는 용양봉저정에서 개보수 때 들어낸 기와로 보이는 기와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용양봉저정 뒷쪽에서 바라본 유적은 이곳이 우리 선조님들의 유적인지 의심케 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선 눈에 띈 기와장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았다.
개보수를 거치며 용양봉저정에 보관된 기와는 가깝게는 1988년도에 만들어진 신식기와였지만 오래된 기와들은 투박한 모습으로 제작년도나 제작사의 이름이 찍혀있지 않았다.
1988년에 제작된 기와에는 제작사와 년도가 찍혀있다.
그런데 이곳 용양봉저정과 이웃하고 있는 폐가 지붕에서는 용양봉저정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들이 함부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위 그림의 기와는 최근에 제작된 기와의 모습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기와의 모습이고 아직도 쓸만한 기와로 보였다.
그런 기와들이 아무렇게나 사용되고 이렇듯 홀대를 받으며 쓰레기로 둔갑되고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들은 용양봉저정의 기와로 추정되는 기와편들이 널린 모습들이다.
우리 문화재 관리 현주소 잘 보시기 바란다.
용양봉저정이 좁은 터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흉하지만, 좁디좁은 터 위에서 폐가에 의해 위엄있던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모습은 유명한 문화재 일부를 제외한 역사적으로 소중한 문화재들이 세인들의 관심이 소홀한 동안 얼마나 함부로 다뤄왔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글로벌 코리아'를 꿈꾸며 세계속에 대한민국을 심으려 하고 있고 다양한 계획들을 쏟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에서는 '한강 르네상스'를 꿈꾸며 우리의 젖줄인 한강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개발에 떠밀려 하지못한 친환경적인 모습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을 '문화도시'로 탈바꿈 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용양봉저정은 거대한 교회와 동작구 본동 동사무소 등에 가리고 잘린 채
숨도 못쉴 것 같이 답답한 모습이다.
그러나 정조가 머문 용양봉저정의 관리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가장먼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고 그에 앞서 우리민족의 고유자산인 유적들에 대한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여 가장 가까운 과거의 우리 모습을 잘 보존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특히 용양봉저정은 한강 르네상스를 돋보이게 할 역사속 한강문화에 남은 몇 안되는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외치고 있는 문화강국이 얼마나 허울좋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떠 올릴 때 가장먼저 '남대문'을 떠 올리는데 용양봉저정과 같이 정조 생전 조선조의 역사는 우리 선조님들이 만든 역사며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한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속 한 부분인 것이다. 요즘 위정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국민들로 부터 대우를 받기 원하고 있고 그들은 그들의 행실을 돌아보지 않고 대우받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연로한 어른을 돌아보지 않고 고려장 시키듯 한 모습과 같이 버려둔 유적들은, 우리들의 정체성을 내팽개치고 우리 문화와 관계없는 외래문화에 심취하는 동안 더불어 사라진 '권위'의 한 현상일 뿐인것이다. 세계속에 대한민국을 위상을 제대로 세우려면 우선 우리민족의 고유문화를 먼저 지키고 잘 보존해야 한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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