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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갤러리/video land

SBS '왕과 나'... '정현왕후'의 무덤이 있는 '선릉'에 가 봤더니


SBS '왕과 나'...

'정현왕후'의 무덤이 있는

 '선릉'에 가 봤더니


얼마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부인 '세실리아'가 합의 이혼했다고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이 18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1848년 이래
 23명의 프랑스 대통령 가운데 재임 중 이혼한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52세의 사르코지 대통령과 49세의 전직 모델인 세실리아는

 1996년 결혼하기 전 각각 이혼한 경력이 있으며 2005년에는 몇 달간 별거하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0살 난 아들이 있다. 이 내용은 불과 일주일 전 방송을 타고 전세계로 타전 되었는데

이 사실이 '뉴스'가 된 배경에는 '보통의 상식'과는 다른 '선택' 때문이었고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세실리아의 '사랑'에 대한 '선택' 때문으로 보인다.





 정현왕후의 릉 뒤에서 강남땅을 굽어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가운데 있는 '여인'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데

서양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이나 우리네 역사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사랑'에 대한 질투나 배신등은

그래서 그런지 우리네 서민들의 입에 곧잘 오르내리면서 '뉴스'를 만들곤 한다.


일반인들의 생각에 권력의 최고층에 있는 여인이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까지 이혼을 결심하고 '사랑'을 찾아서 떠나는 이야기는

어쩌면 '배부른'소리 같이 들리지만, 정형적이고 마음에도 없는 짓(?)을 임기내내 되풀이 하며 자신의 삶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여인은 흔치 않고

잠시의 권력에 안위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 보다 다소 힘이 들어도  영원한 사랑을 찾아 가는 것이 어째 보면 현명한 판단 같기도 한데

    우리네 조선시대 궁녀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깝기 짝이없는' 선택으로 보여진다.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SBS의 사극 '왕과 나'는 조선시대 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암투를 잘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암투의 진원지는 다름아닌 '사랑'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인을 책봉하려는 움직임과 거세하려는 움직임 뒤에는 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들은 '妃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아니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궁녀'라는 이름으로 입궁한 다음 궁중음식이나 궁중복식.궁중육아 등 조선시대 최고의 문화인 궁중생활 문화를 만들어 낸 주역들이었는데

왕의 사적인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특히 왕에게 주어진 '밤의 문화'를 좌지우지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정치적 야심가들은 호시탐탐 왕과 가까운 궁녀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그중에서도 왕의 최측근에 있는 '지밀궁녀'와 '제조상궁'은 포섭의 제 일순위였다.


  침실에서 근무하는 '지밀궁녀'는 '왕의 밤생활'을 지키는 궁녀였으므로 왕의 은밀한 내용까지 다 알고 있는 궁녀였고

그래서 '至密'이라는 말과 같이 'Top secret'에 해당하는 기밀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므로

정치적 야심가들은 궁녀와 내통할 수 있는 '내시'와의 접촉 또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가운데 사극 '왕과 나'에서 '내시부 수장 조치겸역'을 맡은 전광렬은 끊임없이 자신과 줄이 닿은 정치적 야심가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고 있는데

그가 맡은 역할이 곧 궁녀들의 관리를 맡고 있는 왕의 측근에 있는 내시부 수장이고 또 다른 권력의 한축은 왕의 비와 왕후등이었다.



SBS사극 '왕과 나'가 품고 있는(?) 정현왕후의 릉






필자가 '정현왕후'의 무덤이 있는 선릉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지난주 토요일 오후5시가 다 되어서 였다.

'선릉'은 이제 지하철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지 선릉에 대한 일반의 인식들은 대부분 다른 릉과 같이 '꼬질꼬질'한 궁의 역사를 알고 싶지 않다는 듯이

주말이 되었음에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를 포함하여 열댓명이 여기 저기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니

선릉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적었다. 시간이 없어서 정릉은 둘러보지 못했다.


지척에 두고도 가 보지 않는 우리들의 인심뒤에는 '궁궐의 역사'가 백성들에게 잘 못 비친 때문이겠거니와

요즘 방영되고 있는 '왕과 나'에서만 해도 복식등이 고증은 되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복식과는 너무도 큰 차별을 보이고 있어서

대부분의 백성들인 '우리'들이 궁에 대하여 '위화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궁녀를 등장 시킨것도 이 때문인데,

 각종 사화를 몰고 온 배경에는 권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상모략의 한 가운데 궁녀가 있었기 때문이며

어떻게 백성들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반하여 왕이라는 사람이 궁녀를 수백명씩(보통 500~600명정도) 거느리며 살아야 하는지

요즘 방식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내시의 제도가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가 될 때까지 요즘 '비서실'과 같은 업무를 관장했던 궁궐의 모양새는

 궁녀와 왕의 비나 왕후에 의해서 그 역사를 써 나가고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볼라치면 모조리 여인들의 치맛자락 속에서 놀아난 역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왕과 나'에서 내시부 수장 조치겸이나 왕후들 까지도 궁녀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 궁녀는 왕으로 부터 간택되는 날 마치 천하를 호령할 둣한 '권력'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런 암투가 조선시대에 횡행한 뒤에는 정현왕후와 같은 '모사가'(?)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하늘이 내린 운명'을 타고 난다고 했던가?

그녀의 권력욕은 하늘을 찌르는 듯 했고 기록에 의한 그녀의 행적을 보면 왜 '선릉'에 일반인의 발걸음이 끊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조선왕조의 임금들은 주로 여자복(妻福)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의 여성관은 일반인들과 달라서 궁녀 수백명을 언제든지 간택할 수 있었던 환경 탓인지

거의 '종마'와 같은 구실밖에 할 수 없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건강한 궁녀들은 이미 '처녀성' 까지 감별해 둔 상태고 그 집안의 내력까지 소상하게 알려져 있으니

언제 궐 밖으로 나들이 하여 흠모할 만한 대상을 찾을 수 있었겠냐 하는 생각이다.


요즘 같으면 최소한 '채팅'도 해 보고 '눈팅'도 해 볼만한 환경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갇힌 궐 속에서 이런 꿈을 꾼다는 자체가 무리여서

늘 내시부의 선택에 의해서 궁녀를 만날 수 있었고 '종마'가 아닌 임금의 입장에서 제아무리 지밀궁녀가 잘 선택한 궁녀도

'임금의 밤'을 망쳤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수백명의 궁녀가 필요 있겠는가?

허구헌날 뻗쳐대는 청춘의 발기와 유혹들은  그래서 필요이상의 사정을 함으로써 임금들은 백약이 무효험한 채로 일찍 세상을 등졌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선릉의 주인공인 성종임금은 어릴때 부터 총명하여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전해지며

그 덕분에 '동국여지승람'과  역사책인 '동국통감' '삼국사절요'와 우리나라의 시들을 모은 '동문선' 음악책인 '악학궤범'등 많은 책들이 편찬되었다.

하지만, 성종역시 처복이 없어서 처음 '상당군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를 맞았으나 성종 5년인 1474년에 소생없이 사별하고

두 번째 비(妃)가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廢妃)윤씨였고, '정현왕후 윤씨'는 세 번째로 중종대왕의 어머니다.



성종대왕(조선9대)의




 


 


 성종대왕의 침릉 앞에서 바라 본 강남의 빌딩군...

앞의 魂遊石에 靈이 내리면 저 빌딩을 바라 보겠지...!




成宗대왕의 릉침陵寢 


능상과 병풍석이 보인다. 병풍석 주위로 12지신이...

'두개'의 望柱石이 인상적이다.





 릉을 지키는 무신...좌우에 문무신이 릉을 지키고 잇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선릉 위에서




 정자각은 수리중이다.




 碑閣에서 바라 본 선릉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조선국 성종대왕 선릉 朝鮮國成宗大王宣陵

정현왕후 부좌강      貞顯王后 示+付 左岡


 




 선릉에 들어서면 정자각 뒤로 보이는 성종의 릉







예종(睿宗)이 1469년 재위 13개월만에 승하할 때 왕위계승 1순위는 예종의 소생 제안대군(1466-1525)이나 그는 불과 4살에 불과 했고

에종의 형님으로 동궁 시절 죽은 덕종(德宗 : 추존)과 인수대비 한씨 사이 아들 중 맏이 월산군으로 계승2순위 였는데

들째 잘산군(山君) 성종이 3순위로 등극했다.


요즘 아파트를 분양하는데 있어서 순위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데

하물며 '나랏님'을 정하는데 제3순위가 1.2순위를 제치고 등극을 했다면 보통의 '피터지는 싸움'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정사는 이런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적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성종  즉위년( 1469) 11월 28일 

…. 진시(辰時)에 예종(睿宗)이 훙서(薨逝)하니….

 

대비(즉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얼마간 슬피 울고 나서 정현조(鄭顯祖)와

권감에게 명령하여 여러 원상(院相)에게 두루 묻기를, “누가 주상(主喪)할

만한 사람인가?” 하니 신숙주 등이 말을 같이하여 아뢰기를,

 

“이 일은 신(臣) 등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교지(敎旨)를 듣기

원합니다.”하였다. 대비가 말하기를,

 

“원자(元子)는 바야흐로 포대기 속에 있고, 월산군(月山君)은 본디부터

질병이 있다. 자산군(者山君)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마는 세조(世祖)께서

매양 그의 기상과 도량을 일컬으면서 태조(太祖)에게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主喪)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숙주 등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貞顯王后 尹氏 陵




 정현왕후의 릉 뒤에서면 강남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신이 없는 정현왕후의 릉을 지키고 있는 문무신과 지신과 석양 석호들...




 릉을 아름답게 감싸고 있는 이 소나무들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해 선택된 소나무숲이다.




 저 릉 뒤로 정현왕후의 침릉이 있다.





 외부로 부터 철저히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정현왕후의 쓸쓸한 릉...



  그런데 이런 기록들을 보고 있노라면 궁궐에서 일어난 일련의 계략들이 단지 '사랑' 때문에 벌어진 것 같아 보이지 않고

여인들은 그저 임금이 즐기던  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음이 보이는데 정사의 기록이 '사랑놀음'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인 한명회 덕분에 성종이 등극한 배경에는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끼친 여인들의 공로는 목숨이상을 걸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 성종의 능침인 선릉에  정현왕후의 능침이 언덕배기에 함께 누워 있는데

그녀가 누웟던 자리 뒷편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남의 빌딩들은 묘한 감흥을 자아내게 한다.

그녀가 누운 선릉의 저 자리 앞편으로 예전에는 금천이 흘렀을 것이고 작은 숲과 농토들이 전부였을 것인데

사후에도 그녀는 금싸라기 땅 강남을 굽어 보고 있는 페이소스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주말에 선릉을 찾는 사람들이 없이 쓸쓸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임진란 때 왜놈들이 이 릉을 훼손하는 '치욕'도 함께 했다고 하니

그녀가 궁궐에서 행한 악한짓에 대한 하늘이 내린 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것은 왜일까?...


지금,

선릉은 주말이 되어도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찾아주는 사람 없이... 쓸쓸이 낙엽만 날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 정현왕후는 억울하다고 항변할지 모르나

 우리들 역사에는 세실리아와 같이 사랑에 '자유로운 ' 여성이 없어 보이고

 恨만 가득한 '여성사'만 보일 뿐인데,

마치 오래전에 나와 유년기를 함께 했던 어머니를 보는 모습같아서 이 가을 쓸쓸하다.

그 어머니의 무덤가에는 바람만 날릴 뿐이다.


 어머니도 사랑은 했을 터인데...



베스트블로거기자Boramirang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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