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_저만치 앞서 가는 님 뒤로
-하니와 함께 다시 찾은 돌로미티 여행
그 산중에 발을 들여놓으면 지천에 널린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돌로미티까지 이동하는 거리와 시간 등에 대해서 관련 브런치에 기록해 놓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물론 한국에서 돌로미티로 여행을 떠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런 바람들은 이곳을 다녀온 후로 점점 더 증폭되고 있다. 세상의 일은 저마다 적절한 통과의례를 요구하고 있다. 그건 사람 사는 자연계의 법칙과 다르지 않아서 돌로미티의 비경에 접근할 때까지 과정이 그러했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레타에서 돌로미티로 이어지는 여정을 ㄱ글 지도를 통해 다시 한번 더 살펴보기로 한다.
위 구글 지도에 등장한 우리 집(Casa)에서부터 돌로미티(Dolomiti)까지 거리는 911km에 달한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리면 9시간 38분(9 Ore 38 min)이 걸린다고 표시되어 있다.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다. 하니와 나는 이 여정을 바를레타-돌로미티-밀라노-빠르마(꼴로르노)-피렌체-로마-바를레타를 경유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9박 10일간의 기나긴 여정 끄트머리에 밀라노에 들러 볼 일을 보고, 빠르마 시에 위치한 요리학교(Reggia di Colorno)를 그녀와 함께 방문한 것이다.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한 번 살아보고 싶었던 피렌체에 들러 1박을 하고 다음날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 대사관을 방문하여 여권을 갱신한 다음 바를레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매우 빡빡한 일정이었다.
이런 여정은 세상을 살아갈 때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며 이탈리아에 둥지를 튼 후부터 일상이 됐다. 그와 함께 지난여름의 돌로미티 여행에서 만난 여정 또한 별로 다르지 않았다. 트래킹을 하는 과정에서 비경을 만날 때까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산기슭에서 올려다보면 암봉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고도를 높이며 정상까지 이어지는 트래킹 루트를 따라가면 유리가 미처 몰랐던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가 흘린 땀을 보상받게 되는 것이다. 산행의 묘미나 인생의 여정은 매우 흡사한 것이라고나 할까..
길_저만치 앞서 가는 님 뒤로
그녀와 함께 꼴포스꼬 알타바디아(Colfosco Alta Badia) 하이킹 루트를 걸어갈 때.. 지난해 올랐던 삐쉬아두(Pisciadù)의 장엄한 비경이 우리 곁을 따라다녔다. 당시 비경을 뒤돌아 보니 차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랬지..
신께서는 삐쉬아두 정상에 세상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비경을 감추어 두었다.
당시 그녀는 정상 부근의 벼랑길에서 애를 먹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을 맞이한 것이다. 시쳇말로 '빼박'의 현장을 통과하자마자 우리 앞에 선경이 펼쳐진 것이다. 땀을 흘린 자 혹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결과를 기다리는 노력의 산물이 그곳에서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저만치 앞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저 앞만 보며 걷는 그녀..
그녀 곁으로 지난해 다녀온 삐쉬아두의 비경이 오롯이 펼쳐져 있다. 계곡 사이로 새하얀 잔설이 남아있는 곳. 멀리서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그곳에는 돌로미티의 노란 꽃양귀비가 우리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때 그 장면을 다시 돌아보면 이랬지..
돌로미티 삐쉬아두 정상으로 이어지는 트래킹 루트 옆으로 샛노란 꽃양귀비가 빼곡하다. 그녀는 등산용 스틱 대신 돌로미티에서 임시방편으로 주운 나무 작대기 두 개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 잔설이..!
다시 방문한 돌로미티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하이킹은 대략 1600m의 해발고도를 이루고 있는 곳이며, 빠쏘 가르데나(Passo Gardena) 9부 능선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주차를 해 두고 오후 시간에 하이킹을 감행한 것이다. 오후 햇살이 따뜻하게 쬐고 있는 하이킹 루트.. 그녀가 저만치 앞서 걷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때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념무상.. 그녀가 힘이 들 때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런 말도 없다. 아무런 생각도 없다.
그저 앞만 보며 걷는 것이다.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 이런 습관은 그대로 이어졌으며..
힘이 들 때면.. 너무도 힘이 들면 "힘이 든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뿌에즈 오들레(Puez Odle)의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힘이 들 때마다 음악을 듣곤 했다.
그녀의 심금을 울린 클래식 음악의 수만큼 인내하고 또 인내한 시간들.. 음악을 들으면서 숨죽여 혼자 어깨를 들먹인다. 그녀를 달래주는 음악이 그녀 곁에 있었으며 그림 그리기가 그녀의 빈자리를 메꾸어 주었다.
그리고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 떠나는 산행을 통해 체력을 다져왔다.
서기 2021년 9월 11일 주말 오후.. 우리는 모처럼 게으름을 피우며 돌로미티 사진첩을 열어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 우리가 다녀온 삐쉬아두 계곡이 펼쳐져 있었고 트래킹 루트가 지그재그로 그어져 있었다.
"사는 동안 돌로미티를 몇 번 더 다녀올 수 있을까.."
하고 내가 말했다.
"한.. 열 번쯤..?!!"
하고 그녀가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돌로미티로 10번을 더 다녀올 수 있으려면 최소한 10년은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생존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 앞에 놓인 시간들을 자세히 돌아봐야 한다. 돌로미티에서 자유로운 시간은 6월부터 9월까지로 알려져 있다. 금년에 다녀온 8월 말경의 돌로미티는 추웠다. 이런 날씨 때문에 내년에는 7월 초에 돌로미티로 떠날 생각을 해 보고 있었다.
돌로미티의 풀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내밀 때쯤이면 어느덧 가을이 오실 것이다.
시간이 잠시 흐른 후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년부터 야영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돌로미티의 풀꽃들과 지낼 수 없는 시절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저만치 앞서 걷는 그녀를 바라보며 여러 생각들이 교차한다. 곧 세월의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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