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설악 비경 속으로
-못 보고 죽으면 너무 억울한 설악의 비경-
왜 설악산인가...
설악산에 미치면 고칠 약도 없다. 그 대신 평생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그림 한 장을 안고 산다. 세상의 영약 산삼보다 더 뛰어난 약효가 그림 한 장이다. 그 누가 말려도 바람처럼 떠나고야 마는 신비스러운 이끌림. 필자가 잘 아는 한 분은 자기도 모르는 이끌림을 따라 천불동 계곡으로 사라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 민족의 얼을 간직한 듯 내 앞에 서 있는 노송 한그루가 바라보고 있는 그곳으로 사라졌다. 희한한 일이다.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알려진 분이다. 어느날 그는 필자와 몇 분이 모여 느긋하게 곡차를 즐기고 있었다. 생각컨데 당신과 나눈 곡차의 양은 평생을 통털어 만남 회수 대비 가장 많이 주거니 받거니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만나기만 하면 곡차 삼매경에 빠져들며 행복해 했다. 우리의 만남은 한랭전선을 밀어내고 즉각 온난전선을 형성하며 행복한 비를 흩뿌리게 되는 것이다.
고무신 신고 대청봉에 오른 현대판 신선 이바구
곡차 잔이 몇 순배를 돌자마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겨둔(?) 일화가 배시시 빠져 나오며 일행을 즐겁게 한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설악산의 황홀경에 취해 신선처럼 사라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푸하하...아우님, 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잖우...ㅋ"
그는 어느날 속초에서 설악동에 잠시 들렀다가 비선대까지 다녀올 요량으로 아무런 차비도 하지 않은 채 비선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까지 거리는 3km에 이른다. 어른들의 보폭으로 치면 대략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평지길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비선대에 도착하여 그곳의 매점에서 곡차 한 잔과 도토리묵 한 접시를 먹고나서 돌아서도 아무리 늦어도 3시간이면 다시 설악동으로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선대까지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자기를 유혹하고 있는 것. 설악산의 비선대를 아시는 분들은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시츄에이션. 그는 비선대에 도착해 조금전까지 마음먹었던 목적의식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설악산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당신의 머리 속에는 천불동이 가득했고, 천불동의 동력이 그의 발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는 천불동계곡 어디쯤까지만 다녀올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비선대를 그냥 지나쳤다. 비선대만 그냥 지나친게 아니라 양폭대피소를 지나 천불동계곡을 지나가고 있었다. 비선대에서 양폭대피소까지 거리는 2km. 1.3km만 더 가면 무너미 고개를 지나 희운각 대피소에 도달한다. 외설악 깊은 곳에 도달한 그의 선택은 지금껏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미 넘지못할 선을 넘고 만 것이다. 어느 순간 자기의 좌표를 깨달았을 땐 어쩔 도리가 없었단다.
"ㅋ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기왕지사 이곳까지 온 거 대청봉이나 다녀와야 겠다는..."
"푸하하..."
"ㅋ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기왕지사 이곳까지 온 거 대청봉이나 다녀와야 겠다는..."
"푸하하..."
좌중은 행복의 소나기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거의 미친 수준이었다. 그의 발에는 달랑 고무신 한 켤레가 신겨져 있을 뿐이고 남들이 다 입는 아웃도어는 애시당초 찾아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아마도 천불동에 살고 있었던 신선이 현현하면 이런 모습인지 모를까. 멀쩡한 정신에 고무신을 신고 설악산 등반에 나선다?...그 모습을 생각하니 좌중은 자지러지는 것이다.
"ㅋ 그래서 어떻게 됐수?..."
"푸하하...사람들이 다 쳐다보더군. 별 희한한 넘 다 본다는 듯 쳐다보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대청봉까지 간 거지.ㅋ 내가 생각해 봐도 미쳤어. 그때 왜 그랬는지. 아마도 고무신 신고 대청봉에 오른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껄. 푸하하"
"푸하하...사람들이 다 쳐다보더군. 별 희한한 넘 다 본다는 듯 쳐다보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결국 대청봉까지 간 거지.ㅋ 내가 생각해 봐도 미쳤어. 그때 왜 그랬는지. 아마도 고무신 신고 대청봉에 오른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껄. 푸하하"
설악산은 그런 곳이었다. 금방 도착할 것만 같은 신선암은 코 앞에 보이는데 신선암 한쪽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노송의 기개가 당신의 호탕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설악산은 천번 만번 다녀도 다시 가고 싶은 곳. 지독한 그리움을 간직한 고향같은 존재였다. 고무신을 신고 대청봉에 올랐던 그는 e-수원 시민기자이자 문화재 답사 전문가인 블로거 하주성(http://rja49.tistory.com/) 형이었다.(형,미안하오.미치게 만들어서...ㅜㅜ )
설악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신선암의 황홀경에 취해 뭉기적거린 탓에 앞서간 아내와 아우님은 보이지 않았다. 숲속 멀찌감치 앞서 가는 모습이 힐끔힐끔 눈에 띄는 가운데 나를 둘러싼 설악은 이미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성 형이 고무신만 신은 채 대청봉까지 이끌린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군들 설악의 본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주채할 수 없는 이끌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행복했다. 설악은 세상 그 누구도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의 단비를 숲속에 가두어 놓았다가 어느날 당신을 찾은 여행자 가슴에 마구마구 쏟아붓는 것이다. 이무런 댓가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을 덤으로 풀꽃을 길가에 드리워 놓았다. 마치 올무처럼 발걸음을 붙드는 야생화...
잠시 그 아리따운 요정과 눈을 맞추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참 곱기도 하지?...)신선암 꼭대기 부근에 꽃을 피운 설악 용담꽃이었다.
용담꽃(Gentiana scabra)의 꽃말은 '당신의 슬픈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 아무도 모르는 숲 속에서 바람과 구름과 햇님과 달님을 벗삼아 지내다가 어느날 한 여행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자태를 한 설악 용담꽃이다.(안녕~^^*)
신선암 정상으로 가는 숲속길에 들어서자 신선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바짝 마르기 시작한 고사목 향기와 폐부를 시원케 하는 맑은 공기.
이번에는 설악 산부추꽃이 발목을 붙든다. 설악에 뒹구는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 조차 그 어느것도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신선암이 절로된 것인가. 바람과 구름과 볕이 달빛에 어우러져 억만겁에 억만겁을 더해 빚어놓은 비경. 마침내 신선암 꼭대기에 다다랐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어느 순간 내 앞으로 밀려들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능선. 그곳엔 단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암릉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청봉을 휘감던 구름은 어느덧 소청봉까지 덮어버렸다. 소청봉 아래 희운각 대피소가 하얀 점으로 남았다. 우리가 이동해 온 길이다.
못 보고 죽으면 너무 억울한 한국의 비경
반만년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후손들을 굽어 살피는 신이 사는 땅이었을까. 어쩌면 이곳에 사는 신선들이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공룡능선 등 설악산 곳곳을 다니는동안 위험한 고비는 있었을 망정 단 한차례도 사고가 없었다. 그런데 뾰죽뾰죽 솟아오른 신선봉 암릉 위로 발길을 옮기자 오금이 저려오는 듯 아찔해 온다. 귀가한 후 눈을 감고 다시 그 자리에 서면 낭떠러지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기분이 든 곳.
그곳에서 고무신을 신고 신선처럼 대청봉으로 사라진 주성 형의 뒷모습이 아른 거리는 듯 하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노송이 바라보고 있는 남쪽, 구름이 드리워진 곳이 설악산의 주봉 대청봉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대청봉이나 중청 소청에서 신선암을 바라봤지만 신선암에서 바라보는 내.외설악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거대한 설악은 신선암을 중심으로 펼쳐진 듯 마치 신선들의 지휘부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신선암 봉우리가 가까워지자 바람을 다스리는 신과, 구름을 다스리는 신과, 비를 다스리는 신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도드라졌다. 신선암 곁에는 어느새 구름이 몰려드는가 하면 한무리 구름이 이내 소청봉 쪽으로 사라지며, 다음 군사들을 재촉하며 당신의 손자들이 서있는 신선암 곁을 사열하는 것이다. 참 희한한 경험이자 신선놀음이 펼쳐지는 비경이 마침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곳.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런 장면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저승으로 가는 길에 다시 뒤돌아 본 대한민국 땅에 이런 곳도 있었다면 땅을 치고 아니 하늘을 우러러 후회를 거듭할지도 모를 것. 암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에게는 범봉이 도전의 대상일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의 눈에 비친 범봉은 경배의 대상처럼 존귀해 보이는 존재. 그 비경이 펼쳐지는 곳에 발을 딛고 서니 신선이 된 것 같은 황홀한 느낌이 단박에 든다. 벼랑 끝에서 카메라만 손에 쥐고 내려다 본 설악의 비경이자 한국의 비경은 이러했다.
신선암에서 바라본 설악의 비경
화면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공룡능선 천화대의 범봉이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자 천불동계곡과 멀리 속초시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암릉과 암봉이 꽃으로 보일까.
신선대(암)에 가려 모습 전부가 보이지 않는 범봉을 조금 당겨보니 이런 모습. 멀리 마등령으로 가는 능선이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다. 아직 단풍은 1200고지 정도에 머물러 있는 풍경이다. 범봉은 암벽 클라이머들을 유혹하는 명소지만 천화대 리지를 부르는 명칭은 달라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천개의 꽃이 피어난 길'이라 지칭하는 사람들도 있고 천화대(天花臺)의 한자를 직역하여 '하늘에 핀 꽃밭'이라 지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신선대에서 바라본 천화대 모습은 공룡능선에서 바라본 것과 사뭇달라 신선이 살고있는 하늘나라 내지 극락세계 같은 유토피아의 연화세상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암벽 등반가들은 그곳을 가기 위해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범봉의 꼭대기에 올라서 본들 신선암에서 느끼는 것만 할까.
신선암 봉우리의 좁은 암릉에 아슬아슬하게 기대거나 엎드리거나 또 서서 외설악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속으로 감탄만 하고 있는 것이다. 년중 단 하차례만 연출되는 비경을 용케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신선대 봉우리 끄트머리로 조금더 이동해 범봉을 바라봤다.
이제 범봉이 발아래도 보이고 멀리 공룡능선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마등령과 공룡능선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악의 비경이자 한국의 비경이 눈 앞에 펼쳐져 보이는 것이다. 가히 신선이 노닐만한 곳이라 여겨지는 곳. 먼저 신선대로 길을 나선 아내도 넋을 놓고 발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은 그림찾기...신선대 꼭대기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서 아내가 천불동계곡을 내려다 보고있다. 산에 미친 여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랄까. 1년 만에 처음 보여준 이모습을 보자마자 이틀 전 아내는 당장 짐을 꾸려 설악산으로 가자고 졸라댄다. 마법같은 지독한 이끌림이 당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형체는 자연 속에 녹아 몰아일체의 경지를 이루며 혼백을 불러내는 곳.
그곳이 신선대에서 바라본 천화대 범봉의 모습이었다. 천.하.절.경!!...
필자는 암릉의 벼랑 끝에서 나직히 쪼구려 앉아 천불동계곡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 설악 구절초가 말 없이 반겨주고 있는 곳.
설악은 그 누구일지언정 한 번 보는 순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영혼의 안식처인지.
아내와 아우님이 신선대 정상으로 이동하는동안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상은 늘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으므로 또 언제 다시 이곳을 찾게될지 모르는 것. 그러나 신선대에서 연출된 비경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벼랑 끝으로 겨우 이동한 신선대 정상에서는 외설악의 진풍경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신선대가 왜 신선대라 불리우는지 확인시켜 준 곳. 그 귀한 장면은 다음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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