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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갤러리/도시락-都市樂

방화수류정의 낮과 밤 이렇게 다를까


-방화수류정에서 길을 잃다-




참 아름답다!...
 


수원 화성의 화홍문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은 마치 연인들 처럼 정답다. 둘 중 하나만 빠져도 한 짝을 잃은 것 처럼 허전할 것. 둘은 서로 떼 놓을래야 떼 놓을 수 없는 찰떡궁합. 이곳에서 길을 헤맷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듯 방황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7일 일이었다. 길을 잃게된 사연은 이랬다. 




방화수류정의 낮
(晝)





수원 화성의 백미라 일컫는 방화수류정. 용연(龍淵)에서 올려다 본 3월 중순의 방화수류정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수원성곽을 축조할 때 세운 누각 중에 하나인데 특히 경관이 뛰어나 방화수류정이라는 당호(堂號)가 붙여졌다. 수원성의 북수구문(北水口門)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쪽에 인접한 높은 벼랑 위에 있는데 그 아래에는 용연이라는 인공 연못이 있다. 




방화수류정은앞면 3칸, 옆면 3칸의 아(亞)자형 평면구조이며, 지붕은 8각지붕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더 세워 십(十)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삼절병통(三節甁桶)이 얹혀 있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정명도(程明道)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그 이름을 따왔으며, 현판의 글씨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 썼다. 용연 앞에서 방화수류정을 올려다 보는 순간 방화수류정 아래 작은 오솔길이 눈에 띄었다. 그게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일행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방화수류정을 돌아보다가 일행들의 목적지라 여긴 화홍문을 둘러가 보기로 한 것. 화홍문 아래 작은 오솔길을 돌아 용연을 내려다 본 후 북암문을 거쳐 화홍문으로 가면 최종적으로 만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조금 돌아갈 뿐 시간은 큰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혼자만의 생각.




용연에서 화홍문으로 빠져나가는 수로 석각이두(石刻螭頭)를 마지막으로 일행을 만난 시간은 꽤 오래걸렸다.




용연 옆에서 방화수류정을 올려다 보는 순간 마치 용솟음이라도 하듯 멀리서 비행기가 솟구쳐 올랐다.




보기 드문 광경...




운이 좋았다. 하필이면 용연 옆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하다니...




동시에 일행과 멀어지고 있었던 불운?...




3월 중순의 용연 곁에서 생강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용머리(용두,龍頭) 바위 위에 이르자 멀리 동북포루가 아름다운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이 아니라 걸작품을 보는 듯.




다시 용연을 들여다 보니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용두에서 용연을 내려다 보며 방화수류정을 건축한 선조님들을 생각해 보니 참 대단하다는...




방화수류정을 지을 때 용연이라는 인공적인 연못을 파지 않았드라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궁합 이상 뭔가 하나 빠진 듯. 절묘한 궁합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방화수류정을 수원 화성의 백미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그 중 용연을 빼놓고 방화수류정의 백미를 말할 수 없을 것,




작은 오솔길에서 올려다 본 방화수류정은 용연을 굽어보고 있었다.




소나무 사이로 들여다 본 방화수류정...





용연에서 방화수류정 사이에 조성된 작은 언덕(용머리(龍頭) 바위 위)에 소나무가 없었다면 또 얼마나 황량했을까. 붉은 빛깔의 적송은 방화수류정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 오솔길에서 방화수류정을 올려다 보고 또 용연을 번갈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 이런 장면을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특히 달밤에 이런 풍광을 보고있노라면 세상 시름이 다 잊혀질 법 하다.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아름다운 경관을 살려 반월형의 연못을 조성하고 그 가운데 인공 섬을 조성했다. 방화수류정과 용머리바위, 그리도 용연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이곳. 달이 떠오르면 '용지대월'이라고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정조대왕이 화성의 성곽을 축조한 뒤에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 '화성성역의궤'에는 용연에 배 1척, 만석거에 2척을 배치하였다고 하는데, 소정1척(길이 32척 너비 8척 5촌)과 소소정 2척(각 길이 23척 너비 6척 5촌)의 값이 100냥 가량 들었다고 했다. 배를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들도 자세히 기록.  만석거에는 소정 1척과 소소정 1척을, 용연에는 소소정 1척을 띄웠던 것이다. 길이는 약 7미터, 넓이는 약 2미터짜리 배이다. 그러나 지금은 만석거에도, 용연에도 배가 없다. (참고자료: e-수원 김우영 주간)




또 어느 한순간 필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두를 따라 북암문을 통해 방화수류정에 다다라 일행들을 살펴보니 흔적도 안 보이는 것. 어디로 갔을까...




방화수류정에서 사방을 살펴봐도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방화수류정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한 시민...




북암문에서 동북포루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주말을 맞이해 시민들이 성벽밟기를 하고 있는 모습




방화수류정에서 북암문을 나서면서 괜히 신경쓰였다. 일행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




방화수류정에서 화홍문 앞을 거쳐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전화를 했다. 




안 받았다...그리고 화홍문을 돌아 올려다 본 방화수류정...정말 아름다웠다. 방화수류정은 군사용어로 동북각루로 불리는 곳.




그러나 방화수류정은 군사적 시설이라기 보다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걸작품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높은 절벽 위에 지은 철옹성도 아니고 나지막한 벌판 언덕 위에 지어놓은 수원 화성...그리고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비록 이곳에서 길을 헤맷지만 덕분에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을 보다 더 꼼꼼히 챙겨볼 수 있었던 것.




다시 맨 처음 용연을 끼고 있는 용두 위의 오솔길(그림 속, 한 아주머니가 오르고 있는 오솔길)로 나서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어디있어요. 여기 다 기다리고 있는 데..."




(흠...나 여기서 화홍문 삼매경에 빠져있는 데...^^ )

 



방화수류정의 밤(夜)





야간에 둘러본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밤에 둘러 본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낮에 둘러 본 모습과 전혀 달랐다. 낮과 밤이 자연스럽게 연출한 풍경 때문. 이날 달은 그믐을 향한 하현달이었지만 그래도 운치는 있었다. 야간에는 방화수류정에 오르지 못했지만 방화수류정에서 용연을 내려다 보면 용연에 비친 달그림자는 '용지대월'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 낼 것 같았다.

수원 화성의 두 얼굴이자 방화수류정의 두 얼굴이 주야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 때 마침 달 한 조각까지 걸렸으니, 어찌 시름을 잊지않을 수 있겠나. 
비록 삼각대를 갖추지 못해 장노출 씬을 찍지 못했지만 간접광을 이용해 찍은 방화수류정의 밤의 모습은 낮에 본 방화수류정의 모습과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방화수류정의 밤의 풍경은 이랬다.









































































수원 화성의 화홍문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은 마치 연인들 처럼 정답다. 둘 중 하나만 빠져도 한 짝을 잃은 것 처럼 허전할 것. 둘은 서로 떼 놓을래야 떼 놓을 수 없는 찰떡궁합. 이곳에서 길을 헤맷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듯 방황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7일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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