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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에 놀란 고달사지의 용트림


Daum 블로거뉴스
 


봄볕에 놀란 고달사지의 용트림
-용의 발톱을 보고 눈물 글썽인 남자-



인연(
因緣)은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일까...


2박 3일간 즘골 투어는 마치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즘골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어느 골짜기. 우리는 그곳에서 2박 3일 동안 행복했다. 그러나 그 누군들 우리가 즘골에서 2박 3일간의 시간을 봄볕 속에서 보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전혀 예상한 바도 없었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수원으로 다시 수원에서 여주로 이동해 즘골에 머문 것도 기이한 일이었지만, 무엇 보다 즘골에 머무는 동안 고달사지를 찾게 될 것이란 생각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즘골에서 고달사지는 가까웠다. 그러나 고달사지나 즘골이 제아무리 멀리 있다고 해도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인연은 그런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2박 3일은 그렇게 인연으로 맺어졌다가 인연이 다해 회상 속에 머물고 있는 것. 




어쩌면 우리는 오랜 과거의 인연에 떠밀려 즘골에 머물렀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가 고달사지를 방문하게 된 건, 인(因)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며, 연(緣)이 도와주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일깨워 준 건 문화재답사 전문가 하주성님의 탄식이었다.

"난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이런 거 보면 눈물이 나..." 





원종대사탑비에 새겨진 용의 모습을 보고 탄식한 것. 고달사지로 우리 일행을 안내한 사람은 하주성님이었다. 우리 일행 중에 그가 없었다면 고달사지는 둘러볼 엄두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아우님과 즘골의 아름다운 봄볕이 없었드라면 고달사지가 지척에 있었던들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었겠는가. 인연은 그런 것이었다. 인과 연이 어느날 만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저 추억 속에 남는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만남 속에서 고달사지의 추억이 없었다면 도화지 위에 겨우 밑그림만 그렸을 정도였을 것. 2박 3일의 그림을 완성시킨 건 고달사지에서 꿈틀거리며 용트림을 하고 있었던 원종대사탑과 고달사지 승탑과 원종대사탑비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솟구칠 것 같이 역동적인 용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즘골과 고달사지가 행복한 인연과 추억을 만들어 준 것. 그 현장으로 가 본다.



봄볕에 놀란 고달사지의 용트림





고달사지로 가는 길. 우리는 어린 단종이 유배지로 떠난 길을 따라 고달사지로 가고 있었던 것. 봄볕은 따사로웠다. 맨 앞에 문화재답사 전문가 하주성님 그 다음에 도예가 김원주님 그리고 시인 정덕수님...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일대는 빈 집이 많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집을 버리고 도회지로 다 떠났다. 인연이 다한 것. 폐가 뒤로 고달사지가 슬쩍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그곳에 재밌는 풍경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치 구둣솔을 뒤집어 놓은 듯. 하주성님은 그것을 가리켜 '신터래기봉'이라고 했다.




신터래기봉은 이런 모습. 작은 흙무덤 같은 곳에 소나무가 빼곡하다. 마치 구두를 닦을 때 사용하는 솔 같은. 그래서 그런지 신터래기봉은 그럴 듯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고달사에 머물던 스님들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신발을 이곳에서 털었다나 뭐라나. 믿거나 말거나 다소 황당한 전설은 그랬다. 신터래기봉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고달사지에 이른다.




길을 가다말고 바짝마른 부들에 눈이 갔다. 부들은 봄 바람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400년된 고목이 버티고 서 있는 입구에 서면 고달사지가 눈 앞에 나타난다.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컷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을 거치면서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고달사로 불리게 된 건 이 사찰의 석조 문화재를 만든 고달(高達)이라는 석공의 이름을 붙여 지은 것. 




그는 이곳에서 도를 이루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연한 불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가족들이 굶어 죽는줄도 모르고 불사에 정진할 정도였겠는가. 고달은 석가모니 부처와 특별한 인연을 가졌던 것인지. 그가 정과 망치로 다듬은 석조물들은 당장이라도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그게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만 가능할 것인 지.

 
"난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이런 거 보면 눈물이 나..." 




고달사지에 깃든 불심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주성님의 말 처럼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을 것. 그는 홀홀단신 이곳에서 주야장천 화강석을 다듬고 있었던 것. 그게 훗날 대한민국이 보물로 지정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않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골짜기에는 그런 보물과 국보 4점이 봄볕을 머리에 이고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형...그것도 병(病)이야. 하하" 
 

하주성님이 탄식처럼 내뱉은 말에 농담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 병(?)은 참 아름다운 불심이자 우리 문화재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의 결정체였다. 고달이 고달사의 터를 닦았다면, 후세의 누구인가가 그 터를 지켜내는 사람도 필요했을 것. 인연은 그런 것이었다. 
 




고달사지 옆으로 나 있는 수로에 봄이 깃들었다. 지난 3월 18일의 일. 
 



보물 제7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그곳에서 맨 먼저 만나게 된 건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 원종대사의 성은 김 씨이고 자는 도광이다. 고려 역대 왕실의 후원으로, 고달사를 당시 제일의 사찰로 일군 고승으로 알려졌다. 원종대사는 23살에 송나라로 들어가 고승대덕을 찾아다니며 법을 배우고 52살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귀국 후 여주 고달사에 주석했는데,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배움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 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 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 받침돌을 네모 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문화유산이 보물로 지정된 해는 
1963년 1월 21일이었다.원종대사탑에 새겨진 4마리의 용을 보자마자 긴 잠을 깨운 봄볕에 놀라 용트림을 하는 듯한 느낌. 매우 섬세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는 탑이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된 탑은 처음봤다. 그만큼 우리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뜻. 이번에는 원종대사탑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한 '여주 고달사지 승탑'으로 가 볼 차례. 그곳에서 다시 놀라게 됐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으로 가는 길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고달사지 승탑은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고달사지 승탑은 그동안 고려시대 초기인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종대사혜인탑으로 알려져왔으나 그보다 100년 가량 앞서 세워진 원감대사의 묘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기단부의 일부가 사각의 평면이면서 중대에 용과 구름 무늬를 새긴 점이나, 지붕에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잘 이룬 기법이 신라 하대의 조형양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화강석에 섬세하게 조각된 이 작품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대신 셔터만 눌러댓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돌을 떡 주무르는 듯한 이상 점토를 매만지며 만든 조각품 같은 것. 그저 감탄만 연발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모습!!...






















돌아서는 길...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본 고달사지 승탑. 고달사지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은 또 어떤 감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두 보물과 국보를 만나고 고달사지로 이동하는 길에 푸른 솔길이 정겹다.



솔길이 끝나자마자 고달사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두 점의 보물을 만나며 감동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이방인을 마중나온 바둑이...언제봐도 귀연 녀석 ㅋ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 기슭의 고달사지 윗편으로 이동하는 흙길. 흙을 쌓아 고달사지의 유실을 막고 있다.




흙으로 쌓은 작은 언덕 너머로 조금 전 우리가 다녀온 보물과 국보가 위치한 곳. 먼저 이동한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라는 진귀한 문화유산. 참으로 놀라운 조각품이었다.


보물 제6호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귀부 및 이수)는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렸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 쓰여진 문화유산 관련 자료의 출처는 <문화재청>이다. 관련 자료를 참조하며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를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문화재답사 전문가인 하주성님은 이 유산 앞에서 탄식을 했다. 그는 탑비에 숨겨진 용의 발톱을 보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지...왜 전에는 용의 발톱을 보지못했을까..."











그는 이 조각을 완성한 석공의 노력 만큼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귀부 및 이수)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 앞에서도 그동안 '용의 발톱'을 보지못한 것. 그러면서 당신은 미리 언급한 탄식으로 "난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이런 거 보면 눈물이 나..." 라고 말한 것이다.

당신은 용의 발톱을 보며 감동을 한 것. 용의 발톱은 봄볕을 머리에이고 당장이라도 용트림을 할 것 같은 자세...왜 이런 작품을 이제사 보게 됐는지. 이것도 인연일 것. 그 누구도 세상일은 잘 모르는 것. 인연이 닿기만 하면 행운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잘 찾아보시기 바란다.^^

 




용의 발톱과 관련된 재밌는 기록. 부처의 세계는 절대평등의 세계란다. 부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잠자리나 개구리가 넘보지 못할 용은 없다. 그런데 부처의 세계에서 속세로 옮겨오면 딴판이다. 한국·중국에서 용은 절대권력인 왕의 상징이었다. 임금의 얼굴인 용안, 임금이 앉는 용상, 임금이 입는 곤룡포 등등. 조선 건국에 기여한 여섯 왕의 공덕을 찬양한 최초의 훈민정음 작품 이름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이런 정도는 많이 들어봤을 것. 그러나 '용의 세계를' 살펴보면 더 재밌다.
 

용의 세계에도 서열이 있다. 발톱(발가락)의 수가 많을수록 높다. 왜 발톱이 기준인지는 용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용은 아홉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몸통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 위압감을 줄 만한 구석이라고는 발톱과 주먹뿐인데 용에겐 주먹이 곧 발톱이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에는 국왕은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 왕자는 사조룡, 왕세손은 삼조룡으로 차별화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면 곤룡포의 가슴 부분 흉배에 오조룡이 선명하다. 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근정전에는 칠조룡까지 등장한다. 따라서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는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의 발톱 때문이다. 하주성님은 용의 발톱을 발견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것. 그 의미를 유추해 보면 누군들 감동하지 않을까. 
 























난 생전 돌에 새겨진 용이 용트림을 하는 듯 역동적인 모습은 처음 봤다. 당장이라도 화강석 조각을 떨쳐버리고 승천할 것 같은. 이런 작품은 고달사지에서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귀한 체험이 아닐까. 한동안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귀부 및 이수)에 머문 이유는 주로 그랬다. 마치 살이있는 듯한 조각품. 그리고 또 하나의 보물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驪州 高達寺址 石造臺座)...
 








보물 제8호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




고달사지의 석불대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복판복련화문-겹꽃잎의 연꽃이 위로 향하고 있는 무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아래 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주 고달사지 경내 가장 중앙에 놓여 있는 이 대좌는 보존 상태가 완벽하여 불상 없이 대좌만 남았는데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달사지의 전설
 




고달사지에는 '도에 이른 석공의 전설'이 있었다.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된 고달사는 혜목산 자락 사방 30리가 절터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번창했던 절이었다. 고려 초기 3대 거찰 중 하나로 당시에는 고달원.고달선원으로 불렸다. 석불좌를 비롯한 고달사에 있는 석조물들은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석공은 절의 석조물들을 만드는 데 혼을 쏟느라 가족이 굶어 죽는 줄도 몰랐다고 전해진다. 불사를 위해 가족을 돌보지 못한것. 가족을 돌보지 못한 것을 알게 된 고달은 비통해 하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고 한다. 훗날 고달은 크게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었는데 '고달사'라는 이름은 이 석공의 이름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전설이다. 

우리는 따스한 어느 봄날 고달의 혼이 깃든 고달사지에서 고달을 만나며 행복해 했던 것. 인간사 자연계는 무엇이든 하나 밖에 이룰 수 없는 것인지. 즘골과 고달사지가 만들어 준 인연 한 자락 만으로도 세상 맛을 다 본 것 같다. 그 인연 뒷편에는 고달과 같은 애닲은 눈물과 피와 땀이 있었던 것. 그게 인과 연으로 엮어졌다니.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본 커다란 석조물. 큰 화강석을 파 내 마치 욕조처럼 만든 조각품. 하주성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석조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은 고달사로 예불을 하러 갈 때 손을 씻는 등 몸을 청결하게 하는 용도로 쓰여진 것 또는 취사용(쌀을 씻는 등)으로 사용됐을 것이라 등 추측을 했다. 오늘날 욕조와 너무도 닮은 모습. 석조물 네 모퉁이(상면 모서리)에는 연꽃잎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표현해 놓기도 하고, 석조물 아래 부분에는 배수공을 뚫어 물이 빠지도록 만든 정교한 작품.
  



그런데 고달사지를 돌아서면서 이 석조물이 욕조로 사용되었겠다는 생각(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석조물이 위치한 장소 바로 옆에 도랑이 있었으므로 굳이 여러 사람이 사용할 물을 가두어 둘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 그리고 음식을 취사 할 때도 도랑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 게 훨씬 더 나아보였다. 따라서 이 석조물은 고달사의 창건 당시의 (왕실의)권위를 참조하면, 왕실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기 위해 목욕재계용으로 만들어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최첨단)욕조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 것. 




그리고 또 하나의 석조물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자료가 남아있다면 모를까 자료가 없으니 상상은 자유. 여름에 사용한 돌침대 혹은 떡을 칠 때 사용한 떡판 등 상상은 마음대로였다. 그런들 어떠하리. 우리는 어느 따스한 봄날 인연에 따라 인연을 만들고 인연에 따라 2박 3일간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다시 아우네 집이 위치한 즘골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은 단종이 슬피울며 청령포 유배지로 떠나던 역사적인 길. 한 사람은 이 길을 따라 유배지로 또 한사람은 고달사지에서 불사에 혼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같거나 비슷한 장소에서 서로 인연을 만들고 허물어 뜨렸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즘골로 돌아가는 즉시 또다른 인연 만들기(?)에 돌입했다.즘골과 고달사지가 만들어 준 소중한 인연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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