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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GONIA

로스라고스의 봄, 바둑이도 설레게 한다

Daum 블로거뉴스
 


로스라고스의 봄, 바둑이도 설레게 한다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신의 그림자-



神은 죽었다고?...



 #1.PUERTO VARAS,  LOS LAGOS CHILE


오래 전 금쪽같은 아들래미가 내게 물었다.


"아빠!...하느님이 정말 (살아)있나요?...진짜로 요..."

아들래미의 눈동자를 보니 잘 못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녀석은 너무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서슴치않고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럼!...당근이쥐!!...하느님은 우리 곁에서 늘 우리의 삶을 굽어 살피고 계신단다."




아들래미는 '아닌 것 같은 데'라는 표정 정도 지을 줄 알았지만, 애비의 한마디를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녀석은 애비의 종교관에 대해 이해 할 수 없었거나, 하느님은 늘 살아계셔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세시는 분' 정도로 알았을 것. 아이들이 어릴 적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 그러나 적지않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마음대로 창조해 낸 '종교사업' 때문에, 아들래미의 물음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매우 심오한(?) 질문이 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빠따고니아 여행기를 끼적이면서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교 이야기' 내지 '神의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 들게 됐다. 필자가 아들래미 한테 자신있게 대답한 건 '신은 살아있으되 종교는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아들래미는 한 때 자기 아빠가 툭 하면 유교경전이나 바이블 속의 '말씀'을 들먹거리는 게 마음에 걸렸는 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신이 엎치락 뒤치락 자리를 바꾸고 있었으므로, 아빠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으나 세상은 아빠의 생각과 많이도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래미는 물론 이 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열심히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하루종일 기도해 봤자 하늘의 응답은 없는 대신, 바로 곁에서 권력에 편승하여 '줄을 잘 서는 것이 능력'이라고 판단되면 하느님은 뒷 전. 인간의 잔꾀가 횡행하는 시대에 '하느님의 존재'를 말하는 건 어리석음 그 자체나 다름없었던 것.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어느날 '신은 죽었다'라고 하는 순간 스스로 '나는 바보다'를 선언하게 된 줄도 모르 듯, 세상 사람들은 오래 전 니체의 선언 이후로 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대신 신약과 구약을 요리조리 처방해 가며 금세기를 농락한 특정 교회의 목회자들은, 착하디 착한 사람들을 강대상 앞에 모아놓고 여전히 '신의 존재'를 말하며 바이블 장사를 해 오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서로 달랐다는 말이자, 예수의 13번 째 제자 구실을 톡톡히 한 것.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수수께끼로 묻혀있던 남미대륙의 모습이 서구사회에 널리 전파되지 않았을 때 신봉하던 구닥다리 가치였다. 세상 모든 것을 아는 듯 몰랐던 바보(?)들이 써 먹던 편협했던 교육 방식이자 문화의 한 단편이랄까.





우리가 잘 아는 니체는 19세기에 독일에 살았던(생몰연대 1844~1900) 철학자였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까지 사람들은 니체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창조주)하느님을 가르치던 독일의 예배당은 텅비게 되었다. 인간의 '똑똑함'이 '하느님'을 물리친 것. 그게 훗날 파시스트들에게 칼을 쥐어주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신은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신의 형상'이 어떤 것인 줄 도무지 몰랐거나 똑똑한 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결과가 낳은 모순 내지 비극.
 
같은 시기 남미의 안데스 자락에서는 니체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여성이 살고있었다. 그녀가 필자의 '150일간의 빠따고니아 투어' 여행기 서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이라는 필명을 가진 시인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1만여 년 전부터 바이칼 호수에서 베링해를 거쳐 북미대륙과 중남미 대륙 끝까지 진출한 몽골로이드의 피를 수혈(?)한 유럽의 이민자 혈통이었다.

 


 
비록 그의 선조들이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살았을 지 모르겠지만, 안데스에서 태어난 그녀는 젊은 땅 안데스와 남미의 기운에 충만했던 여성이었다. 그녀의 선조들은 니체의 철학에 탐닉했지만, 대서양을 건너 남미에 정착한 선조들과 그녀는 곧 니체를 버리게 됐다. 시쳇말로 니체는 '입만 살아있는 철학자'였을 뿐 더도 덜도 아니었다. 만약 니체의 말이 맞았다면 그녀의 선조들은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 다시금 고향땅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니체가 죽었다고 한 신이 안데스 자락 도처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신들은 도포자락이나 장삼자락을 걸친 인간의 또다른 형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형용사를 두른 '신의 그림자'였다. 신의 그림자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그녀 곁에 머물고 있었고, 그녀가 비탄에 빠져 허우적댈 때에도 그녀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 오래 전 아들래미가 필자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물어왔을 때, 어렴풋 하게 알게 된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말해 준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 지.^^




필자는 니체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인 내지 유럽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칠레의 '로스 라고스' 주(州)의 '뿌에르또 바라스'에서 다시금 그 장면을 마주치게 됐다. 바둑이 두 마리가 한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핀 꽃 곁에서 누구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참 재밌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들 바둑이가 기댈 곳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그림자였으며, 아름다움에 눈 뜬 또 다른 신의 피조물 아닌가.

신이 인간을 쪼물딱거려 만들었다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그 어떤 피조물 또한 신의 손길이 닿았을 것. 바둑이도 그랬다. 니체는 스스로의 논리를 통해 철학이라는 학문을 지켰는지 모르겠다만, 그는 사물의 한 단면 밖에 모르는 사시 장애자였거나 모순 투성이의 철학자였을 것.




 #2.PUERTO MONTT,  LOS LAGOS CHILE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 속에는 현실 속에서 찾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것들(그리움)을 찾아 (무작정)떠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그 걸 가리켜 충전이라고 말한다. 배터리가 다 방전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 몸 어느 구석에 플러그를 꽂을 만한 구멍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있다. 그게 '오감'이란 것. 

여행을 떠나든지 소풍을 떠나든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은 이유가 있을 것.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는 '충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상 속에서 모두 방전된 기운을 산이나 바다 또는 강 등지에서 되찾아야 하는 것. 배터리 용량이 적은 사람들은 거의 매일 충전을 되풀이 해야 할 것이며, 배터리 용량이 큰 사람들이나 방전 이유가 적은 사람들은 충전 시간도 길어서 여행이 길어지기도 할 것이다. 오감의 촉수를 통해 세상에 널린 아름다운 기운을 충전해야 살아가는 힘이 생길 것.

사람들 마다 차이는 있을 지언정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지 않을까. 참 미안한 표현이지만 필자의 모국이자 고향이며 여러분들의 태가 묻힌 이 땅은, 거의 매일 충전을 거듭하는 사람들이 살기에 부족한 땅이라는 판단.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사람들을 포근히 안아줄 공간이 대부분 사라지고, 그곳에는 현대문명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다. 강줄기는 댐과 수중보로 다 막혀있고, 바다로 나가 스케치를 해 보려고 해도 작은 프레임 속 어느 부분에도 현대문명의 흔적이 묻어난다. 너무 황폐해져 있다는 것.
 

PUERTO MONTT,  LOS LAGOS CHILE













그런 사정은 전국의 유명한 산이라는 산, 섬이라는 섬 곳곳에 문명의 흔적들이 번갈아 가며 발도장이 안 찍힌 곳이 없다. 더 갈 곳이 없거나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 필자가 포스트를 주로 발행해 온 <다음뷰>의 여행 카테고리가 어느날 사람들의 시선 바깥으로 벗어나 있는 거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그곳에는 전국에서 송고해 온 유무명 여행지의 소식이 어판장의 생선들 처럼 널려있는 데 사람들은 하루에 100명도 채 클릭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었이겠는가. 뚜껑을 열어보나 마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


그나마 특정 블로거의 포스트를 포털에 노출시켜 본들 사람들의 감동지수(추천 수)는 매우 떨어지고 있는 모습. 그게 필자가 주장하는 '신의 그림자'가 사라진 모습 아닌가. 특히 최근 5년 동안에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강의 풍경을 찾아볼 수 조차 없다. 금수강산이라고 불리우던 대한민국의 강이 모두 재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인체에 비유하면 동맥과 정맥을 묶어 둔 형국. 온 몸이 새파랗게 질려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한 매우 위험한 모습인 것이다. 대지는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고, 땅을 적셔야 할 강물은 수중보나 댐에 갇혀 녹조류를 발생시키고 있는 형편인데, 그런 흔적을 겨우 피해 촬영해 둔 여행지의 모습이 감동이 있겠나. 마치 시름시름 앓는 중환자의 얼굴에만 분을 발라 증명사진을 찍어둔 듯 한 모습인 것.





그런데 필자가 (현재)끼적이고 있는 지구반대편 칠레의 '로스 라고스' 지역은 그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특히 봄이 되어 풀꽃들이 만발한 이 땅에는 생기가 펄펄 넘쳐나고 있었던 것. 오죽하면 뿌에르또 몬뜨 지근거리에 있는 뿌에르또 바라스의 바둑이들도 흐드러진 꽃 옆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겠는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 이들 바둑이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도시에 살고 있는 떠돌이개들도 무리지어 꽃밭을 돌아다니는가 하면, 풀꽃 냄새에 취한 바둑이는 '호접지몽'의 행복한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 곁에서 바둑이와 함께 꿈을 꾸고 있는 도시의 가난한 사람 조차 신의 그림자에 의지한 채 한 낮의 꿈을 꾸는 땅. 이 곳은 사시사철 방전 때문에 충전할 일이 없는 신의 땅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직 빠따고니아에 발 조차 담그지 않았는 데...


 



오래전 아들래미의 질문에 엉겁결에 대답은 했다. 그러나 그 걸 요즘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면, 대한민국(남한땅)에서는 답을 찾기가 쉽지않을 것. 그러나 지구별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빠따고니아 투어를 끝마친 지금은 아무때라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그게 비록 특정인의 주장사실이라 할지라도, 신이 살고 있는 땅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장차 되찾아야 할 대자연의 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

또 잃어버린 대자연의 모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아름다움을 되찾는 일은 일이자,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권을 누리는 일이다. 특권이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의 그림자를 영접하는 것. 그게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자 신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것. 만약 당신의 마음 속에 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않다면, 그저 화학적 반응으로 만들어진 한 개체일 뿐이라는 거. 얼마나 슬픈 일인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실지...

종교는 죽었지만
신은

내 곁에 있었다.

위 그림에서 노랗게 표시된 지역이 (여행기에서)필자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다. 두 주 후, 뿌에르또 몬뜨에서 빠따고니아가 시작되는 '오르노삐렌(Hornopiren)'을 정탐(?)한 후 빠따고니아 지역으로 출발하게 된다. 무거운 짐 훌훌 털고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 150일간의 빠따고니아 여행기는 계속 이어진다. 채널 고정!!...Feliz Año Nuevo, Feliz Navidad~^^*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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