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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예술촌,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 오래된 골목길

Daum 블로거뉴스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 오래된 골목길
-마산 '창동예술촌'의 작은 보고서-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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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한 아이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고 있는 곳은 마산 창동 네거리의 벼룩시장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창동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산은 오래 전 친구의 결혼식 때 방문한 이후 몇 번 거쳐지나갔을 뿐 연고도 없어서 기억에서 꽤 먼 곳이었다. 그리고 낮설기만 한 이 고장을 기억해 내게 만드는 건 아구찜의 본고장 정도였으며 3.15부정선거나 부마항쟁 등 민주성지로 기억되는 일은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 잠시 기억해낼 정도였을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로부터 '마산 아구찜'으로 더 오래 기억될 만큼 마산은 낮선 도시였다. 

오래전 이은상님의 노래 속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가고파'의 고장 마산은 '마산수출자유지역'이 활성화 되기 시작하면서 마산의 본 모습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마산은 더 이상 이은상님이 그리워 하던 청정지역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 산업화로 인해 1970~80년대 마산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창동 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어께가 부딪칠 정도로 창동은 번창했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수출자유지역의 업종전환과 섬유산업의 쇠퇴 등으로 마산인구가 감소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점점 더 뜸해지기 시작했다. 마산이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때가 대략 1990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마산은 주변의 창원과 진해 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는 데, 당시 마산의 인구는 52만 명 정도에 육박한 이후 점차 하향 곡선을 그리며 2011년 현재 (통합)창원시에 선두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창원시가 50만 명 수준의 인구로 증가한 반면 마산은 40만 명 수준으로 급감하며, 원도심권의 인구가 점차 줄어들며 도시공동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마산을 이탈하며 사람들이 북적이던 창동은, 밤중에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빈 집이 늘어나고 슬럼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창동은 1970~80년대 전국 7대 도시(구 마산시)의 명성이 사라지고 점차 유령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말,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서울에서 첫 차를 타고 마산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정확히 오전 10시 10분 경이었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지근거리에 위치한 창동예술촌에 들러 창동과 마산의 역사 등에 귀 기울이다 보니 창동은 더 이상 낮선 도시 낮선 골목길이 아니었다. 창동의 첫인상은 마치 서울의 인사동거리를 걷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창동예술촌을 거닐면서 '열 인사동 안 부러운' 게 창동의 변화된 모습이었다. 모처럼 창동에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창동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변해간 것일까. 




마산과 창동의 쇠퇴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도시의 확장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2009년 마산,진해,창원 시의회의 통합안이 가결되고 2010년 3월 2일 국회에서 '3개 시를 창원시로 통합'하는 법안이 가결됨에 따라 같은 해 7월 1일 창원시로 통합되면서 원마산(창동예술촌 중심) 도심재생을 위한 사업으로 '창동예술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태동된 창동예술촌은  도자기, 공예, 회화, 탱고, 조각, 초크아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 50명이 창원시가 제공하는 빈 점포(50개)에 무상입주(기간 2년)해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이들과 시민단체 등이 창동네거리와 예술촌에서 재능기부를 통해 시민들과 한데 어우러지며 공연 등 예술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슬럼가로 변했던 빈 점포에 예술혼이 넘쳐흐르며 생기발랄하게 변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팸투어에 나선 블로거 일행은 이성주님(창원시 기획홍보실장)으로 부터 창동예술촌의 연혁 등에 대해 브리핑 받은 이후, 이 지역 사학자인 박영주님으로부터 창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개관을 한 후 창동네거리 투어에 나선 것이다. 참 괜찮은 공간이었다. 그 사이 창동네거리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될까. 




사람들의 관심은 창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도시인들이 바쁘게 살면서 잊고살던 정겨운 흔적이 넘쳐나고 있었다. 늘 공장에서 생산되던 제품과 디지털(산업)에만 열광하던 아이들이 아나로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시간가는 줄 몰랐다. 마산이 오래 전에 간직한 소중한 추억들이 창동네거리에 쭉 펼쳐져 있었으며, 창동네거리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창동예술촌으로 그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지에서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의 행복지수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사람들의 표정만 보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지 아닌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늘 쫒기듯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그 흔한 미소 조차 발견해내지 못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여행자들도 그 도시나 여행지의 불행에 전염되어 쉽게 지칠 것이며, 여행지를 한시라도 바삐 떠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민관이 한마음이 되어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 창동예술촌은 달랐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에서부터 행복한 모습이 충만했고 창동네거리에 펼쳐진 벼룩시장은 밤늦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창동을 잠시 불행하게 만들었던 모습이 점차 걷히며 시민들로부터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는 것이다. 




단지 도시의 빈점포에 예술혼을 불어넣었을 뿐인데 생기발랄한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글쓴이는 창동예술촌을 돌아보는 동안 창원시 관계자에게 몇가지 제안을 할 정도였다. 도시를 재생하는 프로젝트가 지나쳐 창동의 본래 모습을 해치지 않을까 우려됐던 것이다. 서울 인사동거리의 경우 서울시가 지나칠 정도로 개발에 몰두하여 인사동에서 느낄 수 있던 옛정취는 모두 사라지게된 경험 때문이었다. 너무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관광지가 잃어버린 정감 때문이었는 데 창동예술촌에서는 아직 그런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을 잘 소개해 줄 수 있는 '해설사'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들 정도로 매력 넘치는 골목길이 즐비했다.
 



마산이 초행길은 아니었지만 기억에서 사라진 도시였는 데, 팸투어를 통해 창동예술촌 등의 매력에 새삼스럽게(?) 빠져들며 예찬론자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느낌은 창동예술촌 구석구석을 방문하면서 더욱더 증폭되고 있었다. 일행들이 그룹으로 창동예술촌을 방문하면서 그분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참 유익하고 행복한 추억을 남기지 않았나 싶다. 대한민국 어디를 돌아다녀도 예술가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쉽지않은 데 창동예술촌은 달랐다. 그분들이 일일이 투어에 나선 분들과 소통을 즐기며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 도심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체험이었다.




창동예술촌을 품은 창동네거리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꽉 찼다.




그런 궁금증들이 하나 둘 씩 모여 새로운 꿈을 꾸게 되고 낮선 도시는 어느덧 친근감으로 꽉 채워지게 된다.




세상에 널린 흔한 풍경일지라도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쉽지않다. 




그러나 창동예술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당신은 쉽게 이 골목길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마산에 들러 창동예술촌을 찾게 되면 그곳에서 오래된 골목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혼자가도 좋고 연인과 함께라며 금상첨화다. 그곳은 여행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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