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 모산재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 하산하는 길에 눈을 지그시 감고있는 모습의 기암괴석을 만나게 됐다.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남쪽이자 그곳은 서부경남의 오지 합천군 가회면의 대기저수지가 위치한 곳이며 발아래로 영암사지가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모산재 정상 부근에 위치한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 '무지개터'를 지나 모산재 정상에 다다르게 되면 하산하는 코스 대부분은 암릉으로 구성되 있다. 기암괴석 위로 하산길이 나 있는 것이다.
등산 중 맞은편에서 봤던 그 장면들은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었는데 하산길은 소금강 위를 바람 처럼 스쳐지나가는 황홀한 하산길이었다. 아직 단풍은 무르익지 않았지만 기암괴석 곳곳에 숨어살고 있는 떨기나무들은 어느새 울긋불긋한 옷을 갈아입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암릉 곳곳에는 잎이 새파랗게 돋아난 푸른솔이 그림 처럼 뿌리를 내린채 가회면 소재지와 영암사지 등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모산재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글쓴이가 맨 나중에 일행을 뒤따라 가게 됐는 데 그 이유는 관련 포스트에서 밝힌 바 있다. 모산재의 풍광에 취해 요모조모를 살피다 보니 자연 셔터음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모산재의 매력에 푹 빠져 일행을 놓친 것과 다름없었다. 멀리서 내려다 보니 일행들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벼랑끝에 매달리듯 납짝 엎드려 있는 소나무를 마주치게 됐는 데, 오랜 풍상에 뒤틀린 채 분재처럼 변한 소나무를 보는 순간 불현듯 해외 여행에서 느끼지 못한 묘한 느낌이 새록새록 되살아 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불과 석달 전 쯤만 해도 파타고니아 투어를 마치고 산티아고에 머물고 있었다. 파타고니아 투어를 통해 남미의 칠레는 우리와 매우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그냥 가깝게 된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산티아고에서 아예 시민권을 신청해 놓고, 칠레에서 얼마간 살고싶은 마음을 먹기도 했다. 파타고니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칠레가 가진 자연 경관에 푹 빠져 헤어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짬나는대로 가까운 안데스자락을 기웃 거리면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질적인 풍광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막상 그곳에서 (이주하여)살게된다면 무엇이 제일 그립게 될 것인지 두고두고 생각을 해 봤다. 후회할 일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은 <150일간의 파타고니아 투어>를 시작할 때 부터 마음속에 담고 있었는 데, 우리가 투어를 하는 동안 가장 살기좋다고 판단되는 곳을 점 찍어 두었다가, 그곳에서 살아보기로 마음 먹기도 했다. 세계 최고 청정지역 '파타고니아'를 품고 있는 칠레의 매력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말 파타고니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최고의 비경을 간직한 곳이자, 죽기전에 반드시 가 봐야 할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며 수려하며 생동감 넘치는 풍광을 갖춘 최고의 여행지였다. 그곳은 사계절 내내 이방인들이 발길을 향하는 곳이자 한 번 발을 디디면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않을 정도의 매력을 지닌 곳이었다. 그런 곳을 떠나 산티아고에 돌아오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이 시민권을 신청한 것이라면, 여행에 미쳤던 지, 칠레에 미쳤던 지, 파타고니아에 미쳤던 지 ,그것도 아니면 여행을 하다가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들이던 지...그 어느 경우의 수를 택일을 해야 옳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지에 살고있는 우리교민들의 생각은 우리와 전혀 달랐다. 파타고니아 투어를 끝마치고 맨 처음 출발지인 '뿌에르또 몬뜨'에 도착하여 우리 생각을 교민께 말하자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칠레에 처음 (여행)온 사람들은 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국같은 곳'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 예를 들었다. 얼마전 까지 한 '권사님(할머니)'은 10년 동안 이곳(칠레)에서 살았는 데 한국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그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는 데 "한국이 너무 살기 좋다"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교민의 증언(?)을 들으며 묘한 기분이 들며 키득거렸다.
칠레의 자연환경은 천국같을 지 모르겠지만 한국 생활에 익숙했던 할머니나 우리 교민들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불편한 곳일 지도 모른다. 칠레는 수도 산티아고를 제외하면 여전히 1차산업에 의존하고 있는 농경사회와 다름없기 때문에 여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지 교민이었던 한 할머니의 귀국 사례는 단지 불편한 것 때문만은 아니란 게 우리들 생각이었다.
그 할머니께서는 한국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늘 배산임수형의 터에 자리잡은 동네에 살았을 것이며, 연세가 지긋하시면 하실수록 농촌에서 사셨던 기억이 더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눈만 뜨면 보이는 게 텃밭이며 개울이었을 것이며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허리가 뻐근하여 허리를 펴는 순간 뒷동산과 앞산이 눈 앞에 어른 거렸을 것이다. 특히 봄이 되면 황매산 철쭉이나 소월의 시를 만든 분홍빛 진달래 때문에 점순이처럼 가슴이 설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가을날 추석을 맞이하여 조상님들이 묻힌 뒷동산에 올라 벌초를 돕는 등 산행을 할라치면 갈 바람이 실어온 솔향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할머니께서 어느날 아들 딸이 사는 서울에서 손자들을 거두며 살자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눈만 뜨면 아파트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아저씨를 보는 일이 일상이 됐고, 그 풍경이 너무 낮익어 뒷뜰 정자에 가 보면 맨날 자식 자랑에 빠진 '할망구'들 때문에 얼마나 속상했겠는가.
그때 칠레에서 귀국한 한 며느리가 "엄니, 칠레에서 사시면 넘 좋은 데..." 할머니는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었을 것이며, 어느날 교회에 나가 동료 권사님들 한테 "나...하느님께서 내 기도 들어주셨다. 할렐루야..."하며 자랑을 늘어 놨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웬걸. 막상 천국이라던 칠레에 도착해 보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우노 도스 뜨레스 꾸아뜨로 씽꼬 세이스...' 등 숫자는 물론 공부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았다.
당췌 말이 돼야지. 도무지 동네 구멍가게에서 과자 한 '봉다리' 살 수 조차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뒷산에 데려달라' 했더니, 며느리가 안데스자락에 있는 근사한 관광지에 모셔드렸다. 권사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 왜 진작 이런 곳에 와 보지않았던가. 야호 이곳이 천국일세 할렐루야 하고 좋았던 시간도 잠시였다. 안데스자락에는 빙하와 빙하가 녹은 강물이 연중 철철 넘치며 비옥한 농토를 적시고 있었지만 그곳에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뭔줄 아시나요?...영남의 소금강이라는 합천의 모산재를 하산하며 카메라에 담은 풍경 끄트머리에 마무리 글을 끄적여놨습니다. 먼저 모산재의 풍광에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
해외교민이 죽자살자 그리워 하는 풍경
(참 신기하죠?...병풍처럼 둘러쳐진 모산재 골짜기 한 복판에서 부터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모산재에서 유명한 '순결바위'를 측면에서 본 모습이다.
이곳이 그 유명한 '순결바위'인 데 쩍 갈라진 순결바위의 바위틈에 순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가면 입구가 조여든다는 전설이 있다. 참 무서운 전설이다.(흠...누가 이딴 전설을 만들어 놓고 이방인을 겁주는 지...ㅜㅜ) 글쓴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순결하지 않은 거 같아서 시험을 해 볼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안 들어 갔다는...어쩌자고...ㅜㅜ)
다음편에 등장할 영암사지의 모습이다.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흠...잘 보셨나요?...)
...권사 할머니께선 늘 봐 왔던 익숙한 풍경이 너무도 그리웠던 것이다. 할머니께선 그게 무엇인 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이 날뚱말뚱 했는 데, 천국같은 곳에서 10년을 사시다가 서울에 도착해 뒷동산 약수터에 가 보니 그 해답이 단박에 나왔던 것이다. 그건 할머니가 태어난 우리 땅 대한민국에 운명처럼 뿌리박고 사는 소나무였으며 솔향기이자, 날이면 날마다 올려다 봤던 나지막한 뒷동산과 앞산이었다. 글쓴이는 일행을 저만치 보내고 나서 잠시 칠레에서 떠올려봤던 환상에 젖어, 암릉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등 떨기나무와 야생화를 꽃피우는 등 우리민족의 모든 것을 간직한 우리 산하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던 것이다.
파타고니아 투어를 마치고 산티아고에 머물면서 지인(교민)으로부터 다시 권사님과 같은 향수병을 발견하게 됐다. 현지에서 아들 딸 잘 키우고 남들 만큼 돈도 벌었지만, 여전히 그리운 게 우리의 혼백을 잉태하고 낳아준 우리 산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천국같은 파타고니아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그 어느곳이든 '뼈와 살을 묻을 만한 곳'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그곳은 100년은 살아야 다 구경할 수 있는 기막힌 여행지였다. 그런 한편 산티아고에 머물면서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여전히 마음을 뒤흔드는 게 우리 산하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모산재를 하산하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천하 제일의 명당 '무지개터'를 간직한 모산재의 영험한 기운 때문이었을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그의 스승 무학대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은 '국사당'과, 잉카의 공중도시 마츄피츄처럼 어느날 우리 앞에 나타난 '영암사지'는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며 글쓴이의 발길을 붙들어 놓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