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제일의 명당 무지개터와 영암사지를 지닌 모산재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적지않은 분들이 모산재를 다녀가면서 무지개터와 국사당 및 영암사지에 대한 전설과 미스테리에 대해 궁금증을 더했을 것 같다. 글쓴이도 그 중 1인이며 관련 포스트를 통해 나름의 가설을 세워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런 호기심은 누구인가 해답을 내놓으면 눈녹듯이 사라질 텐데 당분간 영암사지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일반의 호기심을 더욱더 부추기며 궁금증을 증폭 시킬 게 아닌가 싶다. 영암사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천의 모산재를 등산하며 무지개터와 국사당에 이어 영암사지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그러한 궁금증은 얼추 답을 드러낼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근처에 널려있는 (발굴)유물과 관련 역사 일부를 대입해 보면 영암사지의 단서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모산재를 다녀온 이후로 그곳에서 촬영해 온 자료(사진)를 여러날 들여다 보며 궁금증 얼마간을 해소해 오고 있었다. 본 포스트는 관련 포스트의 완결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생각을 끄적인 단편일 뿐이다.
그래서 영암사지에 얽힌 미스테리는 학계 등 관련분야의 사람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좀 더 해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컨데 영암사지의 쌍사자석등이나 3층 석탑의 구조 등을 놓고, 단편적으로 영암사지를 이해하려는 것은 영암사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저 두루뭉술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전후에 창건한 사찰' 정도로 평면적으로 이해하면, 일반이 가진 궁금증에 대한 모독이라고나 할까. 모산재를 다녀오면서 느낀 천하의 명당 '모산재의 무지개터'에 얽힌 영암사지의 미스테리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목신이 일러준 무학대사의 X파일
모산재를 하산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국사당은 영암사지를 가일층 미스테리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지금은 다 허물어졌지만 조선을 세운 이성계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는 국사당터 안내문에는 무학대사의 자취를 기억해 낼 수 있는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태조 이성계를 말 할 때 그림자 처럼 자연스럽게 따라다니는 게 무학대사란 거 조선의 역사를 아시는 분들은 다 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스승이었다. 그래서 우선 무학대사의 생몰연대 등을 참고해 보기로 한다.
무학대사의 생몰연대(1327년~1405년)등은 이러하다. 그는 한양(오늘날 서울)에 왕궁 터를 정해준 조선건국의 왕사(王師)로서 이름은 자초(自超), 성은 박씨,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시호는 묘엄존자(妙嚴尊子), 탑호는 자지홍융 (慈智洪融), 호는 불교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러 더 배울 것이 없다는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 강보에 싸여 버려진 그를 학들이 둘러싸서 보호했다고 하여 무학(舞鶴)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흔히들 말하는 '도사' 수준에 이른 사람으로 이성계가 선문답놀이 등을 통해 한 눈에 그의 도력를 알아차리고 무릎을 꿇은 일화로 유명하다.
무학대사는 조선의 도읍지로 한양에 왕궁터를 정해준 이후 한양과 지방에 자운암,호압사,사자암,죽림사,간월암을 세워 조선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력을 발휘했는 데, 충북 영동의 백화산 반야사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무학대사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 지 실감케 한다. 반야사는 의상대사의 제자 상원이 창건(720년)한 절이나, 반야사에 있는 500년 된 배롱나무의 전설은 무학대사가 꽂아 두고 간 그의 지팡이가 어느 날 둘로 쪼개어지더니 뿌리를 내렸다는 마법같은 일이다.
글쓴이는 모산재를 하산하면서 일행들과 함께 영암사지를 둘러보고 서금당터를 지나 다음 투어길에 나서던 중 큼지막한 느티나무를 만나게 됐다. 포스트 맨 처음에 등장하는 두 장의 사진이 그 나무이며 안내문에 적힌 느티나무의 수령은 600년(살) 정도라 했다.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가 영암사지 곁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나서면서 "조선의 역사를 다 기억하고 있는 나무군..."하며 돌아섰다.
지금으로부터 6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1412년 정도가 된다. 조선의 건국 역사 등을 다 알고 있을 느티나무였다. 무학대사의 도력을 참조해 보니 어쩌면 이 느티나무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기 전 무학대사의 도력이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학대사의 X파일이 이곳에 숨겨져 있지않을까.
문화재청에 소개된 합천영암사지 기록 옳을까
영암사지를 돌아보는 동안 마음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암사지와 서금당터에 남겨진 유물의 흔적들은 주로 8세기 중엽의 통일신라 시대 당시의 유물이었으며, 서금당터에 남겨진 유물은 통일신라 시대 이전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의 유물로 판단되었다. 그 현장을 한번 둘러볼까. 우선 문화재청에 소개된 '합천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를 알아보도록 하자.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터·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삼층석탑·귀부·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경의 것으로, 절의 창건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영암사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었고 후면을 제외한 3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 서남쪽 건물터의 기단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석조물은 이색적인 느낌마저 준다.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문화재청에 소개된 '합천영암사지'를 참조하여 다시금 영암사지를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다. 마치 오래전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듯한 영암사지에는 화강석에 새겨진 매우 정교한 조각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했다. 그 장면들을 자료를 참조하여 자세히살펴보시기 바란다.
금당터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다 허물어 졌지만...
금당터의 면석을 잘 살펴보면 뚜렷이 양각된 조각이 눈길을 끈다.
화강석에 새겨진 조각품이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된 건 드문일이다. 그런데 사자라고 소개된 이 동물은 사자라기 보다 '바둑이'를 더 많이 닮은 듯 하다. 목 부위만 참조하면 '사자 갈기' 같은 데 꼬리와 귀를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나라 토종견 '삽살개'를 닮은 모습이다. 삽살개를 귀신을 쫒는 개로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금당터 면석 일부를 차지할 만도 하다. 특히 이 동물의 귀는 '응가견' 처럼 축 늘어져 있는 데 사자의 귀가 쫑긋 세워져 있는 것과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다.
금당터의 면석은 빙 둘러 불국토를 상징하는 연꽃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층석탑(보물 제480호)..."이 탑은 탑신부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금당 앞에 새로 세운 두 채의 건물사이에 서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돌의 윗면에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며 문화재청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영암사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이 나란히 영암사지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 "쌍사자석등은 보물 제353호로 높이 231㎝이다.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쌍사자로 간주석(竿柱石)을 대치한 이형(異形) 석등이다. 원래 법당지 앞쪽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인 탑 옆으로 옮겨놓았다.
비교적 높은 8각의 하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사자로 보이는 짐승이 1마리씩 양각되어 있다. 그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각된 연화하대석(蓮花下臺石)과 쌍사자가 놓여 있다. 갈기, 꼬리, 몸의 근육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뒷다리의 아랫부분은 모두 절단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화사석(火舍石)은 팔각형으로 4면에는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주위에 못구멍이 남아 있어 창호를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 1구씩을 양각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법주사 쌍사자석등, 청량사 석등, 해인사 석등, 백암리 석등 등에 조각된 사천왕상과 표현기법이 유사하다. 옥개석도 8각이며 밑면에는 1단의 넓은 굄이 각출되어 있고, 추녀 끝에는 귀꽃을 장식했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8엽의 복련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2단의 상륜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전성기의 석등보다는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며, 옥개석에 귀꽃이 장식된 것 등으로 보아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반출하려던 것을 주민들이 되찾아 가회면 사무소에 보관하다가 1959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영암사지의 삼층석탑과 함께 대표적인 유물 처럼 보인다.
그리고 금당터 안에는 불상을 모신 지대석에 겨우 한뼘 남짓한 크기로 조각된 팔부중상을 볼 수 있다.
너무 정교한 조각품이어서 가까이서 카메라에 담아보니 이렇듯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 하다. 아마도 영암사지가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면 그 자체가 커다란 조각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대략 여기까지 금당터를 둘러보며 자주 각인되는 키워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암사지는 대략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사찰이라는 것이며, 근거로 삼층석탑과 쌍사자석등 등 유물을 창건 연대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데 영암사지와 어께를 맞대고 있는 서금당터를 참조하면 영암사지의 창건 연대 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서금당터로 이동하여 그곳에 남아있는 귀부(돌거북,龜趺)를 살펴보며 '목신이 일러준 무학대사의 X파일'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금당터를 잠시 돌아보며 서금당터를 주목해 주시기 바란다.
금당터 한 곳에 모셔놓은 주춧돌을 보니 격세지감을 절로 느끼게 된다.
서금당터로 발길을 옮기면서 측면에서 바라본 금당터는 마치 천상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오랜 옛날, 금당터를 오르내리던 (왕실)귀부인의 치맛자락이 돌계단을 스치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금당터는 고대 가락국의 명당터
금당터나 서금당터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는 사찰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글쓴이는 문화재청에 소개된 '합천영암사지'의 자료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겠지만 영암사지(창건시기)를 8~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로 두루뭉술 정리하는 게 문제로 보였다. 쌍사자석등에 등장하는 동물(사자)이 어느 경로를 따라 이동했는 지 조차 알 수 없을 뿐더러,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과, 홍각선사비의 조각이 886년이라는 연대 만으로 영암사의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이 8세기 경에 제작된 것을 참조하여 창건연대를 살피는 건 더 큰 무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금동여래입상 제작 시기와 사용 장소는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발굴조사단 등 영암사지를 조사한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놓친 부분이 서금당터에 있는 귀부가 아닌가 싶었다. 일행은 서금당터에서 꽤 오래 머물며 섬세하게 조각된 귀부(龜趺)에 놀라고 있었다.
조각은 특이했다. 서금당터에는 2기의 귀부가 석조되어 있었는데 두 귀부는 서로 달라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듯 한 쪽은 남성적이며 또 한 쪽 귀부는 여성적으로 조각됐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황룡과 청룡이 법당를 애워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조각들의 특징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었다. 먼저 문화재청이 소개하고 있는 서금당터(합천 영암사지 귀부,陜川 靈岩寺址 龜趺)를 살펴보면 이렇다.
"이 귀부(龜趺) 2기는 영암사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 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절터 안에는 법당터를 비롯한 여러 건물의 기단(基壇)이 남아 있어 당시의 거대했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의 받침돌로, 원래는 그 위로 비몸돌과 비머릿돌이 얹혀져 있었을 것이나,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동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각형이고, 비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좌(碑座)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서쪽 귀부도 6각형의 등무늬를 배열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眼象)을,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귀부는 동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동쪽의 귀부에서는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다."
합천 영암사지 귀부는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경남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로 637-97 둔내리'에 위치해 있다. 합천 영암사지 귀부를 소개하는용에 따르면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로 인해 통째로 통일신라시대 때 유물 정도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개 글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거북을 뜻하는 '귀부'의 상징성으로 인해 영암사지의 창건 연대를 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거북(이)의 설화에 따르면 기린.봉황.용과 더불어 '4령'(四靈)이라 불린다. 옛 기록에 의하면 1,000살 먹은 거북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고 털이 난다고 할 정도로 영물이다.<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구지가 龜旨歌-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노래에서 거북은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을 드러내게 하는 동물로 나오며, 또한 <삼국유사>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의 <해가사 海歌詞> 내용에도 바다로 납치된 수로부인을 나오도록 하는 동물로 등장한다.
이외에도 거북에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는 매우 많다. 그 중 구지가는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 가요로 알려져 있으나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강림신화에 곁들여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귀부에 뚜렷하게 양각된 두마리의 물고기(입을 맛대고 있는 모습) 형상은 김수로왕의 무덤에 새겨진 <쌍어문>이 틀림없어 보였다. 쌍어문은 인도의 '쌍어 숭배사상'이 녹아있는 것으로 김수로왕의 황후인 허황옥이 인도를 떠나 중국을 경유하여 고대 가락국 까지 문화를 이어온 데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락국의 국호는 '가야' 혹은 '가라'를 사용했는 데 인도의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에서는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했다고 한다. 흥미롭지 않은가. 따라서 영암사지의 (서금당터)창건연대 등을 다시 써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가락국의 건국연대는 서기 45년이며 멸망시기는 서기 561년(진흥왕 22년)이다.
대가락국이 멸망할 때 까지 520년 정도의 세월을 경상남북도 일원에서 번영을 누린 게 김수로왕의 가락국이었던 것인데, 그 흔적이 서부경남 합천의 오지에 뚜렷하게 남아 통일신라시대 당시의 유물과 혼재된 한편,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흔적 까지 뒤섞여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락국의 건국 신화 등에 나타난 거북과 쌍어로 인해 서금당터 내지 영암사지의 역사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지않을까.
영암사지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면서 꽤 긴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가락국(가야국) 김수로왕과 황후 허황옥의 자취를 집대성한 김병모 고려문화원 이사장이 남긴 명언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만 그 비밀을 들려주는 법이다."라는 말이 귀에 솔깃하게 전해진다. 영암사지를 그냥 흘깃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낡은 유물에 불과해 보일 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금당터로 명명된 영암사지 한 쪽에 고대 가락국의 전설 내지 신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통째로 세세하게 잘 보존되어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보니, 모산재 자락에서 한가하게 잠자던 역사가 글쓴이의 영감을 일깨우며 행복한 시간여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그 시기가 대략 2000년 정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가락국의 한요정이 한 여행자에게 다가와 귓전에서 속삭이듯 시공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귀를 간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참 행복한 시간이다.
목신이 일러준 무학대사의 X파일
길게도 끄적거린 글을 다 읽어 내려오신 분들은 서금당터의 귀부가 참 소중한 유산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나 기록에 형편없이 부족한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서금당터의 귀부를 설명하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인 데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동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각형이고, 비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좌(碑座)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고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이 그러하다. 귀부의 외형만 참조한 소개 내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귀부를 살펴보고 있는 동안 이 석조물은 통일신라 시대 때 만들어진 불국사나 석굴암 등 유물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석조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돌(화강석)을 다룬 솜씨가 매우 섬세하며 여간 뛰어난 장인의 솜씨가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이다. 당시 이 석조물을 조각한 석공이 거북이와 용의 형상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작가는 거북의 몸에 용의 머리를 조각하고 여의주를 입에 물려둔 것이다. 거북이가 용이되어 하늘을 승천하는 형상, 그 형상이 오늘날 합천 영암사지 귀부로 불리우는 서금당터에 고스란히 남겨져있는 것이다. 이 걸 대충 겉핥기로 스쳐지나갈 것인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한 때 무학대사와 선문답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 적 있다. 그 내용은 참조해 보니 이러하다.
이성계 : "선문답 놀이라... 그렇다면 과인이 먼저 해보겠소이다. 어디까지나 농으로 하는 것이오? 허허허... 과인은 대사가... 돼지같이 보이오."
이성계 : "아니, 대사. 농이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돼지라 했는데 대사는 어찌 부처님 이야기를 한단 말이오."
무학대사 : "태상왕 전하, 빈도의 말을 들어 보시오소서. 무릇 돼지 눈으로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으로는 모든 것이 부처님 세상으로만 보이는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허허."
이성계 : ".....돼지 눈으로는 오로지 돼지만 보인다라...... 허허허허~!! 과연 대사의 말이 옳소! 이번에는 과인이 졌소이다. 허허허허..."
무학대사 : "태상왕 전하, 부디 노여움을 버리시옵소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것과 같이, 늘 노여움을 띠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니 세상이 모두 노엽게 보이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부디 노여움을 버리시고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너그럽게 보시오소서..." 이성계 : "..... "
서두에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의 생몰연대 등을 끄적이며 불교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러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를 무학(無學)이라 일컫는다 했다. 선문답놀이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참고해 보면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가지고 노는 정도 이상의 도사라는 걸 짐작케 한다. 그런 천하의 무학대사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 장차 조선의 땅이 될 산하를 둘러보지 않았다는 건 이상할 정도이다. 또 무학의 경지에 도달한 그가 천하제일의 명당터를 찾아내는 일 쯤은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웠을 지도 모르며, 이성계와 작당하여 조선을 건국할 정도였으면 고려는 물론 통일신라시대 등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지에 해박한 지식을 쌓고 있었음을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 그가 합천의 오지 중에 오지인 황매산 능선 끄트머리에 두 팔을 벌린듯 병풍같은 기암괴석을 두르고 있는 영암사지를 방문했다면 혀를 내둘렀을 법 하다. 그가 무지개터를 둘러 하산하여 귀부가 있는 영암사지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려 지팡이를 내려놓은 그 자리는, 가락국 왕실의 귀족들이 들락거렸을 유물들이 떡~하니 그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을 것 같다.
그곳에는 김수로왕의 릉에서 봤던 쌍어문(쌍어신앙은 인도에서 중국 사천지방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이동한 허황옥 일행에 의해 가락국으로 퍼지게 되었다.)이 석양에 빛나고 있었고 ,석양이 빛나는 그 장소에서 내려다 본 영암사지는 일직선 상에 놓여져 주야장천 서기와 서광이 서리는 천하의 명당터로 무학을 신경 쓰이게 만든 것이다.
또 영암사지의 쌍사자석등에서 법당을 올려다 보면 그곳은 가락국의 황후였던 허황옥이 떠나온 불국토(인도 아유타국)의 위치이기도 했다. 이미 통일신라에 의해 멸망한 대가락국의 흔적이 너무도 또렷하게 명당터에 남아있었으므로, 무학은 장차 조선을 건국한 이후 또다시 최영을 배신한 위화도회군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세인들에게 각인되는 걸 원치않았을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의 조건은 반드시 땅의 기운만으로 충족되는 게 아니었다.
망자의 혼백이 맑고 순진하여 명당터에 뭍히게 되면 그 기운이 자자손손 영향(발복,發福)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좋은 명당터라 할지라도 명당과 어울리지 못하는 주검은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게 그런 이치였다. 무학은 장차 느티나무가 될 지팡이 곁에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암사지에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일이 없도록 막아야 하는 했다. 그는 그럴듯한 수 하나를 남기고 모산재 영암사지를 떠났다. 그리고 600여 년이 지난 어느날 팸투어에 나선 블로거들 앞에 우리나라 제일의 무지개터가 나타났다. 그곳에 시설된 안내문과 인터넷 등지에 퍼진 세상의 소문은 이랬다.
"이곳에 무덤을 쓰면 임금이 태어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인근 마을에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치고 백성들이 굶게 된다고 한다. 어느 때인가 누가 여기에 무덤을 썼는데 고을 전체가 오랜 가뭄으로 고달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괭이와 삽을 들고 이곳으로 몰려와 무덤을 파헤치니 과연 바로 뒤이어 비가 쏟아지더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따라서 최근에도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최고의 명당자리지만 무덤을 쓸 수 없는 명당터라는 얘기다. 무지개터 바로 앞에는 물웅덩이가 있고, 그 앞에 전망이 활짝 트인 용마(龍馬)바위가 있어 비룡승천(飛龍昇天)의 형국이란다."
합천의 모산재 정상 부근에 위치한 (우리나라)조선 제일의 명당자리 무지개터에 얽힌 전설이 주로 이러하다. 좀 황당하지 않나. 무지개터에 얽힌 전설 하나만 참조하게 되면, 모산재 꼭대기에 명당이 있는 셈이자 영암사지가 명당터인 줄 꿈에도 모를 것이다. 무학대사의 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아닌가. 영암사지는 1984년 부산동아대 발굴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전 까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장소이자, 가락국 허 황후 등 귀족의 귀부.쌍어문 전설이 까마득히 묻힌 전설같은 땅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게 조선이 멸망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는 군사쿠데타가 유행불 처럼 번졌는 데, 합천을 고향으로 삼은 한 전직 대통령의 악명이 무학대사의 명당터 예언을 실감케 한다. 무릇 가락국의 흥망성쇠 등 세상의 흥망성쇠는 명당터와 맥을 같이하는 지. 혼백이 순결치 못한 주검이 명당터에 다다르면 나쁜 기운이 발악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무학은 조선을 도읍지로 삼을 때 영암사지를 피해 모산재 기슭에 국사당을 세우고 이성계의 안녕을 빌게 했다. 당신이 섬기던 태조 이성계가 선죽교에서 포은을 사살하는 피의 만행을 저지른 과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뒤 이은 왕자의 난 등 조선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 뒤에는 최영을 배신한 비인간적이고 순결치 못한 혼백이 가세했음은 물론이다.
영암사지를 돌아서며 맞딱뜨린 600년 된 느티나무에 깃든 목신이 아니었다면, 영암사지는 그저 통일신라 시대 때 창건된 어느 사찰의 유물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 수 십년 전에 정리해 둔 문화재청의 관련 자료들은 모두 새로운 사실로 채워져야 마땅항 것 같다. 정말 역사는 "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만 그 비밀을 들려주는 법"이라는 게 실감난 여행이었다. 그나저나 맨 처음에 등장한 600년 짜리 느티나무는 무학대사의 도력으로 자란 고목이 맞는걸까. (흠...그건 전적으로 여행자가 판단할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