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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山들

마츄피츄 버금가는 영암사지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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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츄피츄 버금가는 영암사지 미스테리




영암사는 왜 오지 깊숙한 곳에 건립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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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영남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는 합천의 '모산재' 산행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모산재 정상 부근에 위치한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 '무지개터'의 존재였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기암괴석과 암릉으로 이루어진 모산재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 이방인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루게 만들었다. 무지개터로 향하는 길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모산재의 높이는 767m였지만 체감 높이는 1000m 정도 된다고 할까. 

깍아지른 깔딱고개 때문에 모산재를 얕잡아본 초보 산행자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무지개터는 하필이면 모산재 정상 부근에 있었으므로 명당의 기운을 느끼고 싶은 체험자 내지 여행자들은, 울며겨자먹는 요량으로 모산재 꼭대기를 반드시 올라가 봐야 무지개터의 진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무지개터에 당도해 보니 당초 산행 전에 들었던 무지개터의 전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보였다. 설령 무지개터가 한국 최고의 명당이라 할지언정 현장에서 느끼는 기운은 그다지 명당다운 느낌이 안 든 것이다. 

따라서 글쓴이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로 '이게 아닐 텐데...'라고 궁시렁 거리며 명당에 걸맞는 뭔가를 찾아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무지개터는 모산재 정상 부근에 감추어져 있었고 모산재가 위치한 황매산은 서부경남 합천의 오지중에 오지였다.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지개터의 영험한 기운이 북돋운 상상력 때문인 지 무지개터를 둘러싼 정보들이 영암사지에 대한 미스테리를 하나 둘 씩 벗겨내며 여행자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을 이해하려면 마츄피츄에 버금가는 미스테리를 간직한 영암사지와 국사당의 비밀을 얼마간 유추해 봐야 진가가 발휘되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본 포스트 맨 처음에 등장하는 사진은 모산재 정상에서 하산 길에 촬영한 그림으로 사찰 우측의 빈 절터가 영암사지 모습이다. 모산재를 오를 때는 반대편으로 올랐기 때문에 영암사지의 존재에 대해 몰랐으며, 이 절터가 얼마나 대단한 매력을 지닌 유물인 지 하산길에 겨우 알게 된 것이다. 마치 하늘의 요정이 우리 또는 나의 발길을 인도해 귓전에 소곤소곤 속삭이듯 비밀을 알려준 듯한 터가 영암사지가 품고있었던 '천년의 비밀'이었다.

우선 영암사지를 방문하기 전 모산재 산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의 모습 등을 잠시 스케치해 본 후, 무지개터와 국사당과 영암사지에 얽힌 전설 내지 미스테리로 접근하고자 한다. (흠...호기심이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베일에 쌓인 영암사지의 비밀에 접근해 보시기 바란다.) 아래 소개되는 사진 몇 장은 '국사당(國師堂)'의 모습이다.
 

태조 이성계와 그의 스승 무학대사의 비밀을 간직한 국사당
 













 

모산재를 맨 나중에 하산한 사람들은 글쓴이 포함 5명이었다. 모산재는 맨 먼저 올랐지만 모산재의 풍광에 취해 느리게 하산하는 동안 후위 그룹으로 처지고 말았는데 이날 날씨가 흐렸던 탓에 국사당에 도착할 즈음 숲 속에 어둠이 내리는 듯 어둠침침했다. 뿐만 아니라 기대했던 국사당은 돌무더기와 깨진 기왓장이 겨우 국사당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돌담에 둘러싸인 국사당 터 앞에는 국사당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있었는 데, 그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위하여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렸다는 곳'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또 국사당은 지방관찰사 등으로 하여금 매년 제사토록 하였으며, 지금도 음력 3월 3일이 되면 제사를 올려 나라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국사당은 태조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후 수호신사(守護神詞)로 북악산과 남산꼭대기에만 세운 게 아니라, 모산재에도 국사당을 세워두고 왕조의 안녕을 빌게 만든 사당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태조 이성계는 왜 이곳에 국사당을 세웠을까.


 
마츄피츄에 버금가는 영암사지 미스테리


 

모산재를 하산하면 맨 먼저 영암사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새로 창건한 영암사 뒤편으로 우리가 하산한 모산재의 기암괴석이 보이고 영암사 극락보전 뒷편(사진 오른쪽) 산기슭에 국사당이 위치해 있었다. 맨 처음 모산재에서 내려다 본 영암사지를 참고하면 영암사지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 절터같아 보였다. 화재 등으로 유실된 사찰의 주춧돌만 남은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암사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누군가 손을 내밀어 발길을 인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정도로 영암사지는 이방인을 환대했다. 다행인 지 우리 일행 중에는 이곳 합천이 고향인 블로거 김천령님이 동행하게 됐다. 그가 영암사지를 안내해 줄 가이드가 된 것이며 김천령님은 이곳 영암사지에 얽힌 일화를 짬짬히 소개해 주고 있었다.




모산재 위에서 내려다 본 영암사지는 규모가 별로 커 보이지 않았지만 영암사에 도착해 영암사지에 발을 들여놓자 옛 영암사의 위용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영암사지는 1984년 부산 동아대학교 발굴팀에 의해 발굴된 이래 현재 까지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014년(고려 현종 5)에 적연선사가 입적했다는 사실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 등 건물터가 발견되었으나, 영암사의 구체적인 창건 시기나 이름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구전된 이름이 오늘날 영암사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절 터의 정확한 이름이나 창건 시기 등은 모두 베일에 싸여있었던 것이다. 영암사지가 글쓴이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며 우리나라 최고 명당 무지개터와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흔적이 깃든 국사당과 베일에 쌓인 영암사지를 한 데 묶게 된 이유 전부는 영암사지의 비밀과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모산재 정상에서 무지개터를 육안으로 확인해 보며 시큰둥했던 이유를 영암사지에서 찾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또 무지개터가 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으로 불리게 되었는 지 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서가 영암사지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흥분했다.




공중도시로 불리우는 잉카제국의 마츄피츄는 어느날(1917년 7월 24일) 황금에 눈 먼 한 여행자에 의해 발견됐다. 그의 이름은 하이램 빙엄(Hiram Bingham)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접근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인 마츄피츄 접근에 성공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빙엄이 고고학적 관점에서 마츄피츄를 발견하게 된 게 아니라 스페인 군대 조차 발견해 내지 못한 황금을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마츄피츄를 발견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사가 아니라 야사인 셈인데 매우 신빙성이 높다. 




잉카를 침략한 스페인군 등은 꾸스꼬의 황금사원 등지에서 강탈해 낸 황금이 소문 보다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빙엄은 안데스의 ,빌카밤바, 산 꼴짜기(산맥) 어느곳에 황금을 숨겨두었을 것이라는 추측하에 우르밤바 골짜기 등을 헤매고 다니다가, 하필이면 마츄피츄와 맞딱뜨리게 된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설이다. 그러나 마츄피츄는 하이램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는 이곳을 '잃어버린 도시(Lost City of the Incas)'로 명명하며 기록을 남겼다. 잉카인들은 이 도시를 알고 있었지만 빙엄이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며 오늘날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글쓴이는 7년 전 남미투어를 통해 마츄피츄의 인상적인 장면과 마주친 바 있다. 널리 알려진 바 마츄피츄의 석조기술은 매우 뛰어나 혀를 찰 정도로 정교하다. 잉카트레일을 제외하면 사람들의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의 암봉 끄트머리에 돌로 다듬어 세운 도시가 '잃어버린 도시' 또는 '공중도시'로 불리우는 마츄피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 흡사한 장면이 우연찮게도 영암사지에 있다는 데 속으로 깜짝놀라고 있었다. 





마츄피츄의 건설 시기(연대)는 대략 2000년 전 쯤으로 말하고 있다. 영암사지는 대략 1000년 정도라고 한다. 두 건출물은 시간적으로 1천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영암사지에 남겨진 석조기술 등 석공들의 손재주나 영암사를 창건한 사람들의 권세가 여간 만만찮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마츄피츄를 건설한 당시의 지배계급과 영암사를 창건한 특정인 내지 특정 세력을 견주어 보면 규모만 다를 망정 '잃어버린 도시' 못지않은 규모와 섬세함을 지닌 게 영암사지에 남은 유물의 흔적들이었다. 




나는 영암사지 한쪽에 쌓아올린 석축을 보며 마츄피츄에서 봤던 돌계단 등을 떠올렸는 데, 곁에 있던 김천령님이 '쇄기돌'이라고 말해주었다. 석축을 높이 쌓을 때 석축 깊숙히 박아두며 석축을 견고하게 만드는 돌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모습은 마츄피츄 등 잉카의 거석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쇄기돌 앞에서 영암사지 흔적을 추억하는 블로거 김천령님 

석축을 높이 쌓을 때 (공사를 위해)기구를 걸치거나 계단식 논밭의 이동수단인 돌계단 등 다목적으로 사용한 축조방식이었던 것이다. 가뜩에나 일행과 뒤쳐진 우리는 오래되어 빛이 바랜 석축의 외형에서 풍기는 전설같은 비밀 때문에 금방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모산재 산꼭대기에서 부터 품고 내려온 무지개터의 비밀과 국사당에 흔적을 남긴 태조 이성계와 그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흔적 등이 영암사지에 남겨진 유물 하나 때문에 호기심이 눈 녹듯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암사지에 남겨진 오래된 석축 등 유물들은 그냥 아무곳에나 만들어 진 게 아니었다. 잃어버린 도시 마츄피츄가 잉카인들에게 최고의 성지였다면 영암사지 또한 창건 당시에는 최고의 성지로 이름을 떨친 게 틀림없어 보였다. 두 유적지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않는 오지 중에 오지에 위치해 있었다. 




마츄피츄가 잉카의 고도 꾸스꼬(Cusco)로 부터 대략 일주일을 꼬박 걸어서 가야하는 거리라고 한다면, 서부경남의 합천과 산청을 가르는 황매산을 기점으로 모산재가 위치한 합천의 가회면은 한 때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자, 빨치산이 활동하던 거점이 될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던 것이다.  




특히 그런 모습은 모산재 정상에 서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데 무지개터 내지 모산재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 모산재의 기암괴석과 암릉이 두 팔을 벌리고 영암사지 또는 영암사를 품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두 마리의 황룡과 청룡이 여의주를 품은 듯한 장소가 영암사지였는데 영암사지에 남은 보물(쌍사자석등, 보물 353호)이 무지개터의 진가를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영암사지에 남은 쌍사자석등은 얼른 보기에 보통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석등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석등에 얽힌 이야기나 석등이 위치한 장소를 알게 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이 흐르게 된다. 




멀리서 봐도 규모나 섬세함이 뛰어난 석조건축물을 보면 화강석을 통째로 조각해 놓은 돌계단이나 쌍사자석등의 정교함에 놀라게 된다.




10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다 허물어진 듯 보이지만 직접 발굴 흔적을 살피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나왔다.




최소한 1000년 전에 오지 중의 오지에 이런 석조품을 만들어 건축을 할 수 있다면 이 사찰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권세가 여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석조물의 규모를 참조하면 사찰 건립 시간도 꽤나 걸렸을 법 했다. 그것도 깊은 산 중에 이런 명품을 만들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쌍사자석등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행과 동행한 김천령님에 따르면, 이 석등은 일제강점기(1933년) 당시 '왜놈'들이 강탈해 가던 것을 동네 주민들이 도주로를 차단하고 되찾아와 면사무소에 보관했다가, 1959년에 이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단순히 석등이 탐났던 게 아니었다. 




석등이 바라보고 있는 서쪽은 해가 지는 곳이며, 두 팔을 벌린 듯한 모산재의 산세를 참조하면 무지개터가 위치한 장소는 석등과 마주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기막힌 장소로 변하는 곳이다. 그곳은 날씨가 흐린 날이면 무지개가 걸리는 상서로운 징조가 일어나는 곳이며, 일몰이 시작되면 붉디 붉은 서광이 무지개터로부터 발현되는 천하 제일의 명당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쌍사자석등 바로 뒷편 모산재 정상 부근에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 무지개터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일몰 때가 되면 황룡과 청룡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드러나게 되는 데, 그 때 영암사 법당 입구 석등 앞에서 정서쪽으로 바라보면 석등이 환하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무지개터가 있었다. 영암사지에 서면 흐린 날에는 무지개를 볼 수 있고 맑은 날에는 봉황 내지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비상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암사지는 년중 상서로운 기운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이웃침탈을 업으로 삼은 왜놈들이 쌍사자석등을 가만둘 리가 있었겠나. 그러나 영암사지도 마츄피츄 처럼 불행한 운명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선 건국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이런 명당을 알아차린 천하의 무학대사가 무슨짓을 못할까. 합천의 모산재에 얽힌 무지개터와 국사당과 영암사지의 미스테리 완결판은 다음편으로 이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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