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이라는 말이 이럴 때 필요한 게 아닐까. 설악산 등반 이틀째 희운각 뒷편의 능선은 마치 오색으로 물들인 양털을 온 산중에 뿌려둔 듯 했다.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포착된 무성한 숲 사이로 나타난 절경이자, 내설악의 마력같은 매력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설악산 중청을 지나 소청에서 내려다 본 설악산 단풍은 대청봉(1708m)을 중심으로 대략 300m 정도 부근까지 내려오고 있었는 데, 해발 1300~1500m 까지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지난 1일 추석연휴 때 본 설악산의 단풍 모습이다.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44번 국도, 설악산 단풍이 한계령 까지 내려오려면 아직은 이르다. 아침 햇살에 눈뜬 한계령...
이날 산행은 연휴를 맞이한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등산로가 미어터질 정도로 붐볐다. 단풍마니아들이 단풍 때를 용케도 기억하고 설악산을 찾았던 것이다. 서울을 떠나 오색에서 시작한 설악산 등반은 오색-희운각-공룡능선-천불동계곡으로 이어지는 2박 3일간의 힘든 여정이었으나, 해발 고도를 높이면서 눈 앞에 펼져지는 가을 설악산의 환상적인 진풍경 때문에 힘든줄 모르고 일정을 마쳤다.
곧 한계령에 이르게 된다. 44번 국도를 따라 설악의 단풍 향기가 난다.
이번 산행에는 한계령 작시자 '한사 정덕수' 선생이 우리 부부와 동행하여 평소 설악산에서 느낄 수 없는 정취를 만끽하게 해 주기도 했다. 정 선생은 설악산 마니아로서 설악산 구석구석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설악산을 잘 아시는 분으로, 그가 생계 등을 이유로 설악산을 오르내린 횟수만도 대략 2,000번 정도 된다고 하니, 그의 눈에 비친 설악은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어머니의 품이라고나 할까. 그는 양희은 선생이 부른 <한계령>의 작시(1절)에서 설악을 이렇게 노래했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오색에서 시작한 등반 중에 정 선생이 주워온 참다래, 기막힌 맛이다.
정 선생과 우리 일행은 당신이 노래한 한계령을 굽어보며 2박 3일 동안 설악의 가을에 흠뻑 취하며, 파타고니아 여행에서 결코 느끼지 못했던 가을 설악산의 묘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양희은 선생이 노래한 한계령의 작곡은 하덕규 선생이었지만, 이 노랫말의 원작시는 정덕수 선생이었다.
등산길 옆에 몸을 뉜 이름모를 풀도 어느덧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글쓴이가 정 선생의 원작시에 매료된 건 남양주 별내면에 위치한 <하이디하우스>에서 만난 인연 때문이었는 데, 당시 우리는 원작시 낭송을 통해 그의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던 설악산의 마력에 깊숙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설악산의 작은 숨결 까지 놓치지 않고 노랫말에 담아 '시월의 마지막 밤' 행사에 참석한 여러분들과 우리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설악산 8부 능선부터 시작된 단풍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의 시 낭송을 들으면 마치 설악의 바람이 그의 폐부를 거쳐 세상에 전해지는 듯 했다. 한계령자락을 품은 설악산은 그렇게 욕심없이 살고있는 정 선생을 다독 거리며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런 모습이 우리가 150일간의 파타고니아 투어를 하는 동안 늘 허전함을 느끼게 만들며 발길을 재촉하게 만들었던 게 설악산이 품은 바람과 구름과 햇살과 하늘이 아니었던 지.
세계최고 청정지역 파타고니아에서 조차 느낄 수 없는 최고의 마력을 갖추고 '날 오라 손짓 하는 곳'이 설악산이었다. 오색에서 희운각으로 이동하면서 만난 내설악의 단풍이나 소청에서 바라본 용아장성의 단풍 등 가을산의 백미인 설악의 단풍은, 그렇게 우리 가슴 속에 자리잡은 채 무거운 발길을 재촉하며 환상 속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환상적인 설악의 모습을 몇 번에 나누어 소개해 드리도록 한다.
설악산 단풍 속으로
설악산 산행을 해 보신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청봉을 중심으로 어느곳으로 산행을 하든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백담사를 통해 수렴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내설악 코스나, 한계령을 통해 끝청으로 이어지는 코스나 천불동을 통해 무너미 고개와 희운각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물론, 이들 코스를 통해 공룡능선으로 접근하자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또 설악산에서 며칠 묵게되면 배낭 무게 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힘든 산행을 통해 만가지 잡념을 사라지게 만드는 묘미는 산행을 해보지 않으신 분들은 결코 맛보지 못할 게 아닌가. 한 발 한 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동안 눈 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모습은 마치 천상의 나라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랄까. 숨이 턱 까지 차 올라도 눈 앞에서 아른 거리는 가을의 설악산은 연신 카메라를 끄집어 내게 만든다.
한계령을 노래한 정 선생이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잠시 쉬다가 늘 바라봤을 풍경 속에서 구름이 넘나드는 모습이다. 우리 일행이 잠시 땀을 식히며 물 한모금 삼킨 발아래로 한계령이 통과하고 있다. 멀리 점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시인은 이곳에서 한계령을 노래했던가.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설악의 속살 앞에서 넋을 놓다
한계령을 노래했던 정 선생은 설악산을 최소한 2천 번 정도 오르내렸다고 했다. 우리가 기껏해봐야 1년에 한 두번 정도 설악산을 찾는 데 비하면 거의 바람과 구름처럼 설악산 곳곳을 누빈 셈이다. 그는 년 중 45일 정도를 설악산을 오르내렸다고 하는 데 몸과 마음은 온통 설악의 향기에 젖었을 것 같다. 그게 당신의 생계 때문이었으니 일반인들이 느끼는 산행과 단풍놀이는 비교 조차 되겠는가.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설악을 넘나드는 바람 소리와 구름에 가려진 애환이 소름돋도록 애잔하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나는 한 순간 설악이 내 뿜는 한 숨 속에 갇혀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설악산 깊숙히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며 설악이 보여준 속살 앞에서 넋을 놓고 말았다. 금년 설악산의 단풍 절정기는 대략 10월 17일로 잡고 있는 데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설악산의 단풍은 첫 단풍으로 대청봉으로 이어지는 오색의 한 골짜기에서 안개와 어우러저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풍경이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 동화와 전설 속으로 사라진 선녀와 신선들이 이런 풍광 속을 거닐었던 게 아닌가 싶은. 파타고니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비경이자 단풍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