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글쓴이는 인혁당사건 관련 증언들을 앞에 놓고 한동안 망설였다. 증언을 읽는 동안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온 몸으로 전해져 오며 신경세포들이 전기 충격을 받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당시 수사기관 등이 거짓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모진 고문을 자행했는 지 얼른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증인들은 그 고통을 지금껏 참아오며 슬픔을 가슴속으로 삭히고 있었던 것이나, 피도 눈물도 매마른 한 여자로 부터 그 고통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 여자는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딸이자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박근혜('그녀'라 부른다)였다. 어쩌면 우리들 기억속에서 저만치 멀어질 뻔 했던 극악무도했던 사건이 수면 위로 부상하며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의 한맺힌 증언 한마디만 들어봐도 얼마나 끔찍한 만행이 우리들 몰래 저질러져 왔는 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이랬다.
"...사형은 새벽에 집행됐지만, 시신은 오후 6시가 지나서야 넘겨받았다. 죽은 이의 몸뚱이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손톱 10개,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 있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그날을 회고하던 아내 이씨는 "당국이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며 치를 떨었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407.html >
참으로 끔찍하고 악랄한 고문의 흔적이 주검에 남아있는 모습이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보고도 치가 떨리는 전율이 전염되지 않겠나. 권력이 국민들에게 저지른 불편부당한 사건은, 특정 사건을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어 권력을 유지하거나 연장해 보려는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운영되어야 할 국가의 조직을 사유화 하는 한편, 반정부 인사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유린하며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권력에 맛들인 정치인들이 초법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그녀의 발언으로 세상이 떠들썩한 '인혁당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참고로 인혁당사건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 한 장이 필요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사진이다. 이명박이 웃고 있는 장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이다. 남들이 다 슬퍼할 때 웃을 수 있는 사람. 이게 우리가 뽑아놓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이자 우리를 슬프게 만든 자화상이다.
인혁당 사건은 사건 발발 시기에 따라 1차사건과 2차사건으로 구분된다. 1차사건은 한일회담(한일기본조약)을 둘러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뜨겁던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며 관련자들을 구속한 것이다. 이 사건이 '1차 인혁당 사건'으로 당시 13명이 검찰에 기소됐고 1965년 1월 2명은 징역형, 나머지 11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의 항소로 1965년 5월 13명 모두 유죄가 선고됐으나 당시 사형선고나 집행은 없었다.
최근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인혁당사건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4년에 일어난 '2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긴급조치4호' 발표 후 유신반대 시위가 거세지자 중앙정보부는 '인혁당이 재건됐고 민청학련이 이들의 배후조종을 받고 있다'고 조작 발표했다. 당시 인혁당 관련자 23명에게는 징역 15년에서 사형에 이르는 중형이 선고됐다. 이 가운데 사형이 선고된 도예종씨 등 8명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진 후 20여 시간 만인 4월 9일 형이 집행됐다.
제네바 국제법학자협회가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할 정도로 이 사건의 파장이 커서, 통상 '인혁당 사건'이라 할 때는 2차 인혁당 사건을 의미한다. 두 사건 모두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집권중에 일어난 사건이며, 그녀의 발언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주요 사건이다. 본 포스트에서는 인혁당사건과 더불어, 사건 발생 2년 반 이상 시민들에게 잊혀지고 있었던 천안함 침몰사건을 일면 비교해 보며 글을 맺기로 한다.
천안함 사건,인혁당사건과 닮은 점 혹은 다른 점
두 사건의 가해자 내지 가해 정권은 샴쌍둥이나 다름없다. 천안함 사건의 정점에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이 있다면 인혁당사건의 정점에는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닮아도 너무 쏙 빼 닮았다. 박정희는 일본국 천황에게 혈서를 통해 충성을 맹세한 인간이며, 이명박은 친인척 비리로 구속된 친형 이상득을 통해 뼈 속 까지 친일.친미라며 자랑을 늘어놓은 얼 빠진 인간들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철저한 친일.숭미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이런 불행이 이어진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잔재들 때문이었으며, 미국의 정치적 놀음에 놀아난 정권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인혁당사건은 미국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뒷짐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유민주주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시늉을 보인 미국이 인혁당사건을 방치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제국의 이익'을 위한 빌미 정도가 자유민주주의라고나 할까.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와 언론 등을 통해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하며 인혁당사건을 조작질 했다면, 이명박은 합참과 언론 등을 통해 천안함 사건을 조작질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미국이 여전히 '열중 쉬엇' 하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틀 전 미국은 자국 대사가 리비아에서 목숨을 잃은 사실에 대해서는 구축함과 특수해병을 동원해서 응징에 나섰지만, 자국의 군함이나 잠수함 등이 타국의 초계함(천안함)과 추돌하여 46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천안함 침몰)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안 보이며 이명박 정권에 협력하고 있는 두얼굴의 모습인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정권 유지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두 사건의 차이점 내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인혁당사건은 실체가 밝혀진 반면, 천안함 침몰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백령도 앞 바다에 수장된 채 인양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두 사건 모두 동족을 이간질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인혁당사건에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적용된 것 처럼, 천안함 사건의 침몰원인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천안함의 침몰원인과 동떨어진 <1번 어뢰에 의한 북한의 폭침> 주장이 그것이다.
인혁당사건에서 피해자들을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간첩으로 몰아간 것과 흡사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혁당사건에서는 피해자들을 '간첩' 정도로 포장했지만, 천안함 침몰사건에 대해 의혹 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좌빨' 또는 '종북세력'으로 매도했다. 천안함 침몰사건과 인혁당사건은 국론분열을 통해 우리 사회를 둘로 나누며 정치적 이익 등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뼛 속 까지 친일.숭미주의자들이라는 거 대선을 앞 둔 요즘 확실하게 복습해야 하겠다. 그녀와 맹바기도 한 통속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