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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GONIA/lago llanquihue

파타고니아, 로스라고스에서 느낀 다윈과 파타고니아 향기

Daum 블로거뉴스
 


로스라고스에서 느낀 다윈과 파타고니아 향기
-찰스 다윈의 기록이 무색해 보이는 여행지-


파타고니아의 향기를 맡아본 적 있는가.

Daum view


우리에게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 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 種의 起源)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 비글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며 생물의 진화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남미 곳곳을 둘러보는 이 여행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T.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어 생물의 변이성·적응·생존경쟁·자연선택·적자생존 등의 견해를 중심으로 생물의 진화와 그 요인에 대해 설명했다. 영국의 A. 월리스가 똑같은 진화이론을 착상한 것을 알고 1858년에 공동으로 학회에 발표했으며 이듬해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생물학에서의 업적으로서뿐만 아니라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생물들은 공동조상에서 유래되었지만 생물들의 계보가 세대에 따라 변하면서 계속 분지하기 때문에, 생물계에 다양성이 생긴다는 생물학 이론이 찰스 다윈으로 부터 시발되었으며, 그는 남미 투어를 통해 진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 한 것이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남미로 떠나기 전 까지 세상은 '하느님의 창조물'이었지만, 다윈의 과학적 시선으로 인해 사람들이 여태까지 믿고 살던 가치관이 한꺼번에 붕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이블의 <창세기>편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느 카페 정도로 전락시키며, 기독교인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목자들이나 신학자 등 종교 권력자들은 물론 그들 추종자들을 큰 충격에 빠지게 만든 것이다. 다윈의 여행기(?)가 바이블을 한 순간에 소설로 전락 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구체적으로 충격을 설명해 보자면 다윈 때문에, 비글호 때문에, 다윈이 남미여행을 떠난 순간 부터, 서구인들의 가슴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을 내세의 하늘나라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전설의 땅 파타고니아로 떠나고 싶으세요?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1859년 영국의 출판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당장 다윈에 대한 조롱이 이어졌다. 학문적이 지 못했던 종교인들은 " 당신 조상이 원숭이요. 아니면 사람이요?"라고 물었다. 또 과학자들은 "당신 처럼 상대방의 성과물을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을 조상으로 두느니 차라리 원숭이를 조상으로 모시겠소"라는 등의 토론으로 당시 영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러나 종의 기원은 단순한 비난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한 주장을 담은 책이 아니었다. 생물진화론을 담은 그의 책 속에는 지질학,생물학,유전학,천문학 등 다양한 과학이 뒷받침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윈이 치밀하게 구성한 종의 기원은 여전히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어서 과학적 탐구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비글호를 타고 남미 등지로 여행을 떠나기 전 '종의 기원' 따위를 염두에 둔 것일까.    


 7년 전 약속 지킨 '전설의 땅' 파타고니아 

- 로스라고스에서 느낀 다윈과 파타고니아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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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저서 <비글호에서 탄생한 종의 기원- 번역본-
>에 따르면, 다윈은 대서양을 건너기에는 많이도 부족해 보이는 길이 27m 짜리 목조범선 비글호에 70명을 태우고, 1837년 12월 27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항하게 된다. 첫 기항지인 까보베르데 제도를 시작으로 남미 해안 곳곳을 누빈 다윈은 육지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게 된다. 그는 브라질 정글과 파타고니아를 누비며 그와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띠에르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지방에서는 "야만과 문명을 경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뿌에르또 몬뜨에 인접한 칠로에 섬(Isla Chiloe)으로 가던 중에는 화산에서 연기가 솟구치는 장면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발디비아에서는 지진을 겪기도 했다. 



그리하여 1835년 9월, 다윈은 마침내 훗날 진화론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 서식하는 핀치새나 황소거북,이구아나 등을 관찰하며, 생물 분포에 있어서 두드러진 사실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자료를 얻게 된다. 그는 이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과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면서 킬링섬의 산호초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 아조레스 제도를 거쳐 1836년 10월 마침내 영국의 팰머스 항구로 귀항하게 된다.




그는 남미와 오스트렐리아 아프리카를 돌아오는 5년 여의 항해를 끝으로 두툼한 노트 18권을 본국으로 가져왔다. 비글호의 모험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의 생물과 화석자료, 지질과 현지 사람들의 생활상을 세심하게 관찰한 기록을 바탕으로 <비글호 항해기>를 쓰게된 것이다.
 비글호에서 탄생한 종의 기원 번역본에 따르면 '한 척의 배(비글호)가 세상을 바꾸게 된 것'이다. 




다윈의 기록과 나의 기록 

 산티아고에서 뿌에르도 몬뜨에 도착한 직후 우리는 로스라고스(Los Lagos)의 유명한 휴양지로 이동했다. 그곳은 호수가 널린 지역이었는 데 정확히 말하면 파타고니아 땅과 맞 닿은 뿌에르또 몬뜨 북부지역의 호수군(群)에 속한 뿌에르또 바라스(Puerto Varas)였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 구름이 잔뜩 낀 뿌에르또 바라스는 우기가 끝나 봄이 무르익어 이름모를 풀꽃을 곳곳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멀리 
오소르노 화산이 먹구름에 갇혔다가 맑고 고운 호수 너머로 모습을 드러낼 즈음 우리는 호수 곁을 천천히 산책하고 있었다. 호수 곁에는 고생대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이 우산 보다 더 큼직한 커다란 잎을 펴 놓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띄었다.
 
   


이런 식물들은 다윈이나 비글호 선원들이 한번쯤 봤음직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남미 곳곳을 돌아보는 동안 이렇듯 귀한 식물들을 숱하게 봤을 것이나, 어쩌면 다윈의 기록에는 빠졌을 거 같은 느낌이 드는 식물들이었다. 그는 종의 기원을 완성하기 위해 5년 여의 세월 동안 남미 지역을 돌아봤을 텐데, 언급한 바 종의 기원을 완성하게 만들어 준 건 파타고니아에 살고있는 동식물들이 아니었다. 

다윈은 1842년 5월에 자신의 진화론의 개요를 담은 짧은 초고를 작성했다. 1844년에는 진화론에 대한 조금 더 긴 논고를 저술했지만, 이를 책으로 출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종이 진화한다는 생각이 너무 이단적이어서, 사람들을 완벽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증거를 축적하기 전에는 책을 쓰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1859년에 다윈이 급하게 '종의 기원'을 출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적도에 가까운 태평양의 고도에 갇혀 서식하고 있던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들과, 다윈과 견해차이가 도드라져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된  근본주의자 비글호 선장 때문에(?) 진화론을 굳히고 발표를 망설였다면,  동남아시아에서 동식물을 관찰하던 영국의 생물학자 월러스가 1858년에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서 종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얘기했을 때, 그는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윌러스의 결론은 다윈이 그 동안 진화에 대해서 고민했던 생각과 정확히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다윈의 5년 여의 세월 동안 기록된 여행기 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결국 그가 남긴 기록들은 개인의 학문적 업적을 드높이기 위해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살던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순전히 자신만의 주관적 판단에 꽤 맞춘 진화론이 수 천년 동안 인류문화사를 지배하며 전해져 내려오던 한 가치를 일순간에 무너뜨리고 만 것이다. 



만약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 낼 당시 오늘날과 같은 교통수단이나 기록수단 등 첨단의 현대문명이 존재했드라면, 그의 주장은 백지화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며 사람들로 부터 돌팔매질을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할 당시 들끓었던 찬반 논쟁을 확인해 볼 수단은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처럼 디스커버리나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다큐를 전문으로 하는 방송 채널이나, 보다 발전된 과학적 수단이 존재했드라면 여러사람들로 부터 반박을 당하기 쉬운 게 그의 학문적 노력이었다고나 할까. 


다윈이 버린 희망을 되찾아

글쓴이는 다윈의 업적은 고사하고 그의 명성에 걸맞는 대항 수단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다윈과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윈이 5년 여의 세월에 걸쳐 이동한 거리를 불과 2박 3일 만에 이동한 바 있고, 다윈이 펜촉에 잉크를 발라 노트에 여행기를 끄적이고 있었다면, 글쓴이는 노트북을 펴 놓고 마음 가는대로 끄적이는 차이다. 뿐만 아니다. 다윈이 여행을 통해 관찰하고 끄적인 글들은 가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억지주장일 수도 있지만, 글쓴이의 경우 여행 루트를 따라 이동하면서 촬영한 사진은 사실(Fact) 그 자체이므로, 글쓴이의 기록을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 객관적 사실에 도달할 수 있는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세상이 바뀌니 기록 수단과 방법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기록수단의 진화라고나 할까. 다윈이 5년 여의 세월 동안 남긴 기록은 꽤 두꺼운 노트 18권이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쓴이의 경우 뿌에르또 몬뜨에서 육로와 해로를 따라 단지 150일간의 파타고니아 투어를 통해 남긴 촬영기록이 풀프레임 기준 400GB에 이른다. 수 만장의 사진이 외장하드 속에 남겨져 있다가 하나 둘 씩 세상의 빛을 보게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기록을 접하게 될 네티즌들은 상상 이상의 장면에 혀를 차게될지도 모른다. 물론 수 만장의 사진 만으로 다윈이 가설을 세워 접근한 진화론의 명성이나 권위에 대항(?)하기란 역부족일 것이다. 그게 과학적 학문에 무식한 한 블로거가 끄적이고 있는 여행기의 한계라면 한계라고나 할까. 


하지만 꽤 길게 연재될 <150일간의 파타고니아 이야기>는 다윈이 함부로(?) 접근한 진화론 때문에 절망을 거듭한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쏘시게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건 바이블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을 통해 만들어진 내세의 도래를 끄적인 소설도 아니며, 어쩌면 황당하기 짝이없는 진화론 같은 학문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지구의 마지막 희망과 다름없는 파타고니아 땅에는 장차 우리가 돌아가야 할 천국이 도처에 널려있는 곳이자, 억만겁의 추억을 간직한 시간의 무덤을 통해 내세의 모습이 어떤 지 실시간으로 확인이 되는 곳이었다. 우리가 만난 파타고니아는 그런 땅이자 늘 가슴에 품고살던 천국의 모습이었다.



그곳에 서기만 하면 가슴 속 깊이 잠들었던 영혼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며, 그 영혼이 자유로이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식물과 대화를 하며 식물들이 말을 걸어 안부를 묻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세상을 본 적 있는가. 어쩌면 그런 세상은 우리가 바쁘게 사는 동안 잊고 살던 진정한 안식처이자, 세상의 편협한 지식이 만든 허상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본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뿌에르또 바라스의 작은 언덕에서 바라 본 호수는 수정 처럼 맑고 고운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 데, 그 모습은 삶에 지친 사람들이 가슴에 늘 품고 살던 영혼이 쉼을 찾아 머리를 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파타고니아의 향기가 로스라고스에서 이토록 짙게 풍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버지의 권유로 켐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다윈이 오늘날 남미 투어에 나섰다면, 그로 부터 진화론 같은 상상은 전혀 불필요 했을 지도 모른다.

인류를 진화론 속에 잠시 가두어 둔 건 그가 공부한 식물학과 지질학, 동물학 등 박물학자의 자질 때문이었으며, 다윈의 운명을 바꾼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켐브리지 대학의 식물학자 헨슬로 교수가 남미로 떠날 영국의 해군 탐사선 비글호의 선장(로버트 피츠로이)가 함께 갈 박물학자를 구했기 때문이다. 비글호와 한 통의 편지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게 된 것이며, 그의 기록과 판단을 통해 세상의 가치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만약 170 여년 전에 운명을 달리한 다윈의 영혼이 로스라고스의 한 호수가에 머물게 되었다면, 그의 영감이 글쓴이에게 도래됐을 거 같은 기분이 진하게 든 하루였다.

"흠...그 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진화는 무슨..."

로스라고스에서 짙게 피어오른 파타고니아의 향기 때문이다. 뿌에르또 몬뜨와 지척으로 가까운 오소르노 화산과 뿌에르또 바라스가 위치한 로스라고스는 파타고니아와 어께를 맞대고 있는 곳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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