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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IAGO

대통령궁 지하에서 느낀 흥미로운 체험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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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궁에서 느낀 흥미로운 체험 세가지 
-칠레 대통령궁 지하 문화공간에서 동질성 느낀 '수품'-


남미 땅에 우리민족과 동질성을 느낄 문화가 남아있는 것일까.

먼저, 맨 처음 등장한 사진 한 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위 풍경은 칠레의 산티아고 중심가에 위치한 대통령궁의 정문 모습이다. 대통령 궁 앞의 근위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티아고의 한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대통령궁 방문을 위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다. 칠레의 대통령 궁은 일반에 공개되고 있지만 글쓴이가 (근위병에게)물어본 바에 따르면 사전에 출입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비록 사전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대통령궁은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칠레의 정치문화는 시민들과 매우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또 대통령 궁 지하의 넓은 공간은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제공되고 있었는데, 글쓴이가 방문한 날에는 인도 문화를 알리는 전시회(India Festival)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식으로 잘 꾸며진 훌륭한 문화공간의 출입구를 외국 여행자들이 잘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둔 점이 특이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별로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호기심을 가지지 않으면 찾지못할 정도로 출입구는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사진 한 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풍경 왼쪽으로 보면, 멀리 인도에 처 둔 휀스 사이로 정장을 한 시민 한사람이 걸어오는 장면이 보일 것이다. 대통령 궁 지하에 있는 문화공간의 출입구가 그곳에 있으며, 그곳에는 지하 입구에 들어서야만 이곳이 문화공간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길거리에는 유리나라에서 흔하디 흔한 안내 입간판 조차 구경할 수 없다. 마치 대통령 궁 지하에는 일반인들이나 여행자들이 알면 안 되는 비밀이 숨겨진것일까. 글쓴이는 이 곳에서 우리민족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평범한 듯 매우 특이한 수공예품들을 만나게 됐다. 그 아름다운 장면을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린다.

칠레 대통령궁 지하 문화공간에서 동질성 느낀 '수품' 속으로


대통령 궁 정문(남쪽) 앞에 위치한 지하 입구를 들어서게 되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 하나가 눈길을 끈다. 전라의 두 남여가 부둥켜 안고있는 모습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매우 에로틱해 보이는 조각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양성평등 내지 남녀가 서로 화합해야 이 땅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인 거 같다. 특히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나 손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은 인류가 반드시 지켜야 할 신앙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이 이 조각 속에 숨겨진 듯 하다. 그리고 계단을 한 바퀴 돌아내려 가면 큼지막한 출입문을 만나게 된다.



비로 이 모습이다. 오른쪽 뒷편으로 보이는 계단이 조금 전에 돌아내려온 계단이다. 이 정도 깊이면 대략 지하 2층 정도의 규모인데 이곳은 여전히 지하 1층일 뿐이다. 이곳으로 들어서서 아래로 보면 넓직한 공간이 보이는데 그곳이 지하 2층이라니, 이 나라 사람들의 기형적인(?) 스케일이 단박에 느껴진다. 스페인의 건축문화가 산티아고로 그대로 전파되어, 시내 곳곳의 오래된 건물이나 새로지어진 듯한 건물에도 그 흔적들이 역력하다. 


산티아고 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우아하고 정교한 선이 돋보이는 로코코 스타일의 건축양식은, 층고가 너무 높아 보이는 건물을 매우 고전적이면서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처마 끝이 손에 닿을 듯한 나지막한 초가나 한옥에서 자란 사람들이나 민족들이 이런 건축물을 보면 '참 쓸데없는 짓'을 하고있는 사람들 처럼 여기기 십상이다. (기럭지가 짧으니 그런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좁은 땅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그러나 이런 문화에 차차 익숙해지기 시작하니 멋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 1층에서 내려다 본 지하 2층을 카메라를 세워 세로로 촬영해 봤다.



대략 3층 높이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될 장소가 지하 2층에 있는 문화공간이었다. 



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선택을 해야 하는데, 하나는 그림에서 처럼 길다랗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 있다. 또 하나는 보통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에 마련된 문화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는 장애인들이나 노약자들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마련해 두고 있다. 지하 발코니에 기대서서 아래로 보니 그 통로가 예사롭게 보여지지 않았다. 통로 자체가 예술작품 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산티아고 시민들 내지 칠레 사람들은 절대로 바쁘지 않다. 우리나라 처럼 조급증을 내지 않는 것이다. 글쓴이도 이런 문화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절대로...절대로 후다닥 거리며 살고 싶지않은 것이다.  발코니 위에서 바라본 길다란 통로는 그래서 느림의 미학을 선 보인 단적인 예 같았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계단으로 후다닥 뛰어내려가, 맨 먼저 줄을 서거나 입장하여 작품 조차 후다닥 감상해야 직성이 풀릴 게 아닌가. 그러나 이곳에 오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런 풍경은 찾기 힘들다. 특별한 경우는 포스트 마지막 부분에서 만날 수 있다.



이 포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글들의 주제는 세가지다. 맨 먼저 대통령 궁과 가까운 시민들의 모습을 소개해 드렸다. 그리고 이 포스트의 핵심인 칠레 북부의 아이마라(Aymara) 인디오들의 문화 속에서 살아 숨쉬는 몽골로이드의 흔적들이다. 아무튼 언급한 특별한 풍경 포스트 마지막 부분에서 만날 수 있다.



지하 1층 발코니에 전시된 인도 문화 소개 그림이다. 그림 한 장으로 인도 문화 전부를 보는 듯 한데, 지하 2층에 마련된 전시장에서는 사진촬영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전시장은 모두 세 곳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전시된 인도의 오래된 유물들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또 한 곳에 전시되고 있는 인도의 풍물을 담은 사진전을 통해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사진 촬영이 허락된 전시 공간이 있긴 있었다.



사진전에는 갠지스 강의 풍경을 담은 사진 등 많은 사진들 중에, 글쓴이의 마음에 와 닿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 사진은 '불을 쬐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맨 발 차림의 두 노인이 불을 쬐는 모습을 통해 인류문화가 진화된 상징성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인류가 불을 잘 다루게 된 이래 세상은 눈부시게 발전되었다. 



현대인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맨발로 다니지 않는다.



수 만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지금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베링 해협을 건너 남미 전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도 원주민들은 맨발이었을까. 인도 사진전이 열리는 곳에서 촬영해 온 사진 한 장의 모습만 참조하면, 남미 최남단의 '불의 땅(Tierra del Fuego)'에 살던 사람(Fuigos)들이 금방 오버랩되고 있었다. 



남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은 콜롬부스나 마젤란이 이 대륙을 서구에 알리기 전 부터 이 땅에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며, 이들 인도인들 처럼 불을 쬐며 밤을 지새는 등 불과 함께 이 땅에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오래전 부터 신발을 만들어 신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땅은 1520년 11월 1일 마젤란이 해협(오늘날 마젤란 해협)을 통과 할 때 이 땅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목격하고 '연기의 땅(띠에르라 델 우모,Tierra del Humo)'이라 명명했지만,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챨스 1세는 "불이 없이는 연기가 날 리가 없다"며 불의 땅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 때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살던 몽골족들이 북미 대륙으로 부터 남미대륙 끝까지 진출해 있었던 게, 마젤란의 여행 기록에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흔적들은 인도 문화 전시관에서 전혀 느낄수 없었는데, 지하 1층으로 다시 올라와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는 칠레 북부dㅔ 살고있는 아이마라 인디오들의 문화를 보는 즉시 단박에 가슴 깊이 전해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뵌 적 있는 부모님을 하늘나라에서 만난 기분이랄까. 한 전시관에 진열된 '아이마라 인디오(Aymara Indio)'들의 작품의 큰 특징은 무지개 빛 색동을 입힌 것들이었으며, 이 작품들을 보는 순간 색동저고리가 단박에 떠 올랐다. 차근차근 작품들을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이곳에는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지만, 맨 먼저 글쓴이의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이 바구니에 담긴 수공예품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색동저고리를 연상케 하는 색동으로 입힌 섬세한 공예품들은 색채 하나만으로도 우리민족과 동질성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이마라 인디오들은 오늘날 페루와 볼리비아와 칠레의 북부지방이 겹친 지역에 주로 살고있었는데, 칠레 북부에 아이마라 인디오들이 살게된 이유는 볼리비아가 칠레와 전쟁 끝에 패함에 따라서 칠레 북부 쪽의 땅을 내 줌으로써 칠레의 일부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전쟁 때문에 볼리비아 해군은 바다를 잃고 말았는데 지금 까지도 그들은 칠레를 향해 바다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며 협상을 진행중이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1879년부터 1883년까지 칠레태평양 전쟁을 벌였으며 볼리비아가 이 전쟁에서 대패한 바 있다. 



아무튼 이 전시관에는 아이마라 인디오의 공예품 다수가 전시되고 있었는데, 내친김에 아이마라 인디오들의 역사를 조금만 더 살펴보자. 아이마라 인디오들은 오늘날 안데스 중부 지역의 알띠쁠라노(Altiplano)의 고원지역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토양이 거칠고 기후가 험한 지역에서 주로 농경과 목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거친 초지에서 라마와 알파카 목축을 한다. 주요경작물로는 이 지역 특산물인 감자.오카.울루쿠.키노아.옥수수는 물론 콩과 보리.밀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띠띠까까 호수(Lago Titicaca)에서 '띠띠까까 왕골'로 만든 뗏목을 이용한 고기잡이도 하고 사는 데. 잉카족
에게 점령되기 전까지는'코야족'과 '루파카족'의 국가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국가를 형성하며 살고있었다. 1430년경 잉카의 황제 '비라코차 잉카'가 제국의 수도인 꾸스꼬(Cusco)의 남쪽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마라족들은 쇠퇴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마라족 영토는 결국 잉카 제국에 정복되었으나, 아이마라족은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항쟁을 전개한 바 있다. 




그 항쟁의 역사는 
1535년 스페인 군이 잉카를 정복한 이후, 1821년 페루가 스페인 왕정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빼앗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 간의 치열했던 전쟁이 대략 막을 내린 때가 불과 100년 남짓이다. 최소한 이 땅에서는 그 이전 까지 아이마라 인디오 등 남미에 살던 원주민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고 살아왔는데, 그 흔적들이 대통령 궁 지하의 한 전시관에서 은은한 색동빛을 피우며 여행자의 발길을 붙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유난히도 색동빛이 환하게 빛나는 공예품을 집착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 땅의 원주민들이 한 때 바이칼 호수 주변과 알타이 산맥 근처에서 살고있던 퉁구스 족들의 후예들이 아닌가 싶어, 그들의 역사나 문화를 대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는 '만약'을 허락하지 않지만, 만약...만약에 말이다. 남미 땅에 스페인 군 등의 침탈의 역사가 없었드라면,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이 이주해 온 거대한 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마구잡이로 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언어체계는 조금 다를지라도 무지개빛 색동저고리를 입고 사는 문화만으로도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들이나 이민자들이 얼마나 행복해 할까. (우리는 좁아터진 나라에서 지지고 볶고 살고있으니 말이다.ㅜ)



주지하다시피 몽골족의 이동 루트는 바이칼 호수와 타이 산맥 근처에서 살고있던 '퉁구스 족(동이족)'들의 이동 루트이다. 학계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돌궐족'이 오늘날 터키를 세운 투루크 족이고, 북유럽 쪽으로 건너가 루마니아,헝가리,스웨덴 지역에 정착한 '훈족'이 흉노족이라고 한다. 한 때 그들은 유럽을 강하게 압박한 민족이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한 퉁구스 족이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부여.발해의 조상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루트를 따라 베링해를 건너 남미 땅 끝까지 이동한 민족들 중에 아이마라 인디오들이 있었으므로, 거대한 역사를 일으킨 위대한 민족들이 이들이었으며 인류문화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민족들이 몽골족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특히 그 중에서도 오늘날 세계최고의 디지털 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민족이 몽골족의 후예들인 한국인이며, 글쓴이도 그들 후손들 중 1인이라고 생각하니 한국 문화가 일천한 남미땅에서 느끼고 싶은 동질감이 무엇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글쓴이가 방문한 시각 이 전시관에는 산티아고의 모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이 현장학습을 나왔다. 나이가 지긋한 역사 선생님과 아직은 앳되 보이는 한 여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수공예품의 지역적,역사적,문화적 설명을 곁들이고 있었다. 이들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며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선생님일 거라 생각하니, 전시관에 전시된 공예품들의 무지개빛 역사는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전혀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들 다수의 메스티조 선조들은 잉카족의 피와 아이마라족의 피와 마푸체족 등 원주민들의 피는 물론 백인들의 피가 뒤섞였으니, 우리 한민족과 같은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가 쉽지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들 학생들과 선생님을 바라보며 괜한 상상에 잠기곤 했다. 이랬다.



"얘들아...주목해봐요...음...이 수공예품은 아이마라 인디오들이 만든 작품인데 요. 주지하다시피 아이마라 인디오들을 정벌한 게 스페인 군이었잖아요. 뿐만 아니라...(얘 어딜 보니 선생님 좀 바바)...스페인 군은 또 산티아고에서 이 땅의 원주민들이었던 피쿤체 인디오들을 정벌하고 오늘날 칠레를 만들었거덩 요...



그런데여...음...자랑스러운 아이마라 인디오들의 수공예품을 보면 요...(선생님 스페인 군대가 왜 자랑스러운 원주민들을 정벌 했어요?...)음...꼭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이 설명하는 데 질문을 해요. 질문은 나중에 해요...(ㅋ 선생님 화났나 보다...ㅋ)자...여길 보세요...암튼 아이마라 인디오들의 수공예품은 매우 섬세하고 특히 오색 무지개빛이 영롱해 보이는 이 작품은 요... 스페인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쉽지않은 특이한 문화예요...(아쉽당. 선생님 아이마라 인디오들이 스페인 사람들 보다 더 나은 문화민족이었나보죠?...^^)...쟤는...아까부터...ㅜ" 



전시관을 무지개 빛으로 수 놓고 있는 건, 손가락만한 형체에 가는 실로 수놓은 작고 앙증맞은 수공예품들 뿐만 아니었다. 그곳에는 은제 수저와 옥구슬로 꽨 목걸이가 보물처럼 전시되고 있었다. 그 작품들은 잉카문화가 아이마라 인디오 문화에 영향을 준 게 눈에 띄었으며, 이들 원주민들의 문화에 없었던 십자가가 더해져 있었다. 그건 이 땅을 침탈한 스페인 군이 전파한 카톨릭 때문이었다. 불과 100년 남짓한 세월이 이 땅의 원주민들의 문화를 바꿔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다 먹고 살자고 한 일로 보기엔 너무도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대통령 궁 지하에서 전시되고 있는 건 이들 아이마라 인디오들의 수공예품만이 아니었다. 수공예품과 유물들은 칠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칠레 북부 아따까마 지역과 디아기따 지역 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칠레 북부지역은 거의 아이마라 인디오 내지 잉카 인디오들의 역사와 문화가 배경으로 자리잡은 땅이었던 것이다. 그곳은 원주민들의 땅이자 베링해를 건너 남미 땅 끝까지 이동한 몽골족들의 후예들이 아닌가. 사정이 이러함으로 현장학습에 나온 학생들을 상대로 이들 문물을 소개하자면, 선생님이 꽤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보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궁 지하에서 전시중인 이 땅의 원주민들의 문물을 대략 살펴봤는데,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반대편 출입문을 통해 아르마스 광장 쪽으로 이동하며 숙소로 이동하던 중에 껄끄러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게 이 포스트에서 마지막으로 끄적이고자 하는 특별한 풍경이다. 글을 맺으면서 그 풍경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는 대통령 궁 지하에 있는 전시관을 둘러보기 전에 대통령 궁을 세번째 방문하며 대통령 궁 근위병 교대식을 관람한 바 있다. 오전 9시 경에 숙소를 출발한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었던 셈이다. 근위병 교대식 관람을 끝으로 전시관에 들렀으며 곧 바로 우리는 오던 길을 되돌아 숙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사람들이 북적 거리는 아르마스 광장과 대성당을 지나치면서 주변의 쇼핑센터에서 눈팅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라 아내가 화장실을 찾았다. 아차 싶었다. 


앞으로 칠레의 풍물 등을 소개할 때 다시 등장할 소재인 칠레의 화장실 문화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할 부분이므로 밑줄 쭈~악 그어두고 봐 주시기 바란다. 칠레 전지역 대부분은 화장실이 유료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버스터미널은 물론 공공장소 곳곳의 화장실은 대부분 유료다. 그래서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보통 150~250빼소(우리돈 300원 내지 500원)를 지불해야 하므로, 우리나라에서 공짜(?)로 볼 일을 보고 다니신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왕짜증 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이곳은 칠레땅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시내로 외출을 할 때는 반드시 일부러 볼 일을 미리 봐 둔다. 비용을 아끼는 것도 그렇지만 화장실 찾는 일도 여간 어렵지 않아서 정말 귀찮은 일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번잡한 시내 한 복판에서 아내가 화장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즉각 화장실 찾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게 쉽지않다. 이 나라 사람들은 볼 일을 어떻게 보는 지 아무리 살펴봐도 화장실이 쉽게 눈에 띄지않는다. 그래서 일전에 통닭투어에 나서면서 이용한 적 있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급히 이동했다. 



대통령궁 지하 계단 입구 뒤편으로 대통령궁이 보인다.


그런데 화장실 앞에 도착한 우리는 거의 이구동성으로 "아니 볼 일 보는 데 1000원씩을 내야 하나(궁시렁궁시렁)하고 중얼거리며 대안을 찾았다. 이곳의 공중화장실은 370빼소(우리돈 약 7~800원)를 받고 있는 고급(?)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참 별 희한한 일 다 본다며 우리는 대통령 궁으로 발길을 다시 돌리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대통령 궁 지하에 근사한 화장실이 있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서두에 잠시 언급했지만 두 번째 전시관을 방문했을 당시는 처음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건축 양식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하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매우 급한 볼 일을 보는데 길다란 통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한다?...말 도 안 돼. 대통령 궁 지하에 도착하는 즉시 우리는 젭싸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 한쪽 구석에 감추어 둔(?) 화장실을 느긋~하게 사용한 후, 이 전시관에 맨 처음 방문했을 때 처음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통령 궁 지하를 빠져나간 것이다.(우훗~^^) 이게 특별한 풍경이므로 칠레를 여행하시는 여행자들이나 관광객들 께옵선 필히 참조 하시라.<산티아고에서 블로거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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