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나타난 '매조도梅鳥圖'의 기쁜소식
-매화 꽃봉오리 즐기는 직박구리 정약용 선생 '매화도' 쏙 빼 닮았네-
매조도는 정약용 선생이 부인이 보내준 낡은 치마폭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매조'를 그리고 시를 썼는데, 그 매조를 다시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니 직박구리가 아닌가 생각되며 직박구리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듯 싶습니다. 오래전에 만나 본 매조도는 선생이 부정을 담은 글과 매화 그림에만 정신이 팔렸을 뿐 정작 매화 나무에 앉은 한 쌍의 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매조도의 조류는 직박구리 였으며 한 쌍의 직박구리는 선생과 부인 홍씨의 애뜻한 사랑을 담았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매조도에 얽힌 선생의 시나 그림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복습삼아 끄적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산 선생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춘천 지역으로 이동을 하면 으례히 경춘가도의 시작점과 다름없는 다산 생가 쪽으로 자동차를 운전하게 되는데 지금은 팔당댐으로 막혔지만 댐으로 수몰되기전 두물머리 쪽 풍경을 생각하면 '고향의 봄'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며, 지금도 다산 생가 근처를 서성이면 선생이 어릴 때 본 고향의 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가 쓴 글 곳곳에는 고향의 정경을 담은 시가 주옥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15세에 부인 홍씨와 결혼한 선생은 정치적인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기 전 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강진에서 홀로 유배 생활을 하며 두 아들과 딸과 부인 홍씨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야만 했습니다.(**다산선생은 15세되던 1776년 승지 홍화보(洪和輔)의 따님 풍산홍씨(豊山洪씨 1761~1838)와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요절하고 2남 1녀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사정은 어린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둔 부인 홍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옥바라지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쳐야 했으므로 부인 홍씨의 고생은 말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선생이 역적이 되었으므로 무엇보다 두 아들에 대한 벼슬길을 막은 형편이어서 선생이나 홍씨는 한시도 마음 편할날이 없었을 것이죠. 그 당시 부인 홍씨가 장롱을 정리하다가 문득 오래전에 입었던 다홍치마를 발견했는데, 그 치마는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가져온 여섯폭 치마였습니다. 그러나 그 치마는 오래되어 빛이 바래고 낡았지만 선생에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판단 되었을까요? 홍씨는 그 치마를 잘 정리하여 강진의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그 장면이 눈에 선하군요. 요즘처럼 택배로 부치면 하루만에 도착할 거리지만 당시 사정을 감안해 보니 그런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인 홍씨가 보낸 낡고 색이 바랜 치마를 받아든 선생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두 아들과 딸아이는 물론 부인 홍씨 때문에 그리움이 절절했던 순간에 받아든 낡은 치마는 선생의 눈시울을 얼마간 적셨을 것이며 그의 부정(父情)을 뒤흔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아비 노릇이라고는 오직 글 쓰는 재주와 그림 그리는 재주 밖에(?) 없었으므로 선생은 부인의 뜻을 헤아리기 시작했을 것이며 당신의 손길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홍씨의 마음 까지도 간파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거기까지 이르자 선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먹을 갈기 시작했을 것이죠.
그런 한편 선생은 낡은 치마를 펼쳐놓고 꽃다운 나이에 시집 온 후 맑은 치마처럼 퇴색한 부인의 모습이나 유배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 마저 들기도 했을 것이나 부인 홍씨나 자신의 변치않는 마음만은 영원히 나누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마폭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유배당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담아 전달했으면 하는 홍씨의 염원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일까요?
선생은 적당히 자른 치마폭 위에 두 아들을 위해 부인 홍씨가 하지 못한 교훈이 될만한 글을 써서 책으로 엮는(네 첩) 한편, 하나 뿐인 시집간 딸에게는 그림(족자)을 그려주기로 했습니다. 매화와 함께 새를 그려넣은 '매조도 梅鳥圖'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야깁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한 매조도는 이렇게 탄생됐고 다시금 들여다 본 매조도 속 조류는 직박구리와 너무 닮아 아예 직박구리로 단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부인 홍씨가 보내준 비단에 그린(1818년) 수묵담채화인 '매조도'(45cm X 19cm) 입니다. 현재 고려대박물관 소장
선생에게 아들 딸들에 대한 추억은 어릴적 두물머리에서 본 고향의 모습과 함께 딸에게 보낸 매조도는 두 부부가 화목하게 잘 살아라는 메세지와 함께 강진에 유배된 자신과 남양주 능내리에서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 부인 홍씨와 시공을 잇는 사랑의 마음(미안함과 함께)을 담은 게 아닐까요? 매조도에 써 넣은 선생의 시는 이렇습니다.
翩 翩 飛 鳥 息 我 庭 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
有 列 其 芳 惠 然 其 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깃들었네
亥 止 亥 樓 樂 爾 家 室
여기에 깃 들어 즐거운 가정 삼으려므나
華 之 旣 榮 有 - - 其 實
꽃이 아름다우니 열매도 가득하겠지
아마도 선생은 부인이 보내준 낡고 색바랜 치마폭에 글과 그림을 쓰고 그리면서 부인 홍씨는 물론 두 아들과 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을 것이며 애간장을 끊는듯한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오늘날 '하피첩 霞피帖-붉은 치마(紅..)를 은근하게 돌려서 표현한 말-'으로 불리는 선생의 유작을 보면 그저 선생의 담담함만 엿보일 뿐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듯 자식 사랑이나 부부간의 애정 조차 매화향 처럼 은은하게 표현했는데, 한송이 매화꽃에 빠져 다가간 곳에 홀연히 나타난 직박구리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매조도 두컷을 보여주고 다시 들여다 본 뷰파인더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매조도를 받아든 시집간 딸은 아버지가 그려준 매조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강진에서 인편으로 보내온 매조도를 받아들고 뛸듯이 기뻐했을 표정을 생각해 보니 매조는 '기쁜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화투놀이로 점을 치는 사람들은 매조를 보며 무슨 기쁜 소식이 없을까 하고 화투장을 뒤집는지 모르겠지만, 매조도는 물론 세상만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 매조도 곁에 깨알 처럼 쓴 글씨 내용은 이러합니다.
사흘전 봄비가 오실 때 작년 이맘때 봐 두었던 매화가 궁금하여 다시 찾아간 그 자리에는 더도 덜도 아닌 매화 한송이가 피어나 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마치 먼 길을 나섰던 아이들이 동구밖에서 얼굴을 내밀며 기뻐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꿈결에서 어릴 때 어른들이 자신을 내려다 보며 흡족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요?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매화 한송이 앞에서 이리 보고 저리 보며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다시 발길을 돌렸는데 어디서 날아와 앉았는지 직박구리 한마리가 홀연히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매화 꽃봉오리를 쪼아 먹고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는지 몇컷의 그림을 남겼는데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마치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꿈속의 광경 같았습니다. 그 광경은 세상의 모진 법칙에 맞서 엄동설한을 겪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매조도 梅鳥圖'가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이었습니다. |
매조도는 정약용 선생이 부인이 보내준 낡은 치마폭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매조'를 그리고 시를 썼는데, 그 매조를 다시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니 직박구리가 아닌가 생각되며 직박구리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듯 싶습니다. 오래전에 만나 본 매조도는 선생이 부정을 담은 글과 매화 그림에만 정신이 팔렸을 뿐 정작 매화 나무에 앉은 한 쌍의 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매조도의 조류는 직박구리 였으며 한 쌍의 직박구리는 선생과 부인 홍씨의 애뜻한 사랑을 담았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매조도에 얽힌 선생의 시나 그림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복습삼아 끄적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산 선생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춘천 지역으로 이동을 하면 으례히 경춘가도의 시작점과 다름없는 다산 생가 쪽으로 자동차를 운전하게 되는데 지금은 팔당댐으로 막혔지만 댐으로 수몰되기전 두물머리 쪽 풍경을 생각하면 '고향의 봄'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며, 지금도 다산 생가 근처를 서성이면 선생이 어릴 때 본 고향의 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가 쓴 글 곳곳에는 고향의 정경을 담은 시가 주옥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15세에 부인 홍씨와 결혼한 선생은 정치적인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생활을 떠나기 전 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강진에서 홀로 유배 생활을 하며 두 아들과 딸과 부인 홍씨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야만 했습니다.(**다산선생은 15세되던 1776년 승지 홍화보(洪和輔)의 따님 풍산홍씨(豊山洪씨 1761~1838)와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요절하고 2남 1녀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사정은 어린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둔 부인 홍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옥바라지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쳐야 했으므로 부인 홍씨의 고생은 말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선생이 역적이 되었으므로 무엇보다 두 아들에 대한 벼슬길을 막은 형편이어서 선생이나 홍씨는 한시도 마음 편할날이 없었을 것이죠. 그 당시 부인 홍씨가 장롱을 정리하다가 문득 오래전에 입었던 다홍치마를 발견했는데, 그 치마는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가져온 여섯폭 치마였습니다. 그러나 그 치마는 오래되어 빛이 바래고 낡았지만 선생에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판단 되었을까요? 홍씨는 그 치마를 잘 정리하여 강진의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그 장면이 눈에 선하군요. 요즘처럼 택배로 부치면 하루만에 도착할 거리지만 당시 사정을 감안해 보니 그런 과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 장면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인 홍씨가 보낸 낡고 색이 바랜 치마를 받아든 선생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두 아들과 딸아이는 물론 부인 홍씨 때문에 그리움이 절절했던 순간에 받아든 낡은 치마는 선생의 눈시울을 얼마간 적셨을 것이며 그의 부정(父情)을 뒤흔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아비 노릇이라고는 오직 글 쓰는 재주와 그림 그리는 재주 밖에(?) 없었으므로 선생은 부인의 뜻을 헤아리기 시작했을 것이며 당신의 손길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홍씨의 마음 까지도 간파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거기까지 이르자 선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먹을 갈기 시작했을 것이죠.
그런 한편 선생은 낡은 치마를 펼쳐놓고 꽃다운 나이에 시집 온 후 맑은 치마처럼 퇴색한 부인의 모습이나 유배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 마저 들기도 했을 것이나 부인 홍씨나 자신의 변치않는 마음만은 영원히 나누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마폭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유배당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담아 전달했으면 하는 홍씨의 염원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일까요?
선생은 적당히 자른 치마폭 위에 두 아들을 위해 부인 홍씨가 하지 못한 교훈이 될만한 글을 써서 책으로 엮는(네 첩) 한편, 하나 뿐인 시집간 딸에게는 그림(족자)을 그려주기로 했습니다. 매화와 함께 새를 그려넣은 '매조도 梅鳥圖'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야깁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한 매조도는 이렇게 탄생됐고 다시금 들여다 본 매조도 속 조류는 직박구리와 너무 닮아 아예 직박구리로 단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부인 홍씨가 보내준 비단에 그린(1818년) 수묵담채화인 '매조도'(45cm X 19cm) 입니다. 현재 고려대박물관 소장
선생에게 아들 딸들에 대한 추억은 어릴적 두물머리에서 본 고향의 모습과 함께 딸에게 보낸 매조도는 두 부부가 화목하게 잘 살아라는 메세지와 함께 강진에 유배된 자신과 남양주 능내리에서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낸 부인 홍씨와 시공을 잇는 사랑의 마음(미안함과 함께)을 담은 게 아닐까요? 매조도에 써 넣은 선생의 시는 이렇습니다.
翩 翩 飛 鳥 息 我 庭 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앞 매화에 앉네
有 列 其 芳 惠 然 其 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깃들었네
亥 止 亥 樓 樂 爾 家 室
여기에 깃 들어 즐거운 가정 삼으려므나
華 之 旣 榮 有 - - 其 實
꽃이 아름다우니 열매도 가득하겠지
아마도 선생은 부인이 보내준 낡고 색바랜 치마폭에 글과 그림을 쓰고 그리면서 부인 홍씨는 물론 두 아들과 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을 것이며 애간장을 끊는듯한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오늘날 '하피첩 霞피帖-붉은 치마(紅..)를 은근하게 돌려서 표현한 말-'으로 불리는 선생의 유작을 보면 그저 선생의 담담함만 엿보일 뿐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듯 자식 사랑이나 부부간의 애정 조차 매화향 처럼 은은하게 표현했는데, 한송이 매화꽃에 빠져 다가간 곳에 홀연히 나타난 직박구리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매조도 두컷을 보여주고 다시 들여다 본 뷰파인더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매조도를 받아든 시집간 딸은 아버지가 그려준 매조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았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강진에서 인편으로 보내온 매조도를 받아들고 뛸듯이 기뻐했을 표정을 생각해 보니 매조는 '기쁜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화투놀이로 점을 치는 사람들은 매조를 보며 무슨 기쁜 소식이 없을까 하고 화투장을 뒤집는지 모르겠지만, 매조도는 물론 세상만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 매조도 곁에 깨알 처럼 쓴 글씨 내용은 이러합니다.
余 謫 居 康 津 之 越 數 年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洪 夫 人 寄 敞 裙 六 幅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歲 久 紅 剪 之 爲 四 帖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잘라 네 첩을 만들어 以 遺 二 子 用 其 餘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爲 小 障 以 遺 女 兒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선생은 자신의 처지와 부인 홍씨의 처지를 거울삼아 하나 뿐인 딸이 오래토록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동시에 부인 홍씨가 보내준 낡고 색바랜 치마폭 위에 두사람의 마음을 담아 더불어 행복하기를 소원하는 참 아름답고 기분좋은 모습입니다. 매화와 '직박구리'가 만든 매조도 일까요?... 행복한 3월 되시기 바랍니다. ^^* ** 자료출처 : 다산 유적지 http://www.nyj.go.kr/dasan/index.jsp 등 Boramirang SensitiveMedia 세상에서제일 작고강력하며너무 따뜻~한 Media 내가 꿈꾸는 그곳 www.tsori.net / Boramirang 내가 꿈꾸는 그곳./http://blog.kbs.co.kr/boramir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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