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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제중원'의 두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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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제중원'의 두얼굴
-제중원은 미국의 선교단체? 혹은 구한말 국립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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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에서 '제중원'이라는 타이틀이 커뮤니티에서 서서히 부각되며 인기 대열에 합류할 것 같은 기대치가 높아지는 걸 보고 있습니다. 백정의 아들인 황정(박용우 분)이 조선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인 제중원에서 양의를 배우며 신분의 벽을 뚫고 최고의 외과의가 되는 이야기를 그린 팩션 드라마이며, 주인공 황정은 실존 인물인 박서양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깁니다. 그 첫회가 SBS 방송에서 방송된다는 날 사이판 총격사건 최대 피해자가 누워있는 서울대학병원 재활의학과 병동을 취재차 방문 하면서 서울대학병원의 전신이 '제중원 濟衆院'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우치며 박재형 씨(관련 블로그 싸이판 총격사건 그후 더 붉어진 눈물  http://cafe.daum.net/saipanning )가 누워있는 825호실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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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총격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박재형씨가 사이판 여행 도착 첫날 총격에 의한 중상을 입은 채 불과 45분만에 한국으로 다시 귀국한 사실에 대해 잘 알고 계실 것이며 그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하반신 마비의 중환자가 되었다는 사실 까지 알았을 것입니다.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불과 두달 전에 일어났고 그는 현재 아내 박명숙 씨의 도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총상에 의한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아직 이렇다할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겸사 겸사 내용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한계령에서 일부러 서울 까지 찾아온 블로거 정덕수님(http://v.daum.net/link/5270121)과 함께 서울대학병원 재활의학과를 방문했던 것이며, 로비에 전시해 둔 제중원의 모습을 다시한번 상기하며 지금은 '의학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제중원을 한바퀴 돌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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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글을 읽는 동안 제중원과 사이판 총격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싶어하는 분들과 함께 제중원의 과거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와 함께 드라마가 제중원이 방영초기 부터 논란에 휩싸이는 정치적인 문제까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끄적이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커뮤니티에서 친일 드라마 논란을 불러오는 것과 함께 친미논란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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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언급한 박재형씨의 경우 제중원의 전신이었던 '광혜원 廣惠院' 설립 당시 고종황제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치명적인 '자상 刺傷'을 입자, 치료할 의원을 찾던 중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자 마이애미 의과대학 출신이었던 호레이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민영익을 살려내는 장면이 오버랩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용케도 이러한 사실을 위키백과가 잘 전하고 있어서 일반에 널린 이야기 보다 정확한 내용으로 판단되어 참고로 자료를 실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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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사이판 총격사건의 최대 피해 당사자인 박재형 씨는 사이판에서 긴급히 한국으로 후송되어 왔지만 총격으로 요추가 박살나는 한편 척추 속 신경이 회전하는 총탄에 의해 완전히 손상되었고, 그 손상으로 신경계가 전기 합선과 같은 작용이 나타나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도 아울러 전해 드립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전 제중원과 같은 서울대학병원에 누워 있지만 오늘날 인술은 그를 살려낼 수 조차 없고 그를 도와줄 조국도 이웃도 없이 옛 제중원 앞 재활의학과 병동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조선이 외세로 부터 자상을 입고 누운듯한 모습이자 우리나라의 왜곡된 근현대의 정치사를 보는듯 했습니다.





제중원 濟衆院

1885년(고종 22년) 갑신정변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閔泳翊)이 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치명적인 자상(刺傷)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고종이 민영익을 치료할 의원을 찾던 중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자 마이애미 의과대학 출신이었던 호레이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나타나 민영익을 살려냈다.

서양 의학에 관심을 가진 고종은 알렌을 궁정의 시의관으로 임명하고, 2월 29일 서울의 재동(齋洞,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서양식 근대 의료 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도록 윤허하였다. 광혜원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광혜원의 원장은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으로 불렸다. 광혜원은 같은 해 3월 12일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듬해인 1886년 3월 29일에는 양반 자제 중에서 학생 16명을 선발하여 이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하였는데, 이를 한국 근대 의학 교육의 시초로 본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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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백과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서양의학에 관심을 가졌던 고종이 '알렌'을 궁정의 시의관으로 임명하고 서양식 근대의료 기관인 광혜원을 설립하면서 우리나라 근대식 병원의 시초가 되었고, 이후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나중에는 '대한의원' 등의 이름으로 변천되고 있었습니다. 구한말 당시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바뀌는 모습과 같이 우리나라에도 상투를 자르고 양장이나 양복을 입는 등 서서히 외래 문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제중원의 건축양식 등이 '바로크 시대' 모습을 그대로 재현된 것을 보면 의식주 등 우리나라의 전통 양식들이 이때 부터 서서히 변화를 겪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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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자료를 참조하면 이런 변화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었던 김홍집(
김홍집 (1842년) [김굉집,김홍집 (조선의 문신)])은 개화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낯설고 우리와 모습, 생각, 말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생각과 함께, 청의 간섭을 물리쳐 자주 독립을 확립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개화를 찬성하는 급진 개화파는 좀더 편하고 발전된 생활을 하기 위해 개화를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편한 것 보다 우리나라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전통보다 편한 것을 우선 순위로 보는 사람들이 한심하기만 하다고 말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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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한편 개화에 찬성하는 김옥균(김옥균 [고균 김옥균,충달공 김옥균])의 세력들은 근래 주변 여러나라에는 우리들이 보지 못한 물건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 물건들은 모두 우리 생활에 쓸모가 있다고 말하는 한편,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의 주장들은 '좀 더 편하고 발전된 생활을 위해' 개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우리는 을사늑약의 폐해를 고스란히 겪으며 외세에 의한 우리의 정체성을 잃은채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폐해 한가운데 반드시 제중원이 있었다라고 말 할 수 없지만 오늘날 많은 정보들 가운데는 제중원을 알렌이 '설립'했다는 주장과 함께 '선교단체'의 하나로 보는 일각의 시각 등 때문에 드라마 소재로 등장한 제중원이 최소한 친일 또는 친미로 불리는 외세의 대표적인 개화문물 처럼 인식되는 한편, 드라마 제중원이 다시금 장로 정부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 처럼 인식되는 위험한 시도로 제중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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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등은 제중원에 대해 위와 같이 소개하고 있었던 반면에 '세브란스 병원사'에 의하면 제중원이 설립된 배경 등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끌며 이 부분이 드라마 제중원에 대한 정치적 시각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자 장로 정권에 충실한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선교전략'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하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사(Q&A)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된 시기는 언제부터 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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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년 4월 10일, 미국인 선교의사 알렌(H. N. Allen, 1858~1932)의 병원설립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여 개화파 홍영식의 집이었던 서울 재동(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을 세우면서부터입니다.1884년 9월, 최초의 선교의사로 한국에 온 알렌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서 심하게 부상을 당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입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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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세워졌고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개원 첫해만 10,0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고 하니 서양의학에 대한 당시 관심의 정도는 엄청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제중원은 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1887년 구리개(현재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 병원의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제중원은 정부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시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전자는 재정지원과 행정을, 후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파견 및 진료, 병원 운영 등을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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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알렌은 계획한 대로 한국 내 의료진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추진하였고, 드디어 1886년 3월 29일,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된 16명의 학생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1887년 9월,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취임하자 제중원의 책임은 헤론(J. W. Heron), 빈튼(C. C. Vinton)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병원의 운영은 점차 부실해졌습니다. 그러자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O.R. Avison, 1860~1956)은 정부에 제중원의 정상화를 위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마침 운영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었던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제중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완전한 사립기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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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에비슨을 비롯한 많은 선교의사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더욱 활발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고 몇 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알렌이 시작했던 의학 교육을 다시 체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때 해부학을 비롯한 다양한 의학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해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5년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에비슨은 방역의 총책임자로서 제중원 직원들과 함께 방역과 환자 치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항상 보다 나은 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1900년 미국에서 만난 클리블랜드시의 부호 세브란스(L.H. Severance, 1838~1913)에게서 병원설립기금 45,000달러를 기부받아 마침내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 편 세브란스빌딩 자리)에 병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 대신 기증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세브란스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에 의해 기부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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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은 10여 년 동안의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 1번에서 7번까지를 부여받았습니다. 1909년,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의학교로 개칭하였고 1913년에는 서울에 있던 각 선교 교파가 공동으로 세브란스를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전문학교 규칙을 반포했는데 일반 사립기관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비슨을 포함한 선교의사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인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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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전문학교 규칙을 반포했는데 일반 사립기관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비슨을 포함한 선교의사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인가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사립학교라는 특징을 발휘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같은 관.공립학교와 달리 '오직 한국인 학생들만을 교육시켜서 일본인은 한 명도 의사로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미국 선교부가 지원했지만 세브란스만큼 민족적인 학교'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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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6년 9월, 쉴즈(E. L. Shields, 1868~1941)가 세브란스병원에 간호부양성소를 세웠으며, 1915년에는 쉐플리 (W. J. Scheifley, 1892~1958)가 내한하여 한국 최초의 전문 치과학교실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세브란스는 한국민의 건강을 위해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시기에 진료 환자 중의 반이 무료 환자였는데, 주로 외국의 선교지원단체에서 보내준 경비를 사용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만 봐서는 광혜원 광제원 대한의원 등 모습이 햇갈리기 좋게 쓰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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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긴 문답형식을 빌어서 쓴 세브란스병원사 속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는데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시면 '일제'에서 '미제'로 옮겨간 모습과 함께 '선교사'가 등장하며 그 선교사는 알렌이라는 미국 사람이자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남긴 업적은 의료선교를 통한 의학도 배출과 함께 우리의 전통문화가 서서히 미국 등 서양문물에 빼앗기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직 한국인 학생들만을 교육시켜서 일본인은 한 명도 의사로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미국 선교부가 지원했지만 세브란스만큼 민족적인 학교'라고 강조하고 있는 결론부에서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간교한 술책이 깃든 것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미국의 선교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후 제중원을 인수 했고 마침내 오늘날 미국 문화를 전파하는 하나의 매개체로 자리잡았다는 이야긴데, 이 모습을 두고 개신교계에서는 제중원이 선교목적의 기관일 뿐 서울대학병원과 같은 국립병원의 전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본인 의사를 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민족적인 학교'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며 서울대 병원이 사용하고 있는 '제중원은 서울대병원의 뿌리'라는 주장을 일축하며 광혜원과 광제원은 "이름이 매우 비슷하지만 이 두 곳은 분명 다릅니다. 광혜원(제중원)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1885년 알렌의 건의로 설립되어 현재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입니다. 이에 비해 광제원은 조선정부가 1899년 서울에 설립한 내부병원을 개칭하여 세운 한방병원입니다. 그러나 광제원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일제 통감부에 의해 세워진 대한의원에 흡수당하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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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런 주장은 1980년대 초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입니다. 그 주장이 허구임은 이미 1998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에서 발굴한 자료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울대병원 홈페이지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대에서 제중원을 자신의 뿌리로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형식적으로 제중원이 '국립병원'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만 조선정부의 기관이었지 가장 중요한 의료활동에서는 선교사들이 독자성을 지니고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894년 9월 말 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되면서 정부와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되었고, 제중원은 순수한 사립병원으로 탈바꿈됩니다. 제중원이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조선정부가 세운 성균관이 국립서울대학교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서울대병원은 '국립병원'이었던 광제원 역시 자신의 뿌리라고 하는데, 지방의 국립대병원이 "우리도 '국립'이니 광제원은 우리의 뿌리다"라고 주장한다면 인정할지 의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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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중원이 미국인 선교사 알렌에 의해 설립된 것이자 선교목적'이라는 주장에 100% 동의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위키백과에 등재된 제중원의 내용은 수정이 불가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제중원의 설립목적이 그러하다면 그건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일이며, 개신교 집단 등이 주장하는 것 처럼 '민족적인 학교' 운운 하는 모습은 애시당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겉다르고 속다르게 표현한 수사에 불과한 모습이자 ,선교사들이 남의 나라를 침탈하기 위한 수단(타문화권 선교지는 그야말로 영적 전투장이다.진리를 대적하고 거스리는 이단들과 악의 세력에 대해서는 교단을 초월하여 함께 경계하고 피 흘리기까지 함께 싸워야 한다는 논리 등)에 불과한 모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교한 술책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제중원은 고종의 궁정 시의관이었던 알렌이 우리 전통의 인술을 펼치는 한방에 외과수술 등으로 대적하는 한편, 외래 의술을 정치적 선교 수단으로 변질시킨 모습 등을 오늘날 드라마 제중원이 '팩션'이라는 이름으로 안방에 전달하려 있고 미디어가 장악되고 통제된 장로 정부하에서 드라마 첫회 방영이 시도된 직후 친일 친미와 같은 역사적 곡절을 겪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설이 내린 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병동 앞의 제중원 모습은 바로크 시대의 건축 양식답게 우리 건축물과 달리 이질적이었고 돔형 건축물 꼭대기에 부착해 둔 시계는 곧 어두워 지는 시각을 가리키며 마치 유럽의 한 건축물을 대하고 있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판 총격사건으로 평생 불구자가 되었고 척추신경 손상으로 신경계 고통에 시달리는 박재형씨의 모습을 보며 이 땅에 들어 온 선교사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저 외래 의술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선교를 펼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들 문화를 남의 나라에 심으며 그들의 종교문화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점을 다시한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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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드라마 제중원을 본 시청자들이 게시판에 올린 글에 따르면 "친일과 제국주의에 앞장선 인물들을 미화했다", "우리 나라 개화파를 모독하는 발언이다" 등 역사를 왜곡하는 장면과 함께 극중 조선을 사랑하여 입국한 선교사(?)로 제중원을 설립하여 서양의학을 전파하는 의료 선교사로 묘사되는 장면은 오늘날 국민 다수의 바람과 반대로 달리는 장로 정부의 개신교계를 미화하는 장면으로 비치고 있어서 또다른 문화적 지배를 위한 드라마 소재로 제중원이 등장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미국령 사이판 관광을 위해 도착 첫날 45분만에 불의의 총격을 받은 박재형씨에 대해 장로 정부의 외교통상부가 박재형씨 등 총상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내린 조치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인터넷에나 호소해 봐라'는 모습과 같이 자국의 국민이 입은 피해에 대해 ' 나 몰라라'하며 뒷전을 피우는 모습 등은 구한말 제중원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의술이 정치적 이유 외 다른 이유가 없었고, 그들이 펼친 의술은 선교전략에 따라 계산된 거래 행위로 봉사라는 말을 무색케 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미국민이 한국에서 총격을 받거나 부산의 한 사격장에서 화재참사를 당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정운찬 안수집사(국무총리)가 일본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일이 엊그제 같고, 박재형씨가 사이판에서 불의의 서고를 당한지 두달이 지나는 사이 벌써 치료비만 1,600만원에 달하고 있고, 무엇보다 재활치료 등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언론에 잘못 알려진 내용(보상절차 끝남)과 다르게 보상절차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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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제중원으로 가는 길 모습이며, 위 그림들은 서울대학병원이 제시하고 있는 제중원(대한의원)의 모습 입니다. (대한의원 등에 관련된 포스팅은 따로 할 예정 입니다)

제중원의 본질은 인술을 펼치는 곳이지만 어느덧 드라마를 통해 선교지로 모습을 달리하며 왜곡되는 한편, 그 모습이 '민족적인 학교'로 둔갑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드라마 제중원의 제작의도가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첫회 방영분 부터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모습은 결국 제중원이 국립병원이 아니라 '미국의 선교본부'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 민족에게 시혜를 배푼 양의의 모습을 전해보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알량하게도 알렌을 통해 미국의 모습을 미화하려는 수작으로 비치는 모습은 결코 장로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자, 참여정부에 의한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친일 또는 친미세력들에 의한 문화적 침탈이 다시금 재현되는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제중원은 고종이 알렌을 궁정의 시의관으로 임명하고 서양식 근대 의료 기관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도록 윤허한 사실이지 선교단체 제중원을 허락한 사실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SBS 대기획 제중원'의 2회째 방송을 보고 있노라니 '호러스 알렌'이 목선을 타고 구세주 처럼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드라마가 팩션 이상으로 포장된 게 아닌가 하여 향후 전개 모습에 궁금증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까지 드라마 진행상황을 보면 제중원의 촛점이 '선교사 알렌'에 맞추어지고 있는 모습이자 극중 의상을 통해서 대한민국은 가난에 찌든 차림이며 개화기 당시 서양문물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모습이 드라마 초기 부터 미국 또는 미국의 선교사에 대한 미화 모습이 예견되고 있습니다. 제작지원 또한 '연세의료원'이 합세하고 있으므로, 제중원이 미국의 선교 단체로 개신교가 우리 근.현대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모습으로 그려질 것인지, 을사늑약 후 새로운 형태의 친일 친미주의자를 양산하는 모습인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고, 무엇보다 제중원이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이 아니라 미국의 해외 선교 본부 처럼 그려질지 주목됩니다. 드라마를 통해서 본 제중원에 대한 포스팅은 이어질 예정입니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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