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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비운의 여인 '장희빈' 잠든 서오릉 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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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여인 '장희빈' 잠든 서오릉 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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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뙤약볕이 내리 쬐던 지난 주말 오후, 서오릉 솔 숲에 들어서자 마자 마음이 편안해지며 시원해져 옴을 느꼈다. 서오릉 대부분의 산책로는 솔 숲에 가려 그늘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늘은 마치 어머니나 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듯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아마도 서오릉에 누워 잠든 선조님들이 후손의 방문을 기특해 하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일까? 가늘게 부는 바람의 느낌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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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으로,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으로,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로 구분하여 불렀는데 서오릉에는 5개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 순창원과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비운의 여인 희빈 장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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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한다. 비운의 여인 희빈 장씨의 대빈묘는 나중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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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사람과 함께 서오릉의 솔 숲을 거닐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는데, 벼슬을 한 망자가 생전의 계급에 따라 '능' 또는 '원' 그리고 '묘'와 같은 이름으로 사후에도 그 직을 계승하고 있는 모습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서오릉 한편에 모셔진 희빈 장씨의 대빈묘를 돌아보며 권력의 무상함과 함께 조선의 신분사회에 맞선 희빈 장씨를 떠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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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으로 불리웠던 희빈 장씨 '장옥정'은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남인의 후원으로 자의대비전 나인(內人)이 된 옥정은 대비의 후원으로 어렵지 않게 숙종을 만날 수 있었다. 스무 살(1680년) 청년 숙종이 열 한 살 때 얻은 동갑 부인 인경왕후 김씨를 잃어 외로움에 젖어 있다가 얼굴이 아름다운 옥정을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원자인 경종을 낳고 다시금 숙종으로 부터 사사될 때 까지 희빈 장씨는 파란만장한 권모술수에 빠지며 신분사회의 모략에 밀려 비운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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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네 정치인들 모습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별의별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있는데 모습만 다를 뿐 동서남북으로 흩어진 정치세력들은 각기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한편 민심을 도외시 하고 있는데 희빈 장씨가 살었던 조선의 역사속을 살펴봐도 특정인을 매도하기 위한 권모술수를 보면 기막힐 정도고 그 권모술수를 지켜보고 있는 왕의 입장에서 보면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아마도 역대 조선의 왕들이 단명하는 모습들은 시대적 모습외에도 이러한 스트레스도 한몫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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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장옥정을 모함한 무리들은 그녀를 폐위시키기 위해 희한한 주장을 했는데, 천재지변인 홍수 조차 희빈 장씨 때문에 일어난 재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장씨가 중전을 한번도 문병하지 않고,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저주했다며 모함하는 일이 들끓자, 희빈 장씨 옥정을 사랑했던 숙종은 결국 장희빈을 희생양으로 삼고 14세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자결을 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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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종의 딸로 신분제에 맞섰던 장씨는 당쟁 때문에 왕비까지 올랐으나 역시 당쟁 때문에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운의 여인이 잠들어 있는 서오릉의 솔 숲은 참으로 평화로운 정경을 만들고 있었지만, 이 솔 숲을 벗어나는 순간 다시금 증오와 복수가 거듭되는 세상으로 되돌아 가야 함으로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있는 백성들의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비운의 여인을 닮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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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을 방문하며 느낀 편안함은 희빈 장씨가 내 곁으로 다가와 "그래 잘 왔다. 손자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는데, 비록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권불십년과 같은 무상함을 깨우쳐 주는듯 했다.


서오릉에 있는 희빈 장씨의 대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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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본 희빈 장씨의 대빈묘

희빈 장씨의 대빈묘는 서오릉의 맨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녀의 비운을 말해주듯 역대 조선의 왕들의 릉 곁에 묻히지 못하고 소생 경종의 릉이 있는 성북구 석관동과 먼 곳에 위치해 있다. 희빈 장씨가 사사된 후 소생인 세자의 운명은 서인들이 세자를 제거하려는 노론과 보호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었고, 궁녀 최씨 소생의 연잉군(훗날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숙종은 재위 말년 노론 영수 이이명과 세자 교체를 논의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발 때문에 실패하고 세자가 끝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경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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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론은 경종이 즉위 초부터 경종을 윽박질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고,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다가 소론 강경파 김일경 등에게 역습을 당해 정권을 빼앗겼다. 그 후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고변이 이어지면서 많은 핵심당인들이 사형 당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노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연잉군이 임금(영조)에 즉위한 지 4년 후(1728) 이인좌 등은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계속이었다.<글 출처: 인동장씨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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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은 모두 서오릉의 솔 숲에 잠들어 있거나 장소를 달리하며 능이나 원이나 묘로 불리며 우리들로 부터 잊혀진 존재지만, 서오릉 솔 숲을 타고 전해지는 가는 바람과 함께 다시금 나로 하여금 비운의 여인을 일깨우며 억울함을 달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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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솔 숲에서 전해지는 가는 바람과 그늘은 마치 어머니나 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운듯 편안함을 느낀것은 비운의 여인 장옥정이 들려준 스토리텔링 때문이었을까?  서오릉에는 백성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같이한 연보라 싸리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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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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