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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세 할머니가 그린 '수채화' 보셨나요?
-시각장애인 위한 87세 박정희 수채화 展-
세상에는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로 널려있고 그들 스스로 빛인 양 소금인 양 자랑을 일삼으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어두워서 빛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세상이 날로 부패를 더해가거나 사람사는 맛을 내지 못해 간을 맞추어야 할 현상들로 나타난 일일 것이다. 정말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빛이 필요했고 소금도 필요했다. 그러나 빛을 자처하고 소금을 자처하고 나선 적지않은 사람들은 빛이고자 하며 빛을 가로 막는 일을 일삼았고 소금을 자처한 사람들 때문에 부패를 촉진시키는 일을 방치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들은 주로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지도자라는 이름 등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을 자처했지만, 우리 사회는 놀랄만큼 빠르게 어둠속으로 침잠되며 부패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쭉정이들로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니라서 적지않은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 나는 최근 한 할머니의 생애를 보며 문득 빛이기도 하고 소금이기도 한 음지속에 핀 환한 수채화를 만나게 되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었던 '박정희 수채화展'에서 였고 연로하신 할머니의 존함은 '박정희 朴貞嬉'여사 였다.
전시회에서 만난 시각장애인의 대모 박정희 할머니
박정희 여사(할머니가 훨씬 더 정감이 있어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나 언제나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 여자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인천 제2송림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근무하기도 했고, 1944년 평양의전 출신 내,소아과 의사 유영호와 결혼, 평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며 슬하에 4녀1남을 두었다.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친정이 있는 인천 율목동에서 6.25를 겪었고 1.4후퇴 때는 남쪽으로 내려온 시댁 식구들과 함께 23명의 대식구를 모시고 살았다.
박정희 할머니는 20여년간 유치원 원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얼마전 까지만 해도 연로하신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단출하게 살았으나 4년전 남편 유영호 선생은 세상을 먼저 떠났고 현재는 후학들을 위한 수채화 그림지도와 강좌 등으로 바쁘고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한국수채화 협회 공모전에 수차 입.특선을 할 정도로 다채로운 화가 경력을 갖고 있는 박정희 할머니는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현역 수채화가인 큰딸 명애와 수채화 모녀전을 갖기도 했으며 현재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런 박정희 할머니께서 지난 1997년 장애인의 날에 맹인들을 도운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 있어서, 최근 안사람을 통해 할머니의 근황을 들어보고 또 장애인을 둔 어머니들로 부터 할머니의 선행을 전해 들으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 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 것이다.<자료: 박정희 할머니 홈피 http://ilovegrandmother.com/ >
내가 박정희 할머니를 알게된 것은 안사람이 할머니로 부터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터 였다. 유화를 하던 안사람은 할머니의 수채화를 보자 마자 담백한 화풍에 매료되었고 할머니를 만나면서 부터 수채화 보다 어머니 같은 할머니의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에 시쳇말로 홀딱 빠지는 한편 할머니를 아는 주변사람들이 전하는 온정 때문에 할머니의 수채화는 신앙심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늦은 밤 먼길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 대한 자랑을 끝도없이 늘어 놓았다.
"...글쎄...난 저렇게 훌륭한 할머니 첨 봐..."
하며 시작되는 수채화 이야기는 수채화 처럼 사람을 포근하게 하는 매력이 넘치는 이야기들 이었고 아름답게 빛나는 서사시 같았다. 아마도 세상에 어둠이 넘쳐나도 할머니만 계시면 어둠은 그 어느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붓을 놓지않고 있겠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 때 까지 붓을 움직이며 수채화를 그리고 계시는데, 그 수채화들은 모두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고 전시회를 통해서 남겨진 수익금 전부는 시각장애인 등 불우한 이웃들에게 전해지며 그들에게 다시금 빛이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말(18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최된 '박정희 수채화 전'에는 관람객들로 넘쳐났는데, 그 중에는 할머니의 선행을 알고있는 분들과 독지가들이 앞을 다투어 먼길을 달려와 할머니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기분이 매우 흡족했고 안사람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된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대해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계신 할머니는 아직도 정정하신 모습이었다.
옆의 텅빈 전시실과 대조되는 할머니의 전시회에서 눈에 띄 모습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책 소설을 발행하고 있는 '준혁이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였는데 "...준혁이가 할머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부터 성격이 너무 밝아졌어요."라고 내게 전하는 말과 같이 할머니의 마력(?)은 아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할머니 스스로 아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니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고 준혁이의 그림은 어느새 밝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천 화평동 냉면골목 입구에 할머니의 화실로 쓰고있는 낡은 병원 건물에는 장애인 제자들과 함께 세상사에 찌들렸던 분들이 할머니를 만나 새로운 삶을 찾고있는 모습들이었다. 할머니 홈피에서 할머니의 생애 일면을 엿볼 수 있지만 6.25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끼니를 거르면서 까지 할머니는 동네 아이들을 거두었고 20여년간 유치원일을 도맡아 한 것과 같이 아이들을 너무도 귀히 여겼던 분이다.
전시회에 온 적지않은 분들이 당시 코흘리게 였었고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 할머니와 같이 이웃에 대해 사랑의 손길을 배푸는 사람들로 자라났으니 할머니가 아이들을 귀히 여긴 보람이 수십년만에 결실을 맺고 있었던 셈이며, 할머니의 부친이셨던 송암 박두성 선생이 못다한 일을 할머니가 대를 이어 하고 있엇던 것인데 그 일이 바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빛과 소금'이라는 명제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을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않을 것인데 평생을 앞을 못보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스스로 지팡이가 되었으니 시각장애인들이나 세상을 볼 수는 있지만 세상 욕심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에게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각장애인들 에게 할머니는 대모와 다름없었다.
할머니는 여태껏 집을 떠나 본 적이 없고 전시회를 통해 세상구경에 나설 만큼 엄격한 집안에서 살아온 반면 경성 여자사범학교 시절 부터 그려왔던 수채화를 지금껏 다작해 오고 계신 것이다. 그런 할머니께 바깥 나들이를 제안한 안사람은 바닷가로 할머니를 모시고 싶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반듯하지 못한 정물에 대해서는 반색을 했다. 가난하고 힘들드라도 올곧게 살아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난...부서진 배를 그리는 건 싫어..."
시각장애인의 손과 발이 되어준 할머니의 손
할머니 곁에는 시각장애인 처럼 보통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봐 왔을 것이며, 그들의 일그러진 삶 속에서 자신의 평생을 보냈는데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다시금 화폭에 담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사람이나 내가 할머니께 제안한 것은 인천에 살면서도 사방이 확 터진 바닷가의 밝은 풍경을 자주 접하지 못한 할머니께 환하고 밝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전시회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집안에서 접할 수 있는 정물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먼 바다를 향해 출항을 앞둔 작은 선박들을 늘 들고 다니시는 할머니의 스케치북에 그 모습들이 그려지길 원했는데 이제 할머니는 먼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더 그랬다.
"...나...90살 까지는 살겠지?...^^ "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과 발이 되어주셨던 할머니는 이내 전시장의 아이들을 크로키하고 있었고 할머니의 수채화가 걸려있는 전시실에는 유난히도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할머니 100살도 더 사실 거예요...")
Boramirang
87세 할머니가 그린 '수채화' 보셨나요?
-시각장애인 위한 87세 박정희 수채화 展-
세상에는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로 널려있고 그들 스스로 빛인 양 소금인 양 자랑을 일삼으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어두워서 빛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세상이 날로 부패를 더해가거나 사람사는 맛을 내지 못해 간을 맞추어야 할 현상들로 나타난 일일 것이다. 정말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빛이 필요했고 소금도 필요했다. 그러나 빛을 자처하고 소금을 자처하고 나선 적지않은 사람들은 빛이고자 하며 빛을 가로 막는 일을 일삼았고 소금을 자처한 사람들 때문에 부패를 촉진시키는 일을 방치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들은 주로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지도자라는 이름 등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을 자처했지만, 우리 사회는 놀랄만큼 빠르게 어둠속으로 침잠되며 부패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쭉정이들로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니라서 적지않은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 나는 최근 한 할머니의 생애를 보며 문득 빛이기도 하고 소금이기도 한 음지속에 핀 환한 수채화를 만나게 되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었던 '박정희 수채화展'에서 였고 연로하신 할머니의 존함은 '박정희 朴貞嬉'여사 였다.
전시회에서 만난 시각장애인의 대모 박정희 할머니
박정희 여사(할머니가 훨씬 더 정감이 있어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나 언제나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 여자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인천 제2송림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근무하기도 했고, 1944년 평양의전 출신 내,소아과 의사 유영호와 결혼, 평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으며 슬하에 4녀1남을 두었다.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친정이 있는 인천 율목동에서 6.25를 겪었고 1.4후퇴 때는 남쪽으로 내려온 시댁 식구들과 함께 23명의 대식구를 모시고 살았다.
박정희 할머니는 20여년간 유치원 원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얼마전 까지만 해도 연로하신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단출하게 살았으나 4년전 남편 유영호 선생은 세상을 먼저 떠났고 현재는 후학들을 위한 수채화 그림지도와 강좌 등으로 바쁘고 즐거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한국수채화 협회 공모전에 수차 입.특선을 할 정도로 다채로운 화가 경력을 갖고 있는 박정희 할머니는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현역 수채화가인 큰딸 명애와 수채화 모녀전을 갖기도 했으며 현재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런 박정희 할머니께서 지난 1997년 장애인의 날에 맹인들을 도운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 있어서, 최근 안사람을 통해 할머니의 근황을 들어보고 또 장애인을 둔 어머니들로 부터 할머니의 선행을 전해 들으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 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 것이다.<자료: 박정희 할머니 홈피 http://ilovegrandmother.com/ >
내가 박정희 할머니를 알게된 것은 안사람이 할머니로 부터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터 였다. 유화를 하던 안사람은 할머니의 수채화를 보자 마자 담백한 화풍에 매료되었고 할머니를 만나면서 부터 수채화 보다 어머니 같은 할머니의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에 시쳇말로 홀딱 빠지는 한편 할머니를 아는 주변사람들이 전하는 온정 때문에 할머니의 수채화는 신앙심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늦은 밤 먼길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 대한 자랑을 끝도없이 늘어 놓았다.
"...글쎄...난 저렇게 훌륭한 할머니 첨 봐..."
하며 시작되는 수채화 이야기는 수채화 처럼 사람을 포근하게 하는 매력이 넘치는 이야기들 이었고 아름답게 빛나는 서사시 같았다. 아마도 세상에 어둠이 넘쳐나도 할머니만 계시면 어둠은 그 어느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붓을 놓지않고 있겠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 때 까지 붓을 움직이며 수채화를 그리고 계시는데, 그 수채화들은 모두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그리는 그림이고 전시회를 통해서 남겨진 수익금 전부는 시각장애인 등 불우한 이웃들에게 전해지며 그들에게 다시금 빛이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말(18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최된 '박정희 수채화 전'에는 관람객들로 넘쳐났는데, 그 중에는 할머니의 선행을 알고있는 분들과 독지가들이 앞을 다투어 먼길을 달려와 할머니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할머니는 기분이 매우 흡족했고 안사람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된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대해주셨는데 지팡이를 짚고 계신 할머니는 아직도 정정하신 모습이었다.
옆의 텅빈 전시실과 대조되는 할머니의 전시회에서 눈에 띄 모습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책 소설을 발행하고 있는 '준혁이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였는데 "...준혁이가 할머니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부터 성격이 너무 밝아졌어요."라고 내게 전하는 말과 같이 할머니의 마력(?)은 아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좋아하는 점도 있었겠지만 할머니 스스로 아이들과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니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고 준혁이의 그림은 어느새 밝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천 화평동 냉면골목 입구에 할머니의 화실로 쓰고있는 낡은 병원 건물에는 장애인 제자들과 함께 세상사에 찌들렸던 분들이 할머니를 만나 새로운 삶을 찾고있는 모습들이었다. 할머니 홈피에서 할머니의 생애 일면을 엿볼 수 있지만 6.25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끼니를 거르면서 까지 할머니는 동네 아이들을 거두었고 20여년간 유치원일을 도맡아 한 것과 같이 아이들을 너무도 귀히 여겼던 분이다.
전시회에 온 적지않은 분들이 당시 코흘리게 였었고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 할머니와 같이 이웃에 대해 사랑의 손길을 배푸는 사람들로 자라났으니 할머니가 아이들을 귀히 여긴 보람이 수십년만에 결실을 맺고 있었던 셈이며, 할머니의 부친이셨던 송암 박두성 선생이 못다한 일을 할머니가 대를 이어 하고 있엇던 것인데 그 일이 바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빛과 소금'이라는 명제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을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않을 것인데 평생을 앞을 못보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스스로 지팡이가 되었으니 시각장애인들이나 세상을 볼 수는 있지만 세상 욕심에 눈이 가려진 사람들에게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각장애인들 에게 할머니는 대모와 다름없었다.
할머니는 여태껏 집을 떠나 본 적이 없고 전시회를 통해 세상구경에 나설 만큼 엄격한 집안에서 살아온 반면 경성 여자사범학교 시절 부터 그려왔던 수채화를 지금껏 다작해 오고 계신 것이다. 그런 할머니께 바깥 나들이를 제안한 안사람은 바닷가로 할머니를 모시고 싶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반듯하지 못한 정물에 대해서는 반색을 했다. 가난하고 힘들드라도 올곧게 살아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난...부서진 배를 그리는 건 싫어..."
시각장애인의 손과 발이 되어준 할머니의 손
할머니 곁에는 시각장애인 처럼 보통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봐 왔을 것이며, 그들의 일그러진 삶 속에서 자신의 평생을 보냈는데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다시금 화폭에 담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사람이나 내가 할머니께 제안한 것은 인천에 살면서도 사방이 확 터진 바닷가의 밝은 풍경을 자주 접하지 못한 할머니께 환하고 밝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전시회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집안에서 접할 수 있는 정물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먼 바다를 향해 출항을 앞둔 작은 선박들을 늘 들고 다니시는 할머니의 스케치북에 그 모습들이 그려지길 원했는데 이제 할머니는 먼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더 그랬다.
"...나...90살 까지는 살겠지?...^^ "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과 발이 되어주셨던 할머니는 이내 전시장의 아이들을 크로키하고 있었고 할머니의 수채화가 걸려있는 전시실에는 유난히도 아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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