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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수표교가 '남산'으로 올라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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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가 '남산'으로 올라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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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자리를 옮긴 수표교 아래에는 보라빛 붓꽃이 한창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수백년 전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 아래에 서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이곳 수표교 아래에서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맑은 물속에서 노니는 작은 피라미들의 몸짓을 봤을 것이며 빨래를 두드리는 망망이 소리가 다리밑에 메아리 치며 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 아침 부지런한 사람들이 바삐 한양을 오갔을 수표교는 남산 기슭 장충동의 물도 흐르지 않는 냇가에서 박제된 듯 아무도 봐 주지 않는 가운데 이제 막 피어난 붓꽃들과 조용히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5월 19일) 아침 7시 30분 경에 본 고풍스러운 수표교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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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나는 수표교의 매력에 이끌려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릴 제3차 C40 세계도시기후정상회의 개회식 프레스 등록을 미룬채 수표교 아래를 서성이고 있었던 것인데, 청계천의 수표교는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던 천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얕은 천은 오염이 불가피 하게 됐다. 수표교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라 불리웠고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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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후 영조 36년(1760)에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청계천문화관) 영조 즉위 당시 청계천이 자주 범람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되자 청계천을 정비하는 대공사를 벌였다고 하고 여러 대신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를 했으나 영의정 홍봉한을 비롯한 뜻있는 대신들과 국가사업을 발벗고 도왔던 백성들의 힘으로 성공적으로 끝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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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힘들었다던 오간수문 공사는 몇 주는 걸릴거라던 공사를 단 6일만에 끝냈다고도 한다. 청계천이 우아하고 품위있는 하천의 모양을 갖춘 장면이고 조선의 도읍지 한양이 '서울'로 바꿔 부르기전 청계천은 조선조 500년 동안 조선의 역사와 함께 수도를 관통하고 있었고 수표교의 '庚.辰.地.平'명칭이 말해주듯 수위를 첵크할 뿐만 아니라 청계천을 오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마차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다리였다.


수표교水標橋
한번 둘러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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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는 화강암을 짜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도 2단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했고 난간은 연꽃봉오리, 연잎 등을 주제로 설계해 놓았는데 그 조각들이 다리 전체와 잘 어울려 고풍스럽고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청계천 수표교가 남산으로 올라간(?) 까닭은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인데, 일제 강점기 당시 흔했던 염색 공장들이 청계천 주변에 많이 들어서면서 청계천은 오염되기 시작했고 한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부터 많은 물자와 의복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이 이런 공장들을 생겨나게 했다고 한다. 따라서 무분별하게 들어선 공장 하수와 오물, 쓰레기 때문에 청계천은 생활하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는 한편 빨래는 커녕 악취가 풍기는 하수도로 전락하면서 청계천을 덮어버리는 첫번째 수난을 당하면서 수표교는 남산으로 피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이명박 전서울시장이 복개공사로 청계천을 덮어둔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복원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청계천은 이전의 하천이 아니라 인공천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다리공사를 독려했던 영조임금이 보면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영조임금이 기가막힐 노릇 두가지는 화강석으로 만든 거대한 돌덩이를 천도 없는 남산으로 가져다 놓은 것에 놀라고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 청계천을 뒤덮는 공사를 하는 한편 다시금 뜯어내는 공사를 통해서 인공천으로 만든데 두번째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서울시가 청계천 공사를 하면서 수표교를 다시금 제자리로 가져다 놓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옮기는 과정에서 훼손이 불가피하여 이렇게 남산기슭 장충동에서 세월을 첵크하는 '역사교'로 남아 이른 아침에 방문한 나와 조우한 것이었다.

지금 서울에서는 역사적인 C40 세계도시기후정상회의가 내일 모레까지 열리고 있고 세계 도처의 거대도시 시장 등이 참석하여 '온실가스 감축' 문제를 놓고 지구를 살려보고자 하는 범 세계적인 차후 행동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나는 이 회의를 취재하고 있는 시민기자인 셈인데 청계천 수난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현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이 적지않았음을 한 눈에 알 수 있고 인류문화사를 통털어 오늘날의 세계처럼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았던 시기도 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청계천이 복개되던 시기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개발이 한창진행되면서 수표교가 남산으로 피신하고 청계천이 인공천으로 바뀌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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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있어야 할 수표교가 남산으로 올라가게된 사연은 오염된 하천을 덮어버린 절차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함부로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지구온난화를 가속화 하는 주범으로 미래를 살아야 할 우리 후손들에게는 치명적인 자연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고 빌클린턴(클린턴재단) 전 미국대통령이 C40 세계도시기후정상회의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밝힌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생활방식을 고수하면 남북극의 얼음이 고수한 만큼 사라지게 될 것이며, 가까운 미래에는 해수면 높이가 점차 상승하여 표고가 낮은 섬들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한편, 홍수나 한파등 이상기후가 발생하여 인류를 괴롭히게 될 것인데 수표교는 청계천의 홍수지표를 알려주는 역할만 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현대인들의 판단 수위를 첵크하는 귀중한 역할을 동시에 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하늘의 뜻이 담긴 역사적 유물이다.

베스트 블로거기자
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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