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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물시장서 만난 '패티김'의 청색시대 얼마전에 방문한 서울 신설동의 '서울 풍물시장'은 장소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풍물들 때문에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곳에는 나의 청춘기와 함께 했던 각종 물건들이 색바랜 채 줄지어 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각각의 평범하지만 희귀해진 물건들은 저마다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풍물시장에 나온 물건들은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것들도 있는가 하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선조들이 사용하던 물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물건이 되었던 간에 그 물건들은 풍물시장 속의 한 품목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꽤 오래된 물건들 앞을 서성이다가 LP를 잔뜩 쌓아둔 한 가게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의 한 얼굴이 앨범의 표지에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패티김 patti kim'으로 불리는 김혜자님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의 근황에 의하면 50주년 기념 디너쇼가 계획되어 있었고, 그녀가 출연한 한 방송에서 그녀의 나이가 70세(1938년 2월 28일 ~ )라는 사실을 접하면서 내 나이를 잊고산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가수로 데뷔한지 50년이 되었고 20살 청춘기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잘알려진대로 패티김은 1959년 미8군 쇼로 데뷔한 보기드문 가창력을 소유한 대형가수였고, 작고한 길옥윤씨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빛과 그림자,서울의 찬가,사랑하는 마리아,못잊어 등 수십곡의 히트곡을 남겼지만 길옥윤씨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패티 페이지를 좋아한 그녀는 이름조차도 패티 페이지와 비슷한 패티김으로 짓고 패티김의 노래를 번안한 곡 'I went to your wedding' 등을 부르면서 미8군쇼를 대중속으로 끌어들이고, 전쟁의 폐허와 가난 속에서 헤어나고자 했던 국민들에게 미국속 달콤한 문화를 이땅에 심는 역할을 하며 진정한 리사이틀 무대의 디바diva로 부상했다. 특히 미8군이라는 낮선 무대에서 태동한 길옥윤과 패티김의 빅밴드와 화려한 뮤지컬 사운드가 뿜어내는 사랑과 이별의 노래들은 당시 몇몇 가수가 부르던 청승맞은 노래하고는 분명한 격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의 50~60년대 스탠다드 팝 뮤지션의 이름을 모방한 것과 같이 매혹적인 풍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로 길옥윤과 헤어진 이후에도 작곡가 박춘석씨와 함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과 같은 스탠다드 넘버들을 쉼없이 내 놓은 이 시대의 진정한 '국민가수'였으며 대형가수였다. 그런 그녀의 청색시대가 담긴 LP음반에 그려진 그녀의 모습과 얼마전 방송에서 본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달라진 게 무엇일까 생각해 봤는데, 70대에 들어선 지금도 그녀는 LP판의 모습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중 하나로 팬들을 위해서 저녁에는 야채 등으로 소식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풍물시장을 들러서 풍물시장에서 찾아 낸 것은 패티김이었고 풍물시장의 위상이었던 것이다. 풍물시장은 1950년대 전쟁 후 고물상들이 주를 이루면서 벼룩시장이나 만물시장. 도깨비시장 등으로 불리며 초기 풍물시장의 형태를 유지하며 1973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로 삼일아파트를 중심으로 중고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런 한편, 풍물시장은 골동품상이 몰려들면서 한때 130여개의 골동품 상으로 늘어나긴 했으나 그뿐이었고 1980년대나 90년대에는 서울의 근대화 바람이 불면서 중고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서울의 현대화 바람은 거셌다. 1986년 아시안 게임유치 이후로 88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청계천로 4차선 중 2개차선이 벼룩시장으로 돌변하며 '도깨비시장'을 형성하던 모습은 서울시와 풍물시장 상인간 협의를 거쳐 신설동에 새로운 신식 건물을 짓고 이름도 '서울 풍물시장'으로 개명한 것이다. 현대화된 서울 풍물시장...내부로 들어가는 길 그동안 황학동과 동대문 운동장을 힘겹게 전전하던 풍물시장 상인들은 달라진 세상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옛 풍물시장의 향수에 젖어(?)있는 동안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떠 밀리는 듯 했지만, 불행중 다행히도 황학동의 명성을 이어갈 '서울풍물시장'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풍물시장에서 만난 LP음반 속의 패티김이 국민가수와 대형가수로 영욕의 세월을 뒤로한 채 한 시대를 풍미해 온 것과 같이 서울풍물시장도 그와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풍물시장이 각고의 노력으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 진정한 서울의 명소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었다. 패티김이 스탠다드 팝 가수의 이름을 모방하여 오늘에 이르고 길옥윤과 같은 뮤지션이 없었다면 결코 패티김의 청색시대나 오늘의 명성은 없을 것으로 사료되어, 비록 상인들의 의지나 의사에 반하여 그들 본래의 이름이 바뀌었지만 서울의 명물답게 서울시나 서울풍물시장 상인들이 서울 속 풍물을 세계적으로 잘 가꾸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다.
풍물시장은 이렇듯 풍물시장속에서 만나는 그 어떤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화려했던 청색시대를 만날 수 있는데 그 속에는 반드시 영욕의 세월이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작은 물건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패티김의 청색시대와 함께 살아 온 풍물시장이 새삼스럽게 고귀해 보인다. Boramirang **서울풍물시장 찾아가는 길 http://pungmul.seoul.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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