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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스카이라인서 본 고풍스러운 '덕수궁'의 가을



스카이라인서 본
고풍스러운 '덕수궁'의 가을


덕수궁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궁궐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덕수궁 돌담길'을 연상하며 찾아봤음직 한 곳이며 굵직한 미술전이 열리는 덕수궁 미술관 때문에 일부러 이곳을 찾지 않으려 해도 가 봤을 고궁인데 서울에 있는 고궁 중 제일 작은 규모의 덕수궁은 돌담길 때문에 더 유명해진 것 같기도 하다.



왕족이 아닌 일반인들이 담너머 궁궐속 모습이 궁금했던 것인지 이곳을 서성이던 연인들이 많기도 했고 때문에 추억도 많았겠지만 쓸데없는 소문들로 더 유명하다. 이른바 전설로 불리는 그 소문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인데,



글쎄다. 어차피 헤어질 운명이라면 기왕의 추억 한편 정도는 아름답게 간직하고자 했던 것일까? 확인도 되지 않은 소문은 그저 붙여 본 이야기 일 뿐 요즘은 덕수궁 돌담길이 아니어도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즉시 보따리를 챙기는 연인들도 많은 걸 보면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을 많이도 부러워 했나보다.


 
나 같은 경우도 덕수궁에 자주 가 보는 편은 아니지만 봄 가을에 고풍스러운 궁궐 곁으로 피어나고 곱게 물들어 가는 나무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가끔씩 찾는곳이다. 특히나 서울에 있는 궁궐들은 주변의 산과 너무도 잘 어울려서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할만한 건축물인데 막상 우리나라나 서울을 대표할만한 상징적인 건축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실망스럽다.



'다이나믹 코리아'를 지향하며 '하이서울페스티발' 속 서울의 모습은 낮선 풍경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대한민국이나 서울을 기억할 때 딱!~ 떠 오르는 이미지가 빈약하다는 말이다. 겨우 사물놀이 풍경이나 한복나들이와 큰북을 치는 장면으로 우리를 세계에 알리기에는 너무 빈약해 보인다.

세계의 수도들 속에는 각각 그 나라나 수도를 상징하는 건물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이를테면 두바이에 있는 고층빌딩이나 파리에 있는 에펠탑이나 맨하탄의 여신상 같은 경우다. 그러면 우리 서울에는 남산타워?...생뚱맞다.


 
만약 서울이 아름다운 고도古都라는 것을 오래전 부터 세계속에 홍보하며 고풍스러운 건물의 모습들을 지겹도록(?) 알렸드라면 서울에 굳이 새로운 고층빌딩을 건축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수메르 문화속 피라미드 보다 더 화려하고 소박하며 아름다운 건축미에 깊숙히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을런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면 꿈에도 그리는 곳이 서울이 아니겠는가? 어디메서 산과 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수도를 본적이 있었겠나 말이다. 어제오전, 덕수궁을 다녀 오면서 스카이라인서 본 고풍스러운 '덕수궁의 가을'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덕수궁 근처 높은 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참으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데 정작 이런 모습은 덕수궁의 주인이었던 고종황제 조차도 보지 못한 풍광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런 모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고종이나 조선시대 때 왕들이 살아 있다면 블로거뉴스에 접속하게 하여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필요하다면 메일을 보내서 행복을 함께 나누고도 싶어진다. ^^ 그런데 그분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들이서 덕수궁의 전설이 딱 맞아 떨어진다. 내가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만난 수문장들이 교대식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나와 함께 동행(?)했던 사람은 덕수궁에 살고 있던 과거의 사람들이다.






































 잘 아시는 정보지만 '덕수궁'에 대한 기록들을 보시면서 그림을 대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일 거라는 생각으로 옮겨본다.

덕수궁 (조선 건축)  [德壽宮, 경운궁]


 
덕수궁 /덕수궁 배치도
사적 제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령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圜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仁化門및 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大安門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중앙에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전의 뒷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으며,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령전이 있다. 함령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이 있으며,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전인 중화전의 주위에 회랑이 없어 다른 궁궐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현재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중화문·함령전·즉조당·준명당浚明堂·석어당·덕홍전과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과 정관헌 등이 남아 있다. 서양식으로 세워진 석조전과 정관헌은 주변의 한식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건축양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의 본래 모습이 상당히 손상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로 본래 일반사가의 집을 궁궐로 꾸몄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덕수궁석조전
석조전
/석조전(1910), 덕수궁에 있는 근대서양식 ...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설계는 영국인 G.R. 하딩이,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공사감독은 한국인 심의석沈宜碩,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M.H. 데이빗슨 등이 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정관헌
정관헌
/정관헌(1900 이전), 전통목조건축 요소와 ...
덕수궁 안에 있는 양관洋館 가운데 하나. 함령전 북쪽에 있으며 190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종의 연유宴遊)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양옥이라고는 하나 팔작지붕 등 전통목조건축의 요소가 많이 있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바깥두리기둥은 처마를, 안두리기둥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지붕은 안두리기둥이 받치는 부분까지만 팔작지붕을 씌우고 바깥두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분은 지붕을 덧달아내어 퇴를 만들었다. 안쪽의 독립기둥은 기둥 밑부터 기둥 머리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기둥 머리는 둔중한 느낌을 주는 로마네스크풍으로 만들었다. 베란다에 두른 나무기둥과 처마장식 및 동제 난간이 매우 정교하다. 전체적으로 전통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건물로서 근대 서양식 건축의 도입을 보여주는 건물로 주목된다.

덕수궁중화전
중화전 /중화전(1905 중건), 덕수궁의 정전, ...
덕수궁의 정전.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궁궐 중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정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이던 것이 1층이 되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높은 2층 월대 위에 세워졌다. 기단에 회랑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남쪽 계단 앞에는 품계석品階石이 각각 12개씩 배열되어 있다. 원형 주좌의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올린 다포계로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궁궐건축의 상례를 따르고 있다. 외부 살미첨차는 3중으로 앙서를 조작하였고, 기둥머리에는 후기 건물에서 흔히 쓰는 안초공按草工을 두어 기둥머리의 허전함을 덜고 있다. 가(架構는 2중량 구조이며 2개의 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있다. 뒷줄에 있는 고주 사이에 어좌御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닫집을 설치하였는데 닫집의 천장에는 쌍룡雙龍이 새겨져 있다.<다음백과>

朴彦坤 글


 


'수문장 교대식'이 있는 덕수궁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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