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베껴 간
아름다운 '공주 공산성'
글 제목에 '일본이 베껴 간 아름다운 공주 공산성'이라 써 놓으니 근거도 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것이니 태클을 거는 귀찮은 일은 삼가해 주기 바란다. 지난 화요일 오후, 계룡산 대자암을 들러서 법문을 듣고 상경하는 길에 시간이 남아서 들른 금강 곁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公山城을 둘러 보았다. 공산성은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기록에 의하면 공주공산성은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包谷型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拱北樓:北門와 암문暗門·치성雉城·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는 영은사靈隱寺·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驆事蹟碑와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고, 만하루(挽河樓址·임류각지臨流閣址·장대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에는 보조산성이 있어 공산성을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일화도 있다."고 전한다.
흐름이 멈춘듯한 금강의 오후는 졸고 있는 듯 했다. 파아란 수면 곁으로 은빛 갈대가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제외하고 움직이는 것은 공산성철교 위를 걷는 몇몇의 사람들 뿐이었다. 공주시가 메이저리거 박찬호에 의해서 일반에 회자된 것을 제외하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 외에 공주시나 공산성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 공주시나 공산성을 모르거나 까마득히 잊고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나는 공산성을 보는 순간 일본국의 천황이 살고 있다는 '에도성'을 떠 올리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1,000년도 넘은 훨씬 이후에 건설된 에도성이 하필이면 공산성을 보며 떠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남아서 공산성으로 올라가 봤다.
공산성은 규모로 보면 성城이라고 보기엔 규모가 너무도 작아 보였다. 그러나 이 성이 축조될 당시의 인구대비 백제국의 위상으로 보면 결코 작지만은 않았는데 금서루를 통과하여 금강이 잘 조망되는 성벽으로 걸어가는 동안 이 성을 축조한 선조님들의 혜안에 탄복하고 있었다. 자연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공산성은 혹시라도 있을 침략자들에게는 결코 쉽게 공략될 성이 아니었고 성이라기 보다 하나의 커다란 집으로 보였다. 공산성 가까운 곳에 무령왕릉이 있다.
대체로 많은 성들은 높은 산악에 위치해 있는 반면 공산성은 주변에 있는 산을 이용하지 않고 강을 이용했다는 점이 특이했다. 가까운 곳에 험준한 계룡산이 있었음에도 굳이 금강곁에 공산성을 구축할만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대략 몇가지 재미있는 이유가 떠 올랐다.
우선 공산성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금강을 건너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데 먼길을 쳐들어 온 적들이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강을 건너는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공산성을 지키는 입장에서는 '배수진'을 친 형국이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전투에 임했을 것 같다. 뿐만 아니었다. 보통의 산성에서는 퇴로가 확보되지 않아서 성이 함락되면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 성안에 피신해 있던 왕은 물론 백성들 까지 몰살을 하거나 포로가 될 게 뻔 한데 공산성 아래 금강변에 전마선 몇척만 준비해 두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유유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인가? 공산성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나 공산성에 기거하는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금강을 끼고 있는 공산성은 마치 천국과 같은 풍광을 제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기도 했을 것 같다. 백제국이 멸망한 이유도 이런 수비적형태의 유유자적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이들은 오래전 부터 눈여겨 봐 두었던 일본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서두에 공주 공산성을 두고 일본이 베껴 간 것으로 추정했는데 그 이유는 금강의 지형지물을 그대로 본뜬(?) 것 같은 에도성이나 오사카성의 모습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산재한 산성과 달리 평원에 성을 지으면서 성 둘레에 깊은 못을 둘러 외부의 침입자들로 부터 안전하게 성을 지키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축성 초기때 부터 일부러 물을 끌어다 놓은 것인데, 백제국의 문화적 영향 아래에 있던 일본국의 성을 쌓는 축조방식은 그들의 선조인 백제국 사람(?)들의 DNA속 거처가 그대로 재현된 게 아닌가 생각되어졌고, 공산성을 보는 순간 내 머리속을 스치는 것은 에도성이나 오사카성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에도성이나 오사카성을 축조했지만 공산성의 규모로 보아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크게 힘들이지 않고 이 성을 축조했을 것으로 생각되어져 다시금 선조님들의 지혜에 탄복했던 것이다. 혹시나 에도성이나 오사카성을 축조한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할지 모르지만 일본의 성들은 겉모습만 다르지 백제국의 지형지물을 추억하고 있는 그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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