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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죽음을 사흘 앞두고 쓴 글씨



죽음을 사흘 앞두고
쓴 글씨 '판전板殿'


죽음을 사흘앞 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서울 삼성동 수도산에 있는 봉은사에 가면 죽음을 사흘 앞 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선생의 작품들은 많이 접해 본 사람들도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글씨가 봉은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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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코엑스에서 영화도 볼겸 겸사로 봉은사에 들러서
선생이 이 땅에 살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판전板殿'을 잠시 둘러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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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병환중의 몸을 이끌고 봉은사를 자주 찾은 것은 평소 그의 불심이 한몫 거들었겠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을 만나 보면 그는 봉은사에서 만난 '화엄세계'로 들어서기 위해서 세상에서 종지부를 찍은 듯
그의 마침표는 힘이 느껴짐과 동시에 너무도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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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씨가 걸려 있는 판전 안에는 대방광불화엄경 목판본 3133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로
불교의 핵심을 가장 깊게 담고 있는 경전이 있습니다.

이 귀중한 경판의 보존을 위해 판전의 바닥은 습기 방지를 위해서 구들장으로 만들었으며
환기가 잘 될 수 있도록 사면에 문을 달아 놓은 게 특징이라고 합니다만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컷습니다.
그러나 그 목판본들을 눈으로 확인해 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화엄세계의 모습이 목판본에 기록되어 있겠지만
판전에 쓰여진 선생의 두 글씨만 보더라도 이미 그 세계를 만난듯 넉넉함이 더해졌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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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간미가 더해진 기록들에 의하면
그는 생전에 아내에게 너무 자상한 남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위대한 예술가이자 학자며 청렴강직한 관료였던 선생도
아내 이씨에게 만큼은 사사로운 유배생활의 일상들과
아내에 대한 애틋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장문의 언문(한글)편지에 담아 보냈다고 전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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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은 입맛이 매우 까다로워 한번 전달 되려면 몇 달씩 걸리던 그 시절에도
 본가의 아내한테 마치 투정 부리듯이 밑반찬 이것 저것을 부쳐달라고 애교 섞인 내용으로 한글 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흘림체'의 원본 편지가
처음에는 충남예산에 있는 선생의 종가에 소장 되어 내려 오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40여 통 정도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소한 기록에 의하면 요즘의 우리들 일상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두 글씨를 대하는 순간 그가 산 세상의 족적은 너무도 커 보였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1786~1856(정조10~철종7) 조선 후기 학자. 서화가. 금석학자로 자는 원춘, 호는 추사이외에 완당. 예당이 있다. 본관은 경주이며 충남예산의 명망 있는 가문의 출신으로 6세 때 이미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이자 유명한 정치가이며 추사 선친의 친구이기도 했던 박제가의 눈에 띄어 그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1809년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24세 때 중국의 연경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40년 윤상도의 옥사(당파싸움)와 관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9년 만에 풀려났고 51년에는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에 관련되어 함경도 북청에 유배 되었다가 다음해에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특히 그의 학문은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들도 입을 모아 <해동제일통유>라고 칭찬 하였다고 한다. 서예에서는 역대 명필들을 연구하여 그 장점만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를 제주 유배기간에 완성시켰다. 그리고 금석학에도 밝아 북한산에 있는 비가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순수비라는 것과 '진흥'이라는 칭호도 진흥왕 생전에 사용한 것임도 밝혀 냈다. 또한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400여권의 불경과 불상 등을 중국에서 가져와 봉은사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촉독>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완당집> 작품에는 그 유명한, 추사의 그림과 글씨의 절정 품인 세한도와 그 외에 묵죽도 목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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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저는 선생이 거닐었을 봉은사 경내로 발길을 옮기면서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물음이
'죽음을 사흘 앞두고 쓴 글씨'였습니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파란만장하다고 해야 할 만큼 그도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는데
그가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서 노구를 이끌고 봉은사에 들러 마지막으로 먹을 갈기 시작했을 때 쯤 
그의 필적에서 먹이 끊기듯 사라지는 모습처럼 그의 생애도 마감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제가 거닌 수도산 봉은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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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판전을 뒤로 돌아서는 길에는 대웅전 앞에서 불자들의 기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원은 대체로 '소원성취'로 집약되고 그 소원들이 판전에 얽힌 화엄세계와 닮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죽음을 사흘 앞두고 쓴 굵고 힘있게 그러나 너무도 부드러운 붓놀림과는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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