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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東方朔!

'귀농'이 그렇게 힘드는 것일까?


'귀농'
이 그렇게 힘드는 것일까?

-귀농의 성공법을 알려면 '그린토피아'에서 배우라!-


여름내내... 초가을 까지 비가 오셨다.

그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내렸고 마침내 그 비는 우리 농부들에게 비와 같은 슬픔을 안기고 갔다.

2007년 가을은 그렇게 오고 농부들의 가슴을 텅비게 했다.

하늘을 원망할 시간 조차도 없는 요즘의 농촌, 나는 그 농촌을 늘 바라다 보고 있다.  


 **아래 그림들은 '그린토피아'에서 자생하고 있는 꽃들이며 그린토피아 농장의 전경입니다.

 그린토피아 뜰에 핀 국화


 춘천에 있는 한 아우는 귀농을 하면서 남다른 농법으로 5년여 고생을 하고 있다.

남다른 만큼 남보다 고생도 심했고 그 고생은 나름의 결실을 가져다 주곤 했지만 누구하나 그의 농법을 거들더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우의 농법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며 그가 가진 노하우를 훔쳐 갈 방법만 연구하는 듯 했다.


농림부관련 기관에서는 그의 남다른 농법에 대한 연구에 관하여 지원책을 내 놓았지만,

정작 그 지원은 '후광'을 입은 농부들에게 돌아가기 일쑤였고 그나마 조금 일구었던 가게는 이년전에 화마가 휩쓸고 갔다.

그는 망연자실 할 법도 했지만 더 열심히 하고 있다.


'무늬좀 비비추'가 씨앗을...


그러나 '돈'이 되어야 했던 '농사'는 돈이 되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농사와 다른 일터로 나가며 아이들 학비를 벌었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농사를 짓지 않고 도회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농사에 발을 디딘 후 다시는 그 편한(?)길을 돌아갈 수 없었다.

반드시 농업을 일구어야 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추수를 하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그는 농업전문카페를 운영하며 지인들에게 농사와 관련된 정보를 주고 받거나 종자 등을 교환하면서

귀농을 시작한 지인들과 연대를 하며 품앗이와 비슷한 '브랜드'를 만들어 놓고

그 브랜드를 통하여 '안전한 먹거리'를 추구하며 미래의 우리농촌상을 그려 나가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알고 있는 그들의 연대는 매우 힘들어 보였고 귀농을 시작한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시기를 알 수 조차 없었다.

그들은 귀농을 시작하면서 마련해 둔 '영농자금'을 야금야금 까 먹고 있는 듯 했고

속사정을 알 수 없는 그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실패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한미FTA가 체결 되면서 한줌 희망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범부채 씨앗이 여무는 모습


그들은 귀농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 농업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지만

농사를 지어서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또 아이들 교육을 시켜야 하며 얼마간의 비용을 저축을 하며 미래에 대비해야 할 수 있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봄철이 되어서 파종 시간도 되기전에 '농자금'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늘 '만성적자'에 시달리며, 농사를 지어서 살 수 없다는 결론을 가슴에 담고 사는 것이다.

'티비'를 통해서 본 '6시 내고향'의 사람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아 보이고 인심도 후해 보이는데

소작을 하는 아우는 땅뙤기조차 임대하기 벅차다.


 

 범부채 씨앗


한때 농민들을 위해서 팔을 걷어 부치던 진보적인 정치인들이나 보수적인 정치인들이나 정부에서 조차,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조리 '대통령선거'에 한눈을 팔고 있고

그들이 내 거는 공약은 늘 제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손톱만한 '어리좀연'이 갈을 맞앗다.


이제 농민들은 이 땅에서 '믿을 놈'이 하나도 없어진 셈이어서 스스로 제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우리들 농촌 사정이 아우의 사정과 비슷하고 그나마 지주들은 좀 낫다고 하나 그 마저도 별 나아 보이지 않는다.

시장이나 마켙의 물품진열대를 차지 하고 있는 수입농산물 보는 것은 이제 전혀 낮설지 않은데,

가을이 되어 출하 된 돈 안되는 물건들이 손님들의 눈을 피해서 한켠에 자리잡고 있고 그나마 우리 농산물은 비싸다며 외면 당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너무도 익히 들어서 이제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농촌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강되는 '두물머리' 근처 양수리의 한 농촌에서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추수가 끝나고 곧 농한기에 접어드는 요즘에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린토피아 정원에 있는 허브'타임'


그가 있는 양수리로 찾아 간 시간은 지난 10월 31일 오후 4시가 다 되어서 였다.

양수리의 조용한 물길을 따라 벚나무가 빨갛고 노오란 물이 곱게 물들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게 새로운 '카페촌'을 만들고 있었고

어떤집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



경춘가도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강변에 그의 농장이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가끔씩 이 농장을 방문하며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영농방법이 우리농촌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농장이 있는 곳은 정확히 경기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359 번지이며

이곳을 '골용진' 또는 '곡용진'이라 부르는데 이 농장의 지척에 용이 살았다고 알려진 작은 나루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고,


그 전설에 따라서 이 농장으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용의 형상이 마을을 지키며 서 있다.

이 농장 이름이 '그린토피아'다.

그러니까 그는 '푸른 꿈나라'를 만들기 위한 꿈을 가지고 10년전쯤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항아리에 담긴 연이 만추를 맞이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정경섭'님이고 그린토피아의 주인이자 귀농에 성공한 요즘 찾아보기 드문 분이다.

그는 이 농장에서 도시인들의 '농촌체험'을 주요 마케팅 수단으로 삼고 '펜션'을 통해서 수익을 창출하는데

그가 말하는 귀농에 얽힌 이야기와 '귀농에 대한 성공사례'들은

귀농을 꿈꾸는 많은 분들에게 '교과서'와 같으며, 기존의 농촌에서 이 성공사례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정경섭님은 10년전에 이곳에 자리를 잡을 당시만 해도 3년간 '수익'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양수리의 지리적 조건이 말해주듯이 도시도 농촌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서

배타성이 강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웃들 때문에(?) 아내와 불화를 겪기도 한 그는

이 동네 주민들이 상수원 규제로 인한 피해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들과 동화 될 수 있는 시기가 오히려 더 힘들었다고 한다.  


 어느날 도시에서 온 낮선 사람이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까 무슨 전원생활이라도 하려고 온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며

실제로 양수리 주변에는 '귀농'이라는 이름으로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이곳 농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으므로 그런 오해는 오히려 당연했다.



그는 이 농장으로 귀농을 꿈꾸며 보따리를 챙긴 후 처음으로 5천평에 이르는 배과수원을 시작하며 앵두와 복숭아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 과수원은 금방 소출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어서

틈나는대로 주변을 돌아보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으며 전전긍긍했는데

어느날, 그는 이 마을에 앵두의 알이 굵은 왕앵두가 많으며 배과수원이 5만여평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의 빛나는 아이디어가 막 발광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농촌체험'과 같은 상품은 이 마을 사람들에겐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에 불과 했다.

그들은 농작물이 '돈'이 되는 것이지 무슨놈의 '체험'이 돈이 되겠느냐며 반신반의 했고 그는 설득에 설득을 더해갔다.

농촌이 유무형의 상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귀농을 결심하기 전에

 굴지의 정유회사 근무와 현대건설과 GS칼텍스에서 상무와 연구소장직을 역임하기도 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고

 연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재이기도 했지만,

그가 평소 늘 꿈꾸던  '전원생활'의 유혹으로 모든 것을 접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런 그가 꿈꾸던 일이 '마케팅' 등에 무지한 이곳 마을사람들에게는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설득이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그는 주민들의 설득에 성공했고 그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막 농촌체험을 끝마친 아이들이 직접 켄 고구마를 봉지에 담아 들고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곁에 누가 와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고사리 손에 고구마를 쥐어주고 있었다.

체험행사를 마친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이 일은 그가 스스로 만든 고생길이며 이웃에게 보람을 주고 있는 '푸른 꿈나라' 속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 농장을 꿈꾸어 왔고 이 농장을 이루었으며 이 농장에서 살아가는 일이 곧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고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보고 '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과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게 흡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그는 모든것을 흙에서 이루려 했고 그 스스로 자신의 땀이 배지않은 음식은 먹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동네 사람들을 설득한 후로 제일먼저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짬나는대로 각종 농촌체험 관련 강의를 찾아다니며 듣고 배웠다.


하루에 서너시간 정도는 컴퓨터에 앉아잇을 정도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정보와 아이템을 찾고 또 찾은 끝에

2002년 봄 '배꽃축제' 를 기획하고 행사를 치러 300명의 도시민을 불러 들였고,

 같은해 6월엔 앵두축제를 개최했다.


4월 중순경에 만발하는 하얀배꽃은 장관을 만들며 동네를 하얗게 빛냈으며

앵두축제때 몰린 400여명의 도시민들은 앵두따는 재미에 흠벅 빠졌다. 마침내 그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


 


그가 이런 결실을 맺을 때 까지 아내는 그저 앞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의 아내는 필자에게 '세월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더 빛나게 해 준 것은 그녀가 전공한 '유아교육'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활발하고 명랑하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성격이었고

조용하며 과묵한 정경님에게는 둘도 없는 '배필'이자 '천생연분'이었다.


정경섭님의 예상은 적중했다.

'돈'이 될까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이 '상품'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믿었고 그는 이 프로그램을 알차게 만들 '하드'와 '소프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 일이었다.



 


 그는 이 마을과 자신의 농장의 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홍보할 도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늘어가는 체험 괸광객을 상대로 식사를 접대해야 했고 마을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이 마을이 생긴 이래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기란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은 사람들이 이 행사를 진행했지만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 체험객들로 인하여 부녀회를 조직 하는 등 농사와 다른 별개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식사도 준비해야 했고 주차안내도 필요했으며 프로그램을 안애하는 도우미도 필요했다.


 

때 늦은 '접시꽃'이 너무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하는 일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서 허둥댄 일도 있었다.

마땅한 식사자리도 없어서 풀밭을 이용하여 맨땅에서 도시릭을 가 먹는 것 같은 일이 벌어졌으나 체험객들은 그 조차도 체험인줄 착각했다.

그러면서 풍광이 뛰어난 이곳에서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결국 그들 때문에 이 마을에 체류하는 체험객들이 생기면서 펜션과 민박이 필요하게 되었다.


정경섭님이 꾼 '푸른 꿈나라'는 그렇게 결실을 맺어 가고 있었고

손님들의 성화에 못이겨 결국 가족들의 보금자리가 펜션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정경섭님의 이런 치밀하게 계획된 야무진 노력은 2002년 농림부로 부터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는 성과를 이뤄냈다.


 

체험농장으로 가는 길목에 늘어 선 '박'이 탐스럽다.


 그뿐 아니라  같은해에 농협의 팜스테이 마을로 지정되었고

양평군지정 생태건강마을(2003년),친환경농업선도마을(2003),반딧불이마을(2003),농림부 디지털사랑방선정마을(2004)등으로 나타났다.

2004년도에는 농림부와 농협 주관의 마을가꾸기 경진대회 입상마을로 지정되었고

부상으로 받은 상금은 체험장 겸 식당을 짓는데 쓰이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푸른 꿈나라'를 향한 열정은 식지 않아서 각종 교육은 짬짬히 모두 이수했으며

그의 노력에 대하여 표창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처음 그를 보며 느낀 기고문에서 그가 골용진의 '용'이라 칭했으며 용솟음이 일고 있는 골용진이라 했다.


 

그가 받은 교육내용과 표창은 너무도 빛난다.


 서울대공대 최고산업전략과정 1기 수료(1989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귀농창업대학 및 하기 농민대학 수료(1998),

전국농업기술자협회 귀농창업대학 및 하기 농민대학 수료(1998) ,전국농업기술자협회 귀농창업대학 및 하기 농민대학 수료(1998) ,

  서울대 최고농업경영자과정 8기 수료(2000년, 과수부문 우등상 수상) ,

도농녹색교류 심포지엄 사례발표(2001년 10월, 세종회관),전국농업기술자협회 그린투어 최고지도자과정 수료(2002년, 지도자 자격증) ,

농업연수원 주관 벤처농업경영인반 1기 수료(2003년) ,아시아 그린투어리즘 네트워크 토론회 발표(2003년 10월, 경복대) ,

농림부장관상(2003년),농촌마을가꾸기 경진대회 장려상(2004년),테마식물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2005년),

농촌사랑 마을지도자과정 3기 수료 및 농촌사랑 홍보메신저(2006)  

 

  

 그린토피아 정경섭 대표가 표고버섯을 말리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를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가 언제부터 '농부'였으며...그 누가 '농촌의 일꾼'이라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린토피아 동산으로 가는 오솔길


그는 농사를 짓지 않고 농업을 하지 않아도 평생이 보장되는 직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가진 재산만으로도 그는 평생을 보장받고도 남음이 있는데 그는 굳이 고생이 겹겹이 쌓인 것 같은 농촌을 택했고

기어코 그가 생각하던 '그린토피아'를 이룩해 놓았다.


그는 이 농장을 그가 꿈꾸던 천국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장문의 '남의 성공담'을 쓰면서 그에게 무엇을 바라고자 하지 않으며,

그의 명예를 불필요하게 드 높이려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우가 귀농으로 고생하며 우리농촌의 피폐한 모습들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므로

어차피 운명적으로 선택된 '귀농'이나 '농업'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으며

지금, 농촌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절망'에 대해서 다시한번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자며 쓰는 글이다.


그린토피아 동산에서 바라 본 펜션과 농장 전경


농사나 농업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또한 함부로 선택할 일도 아니다.

더더군다나 입술로 농사를 짓는 정치꾼들에게는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농업이며 농사이기 때문이다.  


 

 고구마 줄기가 마르고 있다. 비가 많이 온 금년에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실패의 교훈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나?를 반성해야 한다.

내 스스로 생산한 잉여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나? 반성해야 한다.

농사를 지어서 갚을 수도 없는 '비용'을 함부로 쓰고 있지 않나?를 반성해야 한다.

도회지의 눈높이에 농촌의 눈높이를 맞추고 있지 않나?를 반성해야 한다.

성공한 사례를 한번이라도 답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나?를 반성해야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나?를 반성해야하며

농사와 농업의 성공을 위해서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반성해야 한다.


 

그린토피아 농장 뒤편 작은동산에서 바라 본 양수리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가 귀농을 결심한 배경이 무엇인지?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것은 허황된 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그린토피아'를 방문 할 때 마다 가슴에 담아 둔다.



 

그린토피아의 명물...당단풍이 붉게 타고 있다.


 정경섭님이 처음 이곳에 터전을 잡고 절망을 할 때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 무엇이겠는가?


"...쉽지 않군!...결코...쉽지 않군!!..."


포기하고 싶었던 생각이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끈질긴 노력은 퇴직때 연봉보다 더 높은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농업에도 '경영'을 도입하고 있고

  "...농촌체험 경영은 서비스 정신과 마케팅"이 관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린토피아펜션 테라스에 피고지는 풀꽃들...


그러면서

" 체험마을이 쉽게 성공하는 듯 보여도

 외부 전문가와의 인적 네트워크와 자구노력, 상품개발, 경험,

 공동체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위기관리 능력 등이 쌓여 리턴이 되는 현상" 이라고 전제한 뒤

 "...철저한 서비스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라고 단언한다.  


 농업이 예전의 방식과 다르게 변모해 가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십분 활용한 그만의 노하우는

오늘날 농가가 직면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농촌 체험마을의 운영도 결국 정보력을 통한 영업이며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농촌이 곧 농한기에 접어들 때도 '그린토피아'는 바쁘다.

하루에 수백명씩 몰려드는 체험객들로 인하여 식당은 분주하고 그의 아내는 프로그램 투어로 초죽음이 되지만

누구하나 불평이 없다.



귀농은 정말 힘든 것이다.

우리농촌이 허덕이는 것을 보며 귀농을 선택하거나 우리농촌이 살아 갈 길을 모색할 경우

반드시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되짚어 보길 바라며 짬이 나면 '그린토피아'를 방문하여

정경섭님이 가진 노하우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누가 아는가? 그의 도움을 받으며 승승장구 할 날이 또 올지...  

 
베스트블로거기자Boramirang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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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토피아 펜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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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지원:

자료:농업전문카페 '하이동방삭'http://cafe.daum.net/dongbangs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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