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웃으로부터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얼마전(14일)의 일이다. 모처럼 경춘가도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며 도착한 곳은 ㅅ한약방이다. 바이크족들의 천국인 강촌의 중심에 위치한 이 한약방은, 아주 가끔씩 들르게 되는 지인의 한약방으로 한의사는 팔순에 접어들었고 사모님은 칠순을 넘겼다. 두 분은 건강관리를 얼마나 잘했던 지 현재까지도 한약방을 잘 운영하고 계신다. 이날 지 인들과 함께 방문해 진맥도 짚어보고 약을 지었는데 이날따라 유난히 눈에 띈 게 사모님의 손이었다.
처방전이 나온 후 '약장을 만지는 손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양해를 얻어 몇장의 사진과 영상을 남기게 됐다. 사모님의 손톱에 빨갛게 칠해진 메니큐어도 그렇지만, 어느날 한의사에게 시집온 후로 50년이 넘도록 약을 지은 손과 거의 매일을 약장 서랍을 열어 이웃의 건강을 살핀 손 때문이기도 했다. 아울러 처방전이 나오나오자마자 바쁘게 여닫히는 약장속에서 한 줌씩 혹은 몇 개씩 짚히는 한약재는 마치 한 인간의 쓰임새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고나 할까.
나는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통통한 손으로 약장을 여닫는 사모님의 바쁜 손길을 보면서 약장의 서랍 하나 하나가 마치 인간의 한 개체처럼 여겨졌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동안 알게 모르게 이웃에게 도움을 주거나 민폐를 끼치는 등 사회활동을 한다. 사람들은 그게 우연한 일처럼 여기기도 하고 절대자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운명처럼 생각하기도 하는 것. 그래서 세상의 종교는 불황(?)이 없을 정도이며 어떤 종교인들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평가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절대자의 부름을 받은 특별한 인간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 지 모른다. 세상엔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하다 못해 길 옆에 버려진 짱돌 하나 조차 한 괴한으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데 쓰이는 무기로 변신될 지 아무도 모르는 것. 한약방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약장의 서랍 곳곳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알 수 없는 한자가 빼곡히 적혀있다. 일반인 혹은 환자들이 처방전에 따라 사모님의 부름을 받게되며 중탕이 되면서 한 봉지의 한약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녀석들이 주로 어떤 것들인 지 살펴보게 됐다. 이랬다.
가구자(家韭子) 녹제초(鹿蹄草) 갈근(葛根) 녹두(綠豆) 감초(甘草) 다엽(茶葉) 강활(羌活) 당귀(當歸) 감국(甘菊) 당약(當藥) 구절초(九折) 도인(桃仁) 구기자(枸杞子) 독활(獨活) 맥(瞿麥) 동과자(冬瓜子) 구미초(狗尾草) 동규자(冬葵子) 길경(桔梗) 두충(杜冲) 결명자(決明子) 대극(大戟) 고채(苦菜) 대황(大黃) 고본(藁本) 대조(大棗) 골담초(骨擔草) 대산(大蒜) 고삼(苦蔘) 대계(大薊) 금은화(金銀化) 마두령(馬兜鈴) 과루인(瓜蔞仁) 마자인(麻子仁) 과체(瓜蔕) 마치현(馬齒見) 괴화(槐花) 만삼(蔓蔘) 귀전우(鬼箭羽) 만타라(蔓陀羅) 권백(卷柏) 만형자(蔓荊子) 계관화(鷄冠花) 모과(模瓜) 나복자(蘿葍子)
목방기(木防己) 남성(南星) 목적(木賊) 노회(蘆薈) 목통(木通) 누로(漏蘆) 목근피(木槿皮) 목단피(牧丹皮) 산수유(山茱萸) 문형(問荊) 산조인(酸棗仁) 매괴화(玫瑰花) 산사(山査) 매화(梅花) 산장(酸裝) 맥아(麥芽) 산약(山藥) 맥문동(麥門冬) 산작약(山芍藥) 박하(薄荷) 삼백초(三白草) 반지련(半支蓮) 상륙(商陸) 반하(半夏) 석곡(石斛) 목방풍(牧防風) 석류피(石榴皮) 복분자(覆盆子) 석위(石葦) 봉선(鳳仙) 석창포(石菖蒲) 부자(附子) 선인장(仙人掌)
비자(榧子) 선복화(旋覆化) 비채(費菜) 소계(小薊) 백과(白果) 소산(小蒜) 백급(白芨) 소엽(蘇葉) 백굴채(白屈菜) 소회향(小茴香) 백두옹(白頭翁) 속단(續斷) 백미(白薇) 송절(松節) 백작약(白灼藥) 송화(松花) 백자인(柏子仁) 수선화(水仙花) 백출(白朮) 시호(柴胡) 백합(白合) 신이(辛夷) 백선피(白鮮皮) 세신(細辛) 백지(白芷) 상백피(桑白皮) 사간(射干) 생강(生薑) 사과(絲瓜) 압척초(鴨跖草) 사삼(沙蔘) 산국(山菊) 산다화(山茶化) 양제근(羊蹄根) 야백합(野白合) 의이인(薏苡仁) 양유(洋乳) 위령선(威靈仙) 어성초(魚腥草) 와송(瓦松) 여(黎) 왕불류행(王不留行) 여로(黎蘆) 월견초(月見草)
여정실(女貞實) 자말리자(刺茉莉子) 연교(連翹) 자목(柘木) 영란(鈴蘭) 자초(紫草) 영실(營實) 자완(紫莞) 영지(靈芝) 전호(前胡) 오가피(五加皮) 적소두(赤小豆) 오미자(五味子) 조협자(皁莢子) 오매(烏梅) 조협(皁莢) 오배자(五倍子) 지골피(地骨皮) 옥촉수(玉蜀鬚) 지구자(枳椇子) 우슬(牛膝) 지모(知母) 우방자(牛蒡子) 지정(地丁) 욱이인(郁李仁) 지부자(地膚子) 유자(柚子) 지실(枳實) 유근피(楡根皮) 지유(地楡) 용규(龍葵) 지황(地黃)용담(龍膽) 진자(榛子) 용아초(龍牙草) 진피(陳皮) 율자(栗子) 제채자(薺菜子) 음양곽(淫羊藿) 제니(薺苨) 익모초(益母草) 차전자(車前子)
인삼(人蔘) 창이자(蒼耳子) 한인진(韓茵蔯) 천굴채(千掘採) 인진호(茵蔯蒿) 천궁(川芎) 애엽(艾葉) 천초(川椒) 천화분(天花紛) 홍화(紅花) 천마(天麻) 홍화자(紅花子) 청대(靑黛) 후박(厚朴) 청상자(靑箱子) 희첨(豨簽) 초오(草烏) 흑대두(黑大豆) 촉규화(蜀葵花) 흑축(黑丑) 총백(蔥白) 해동피(海桐皮) 치자(梔子) 훤초근(萱草根) 토목향(土木香) 형개(荊芥) 피마자(피麻子) 흑지마(黑芝麻) 편축(萹蓄) 포공영(浦公英) 포황(蒲黃) 패모(貝母) 패장(敗醬) 하고초(夏枯草) 하수오(何首烏) 합환피(合歡皮) 황기(黃芪) 황금(黃芩) 황백(黃柏) 황정(黃精) 향일규자(向日葵子)향부자(香附子)향유(香薷) 현삼(玄蔘) 현초(玄草) 현호색(玄胡索) 호도(胡桃) 호장근(虎杖根)...
아마도 여기까지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현대인(?)과 거리가 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잘 알지도 못하고 머리 아프게 하는 한자도 그렇지만 약장에 적힌 한자들은 먼나라...어쩌면 하늘나라에서 온 귀인의 이름들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 사모님은 이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서체로 쓰여진 처방전이 나오는 즉시 약장을 열어 약을 달일 준비를 하는 것. 수 백개에 달하는 약장속의 약재들의 일부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갈근-칡뿌리, 감호-단감, 건강-마른생강, 건시-곶감, 건지-애기풀, 건칠-옺나무진, 검실-가시연꽃 열매, 견우자-나팔꽃씨, 결루초-잔디뿌리, 계관화-맨드라미꽃, 고목-소태나무, 고복령-비해뿌리, 고본-산천궁, 고주-식초, 곤포-미역, 과루근-하눌타리 뿌리, 과체-오이, 교맥-메밀, 구인-지렁이, 권백-부처손, 길경-도라지...
막상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헤쳐 놓으니 허탈해질 정도다. 예컨데 건시는 곶감이며 과체는 오이가 아닌가. 다른 약재들을 살펴봐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풀들이며 뿌리나 나무 등 식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주변에 널린 평범한 식물들이 한데 모여 중탕이 되고나면 각자의 성분들이 한데 뭉쳐 인체를 해독하거나 보하는 약 등으로 둔갑되는 것. 참 신기한 일이다. 그 일을 50년동안 해오면서 덕을 본 이웃들은 부지기수...칠순 사모님의 오동통한 손은 최소한 50년동안 이웃의 건강을 위해 일해와서 그런지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ṣajyaguru)의 손을 보는 듯 아름다운 것이다.
*약장의 칠이 다 벗겨진 곳은 감초가 든 곳. 칠순 사모님의 손이 제일 많이 간 곳이다.
이날 사모님으로부터 약장에 얽힌 사연을 들으면서, 약장이 50년이 된 것부터 당신의 딸이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게 됐다는 걸 알게 됐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 딸내미를 키워낸 손 조차 아름다운 것. 요즘 필자는 뒤늦게 먼나라의 음식과 요리를 공부하고 있다. 특히 요리를 통해 접하게 되는 향초 등은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게 할 뿐만 아니라 맛을 좋게해 신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 것. 어느 한약방의 약장을 보면서 바쁜 손놀림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적 풍모의 요리가 단박에 오버랩된다. 우리 주변에는 이웃을 해롭게 하는 독초들도 적지않지만 이웃을 이롭게 하는 약초들이 부지기수로 널려있다. 그렇다면 나는 독초인가...약초인가? ^^
*원문이 실린 카페: 50년된 약장(藥欌)과 아름다운 손
'PHOTO 갤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내가 꿈꾸는 그곳 블로그 스킨을 바꿨습니다 (0) | 2015.10.06 |
---|---|
남해문항마을,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자 (0) | 2015.07.20 |
닭백숙,뿌리칠 수 없는 지독한 유혹 (2) | 2015.06.19 |
강아지,콱 깨물어 보고 싶었어 (2) | 2015.06.19 |
Alberto Korda,The Art History Archive (0) | 2015.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