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위로 떼지어 비행하는 철새들과 도시의 아파트...!"
도시에서 보기드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 곳은, 정조대왕 재위 당시 축조된 수원 서호 일원에 펼쳐진 서호공원과 서호의 모습. 정조는 수원화성 주변 동서남북 네 곳에 둔전을 만들고 네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는 데 서쪽에 만든 저수지를 서호(西湖)라 불렀다. 서호는 수원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에 축조한 저수지로 원래 '축만제(祝萬堤)'로 불리다가 화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라고 칭하고 있다.
저수지 네 개는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 데 서쪽은 축만제,북쪽은 만석거,동쪽(수원시 지동 쪽)은 흔적이 사라졌고,사도세자의 묘역(현륭원)이 있는 남쪽은 만년제로 불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저수지는 정조 19년에 축조된 만석거로 알려졌다. 지난 주말 다녀온 곳은 축만제. 서호천에서부터 축만제 뚝방길을 따라 한바퀴 도는 시간은 대략 1시간 남짓했는 데 이때 이방인을 반겨준 건 철새들이었다.
축만제 뚝방길을 걷다보면 늘 평행으로 따라붙는(?) 작은 섬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곳은 축만제를 찾는 철새들의 쉼터이자 축만제를 밋밋한 풍경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인공섬이다. 기록에 따르면 축만제는 저수지 가운데 작은섬을 만들고 꽃나무 등 조경수를 조화롭게 심고 호수에는 연(꽃)을 심었으며, 호수 남단의 약간 언덕진 곳에는 영화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만석거 부근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
뒤로 여기산(麗妓山)이 농촌진흥청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 산의 이름이 독특하다.
아름다운 기녀가 여기 살고있었는 지 모를 일이다만,
만추의 알록달록한 모습을 보니 꽃단장한 기녀를 보는 듯
축만제와 어울려 아름다운 자태를 띄고 있었다.
여기산은 선사시대유적지가 발견된 곳으로 1979년부터 1984년까지 4차례에 걸쳐 숭실대학교박물관에서 유적의 일부를 발굴조사했는 데 이 유적에서는 구멍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경질무문토기와 두드림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원삼국시대의 집터가 확인된 곳.
집터의 시설 중 특징적인 것은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 시설이 확인되었고, 서까래와 볏집 지붕이 조사되어 당시의 가옥구조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용구인 토기류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주거지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가 출토되어 서호 일대 주변 저습지대에서 벼농사를 하며 생업을 이어갔음을 알게 됐다.
축만제 뚝방길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느리게 느리게 걸으면서 바라본 풍경들...
축만제가 본래의 기능을 벗어던진 자리에는 철새들이 깃들고, 도시인들이 둥지를 튼 참 편안한 모습. 정조대왕이 해마다 '만석을 생산해 풍요를 누리라' 축복한 축만제는, 바쁘게 사는 도시인들과 먼 길을 떠나는 철새들에게 쉼을 허락하는 명당으로 자리잡은 것. 참 복받은 땅이다. 그곳에서 한 무리의 철새떼들이 비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철새들을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해 보고자 뚝방길을 내려서는 순간 수 백 마리의 청둥오리들이 일제히 하늘로 비상하는 것.
그 장면들을 뷰파인더로 들여다 보고 있자니 별천지에 와 있는 듯 엑스터시로 충만하다.
축만제의 정중동을 깨뜨린 황홀한 비행...!
녀석들은 일제히 날이오른 후 도시인의 거처 곁을 지나 작은 섬을 한바퀴 돈 후, 여기산의 반영이 비친 수면 위로 착륙했다.
녀석들이 착륙한 수면 위로 만추의 가을이 심연으로 빨려드는 듯 하다.
뚝방길 아래서 바라본 축만제는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멀리 방수구가 위치한 숲을 비추고 있었다. 한 때 저곳은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시인이며 사회운동가와 언론인이었던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18일~1948년 12월 10일)이 작품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여성으로선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나혜석의 정신세계는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는 여성운동의 선구자적 모습이었는 데...지금은 당시와 모습을 달리하고 있지만 수양버들이 늘어선 곳에 나루터가 있었고, 그 뒤로 항미정이 위치한 곳. 두 여인이 항미정 곁에서 여기산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수원 서호>를 보면 축만제의 아름다움은 나혜석까지 매료시켰나 보다.
나혜석이 태어난 곳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로 알려졌다. 그녀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던 경술국치 당시(1910년) 수원 삼일여학교(현 수원 매향교)를 1회로 졸업하고, 17세 되던 해(1913년)에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3회)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수원화성과 축만제 등 정조대왕의 문화유산이 그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
그러고 보니 축만제의 모습은 조선 궁궐의 조경수법을 쏙 빼닮은 듯 계류(溪流)를 이용한 못(저수지)과 정자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 축만제 주변의 나지막한 야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갖춘 모습 등은 창덕궁의 부용지를 그대로 본 떠 만든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음편에서 나혜석이 스케치를 나왔던 축만제의 백미인 항미정을 돌아보기로 한다. 뚝방길을 따라 걷는동안 머리 위로 가마우지 한 마리가 날개짓을 하며 어디론가 사라지는 한가로운 풍경. 축만제는 철새들과 도시인의 차지가 된 지 꽤 오래됐다.
* 수원 서호(축만제) 관련 포스트 ➲ 수원 서호,축만제 항미정 답사 후기[1편] / 수원 서호,철새들과 도시인이 차지한 축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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