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힘들었을까?..."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에 발을 들여놓으면 바람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게 된다.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은 당장이라도 세상 전부를 날려버릴 듯 기세가 엄청나다. 맨 땅에 발을 디디고 선 사람들은 물론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들 조차 바람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바람의 땅에서는 바람에 맞서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가고 있었는 데 사람들은 바람을 피해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런가 하면 나무들은 바람 앞에서 허리를 잔뜩 수그린채 바람을 피한다. 바람이 부는 시간과 세기가 길어지거나 클수록 나무의 허리는 점점 더 구부정해 마침내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는 것. 용케도 바람을 잘 피할 수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고목으로 자라지만,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해야 하는 나무들은 성장이 매우 더뎌 분재를 보는 하다. 그런 나무들이 수두룩 한 곳. 그곳은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의 모습이다.
엘찰텐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한 나는 라구나 또레에 거의 다다르면서 걸음걸이가 점점 더 늦어졌다. 발 밑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카메라를 붙들기 시작한 것이다. 우기(가을)가 시작된 이곳은 점점 가을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끼들은 바스락 거리며 매말라 가기 시작했다. 다시 1년을 기다려야 새싹을 내 놓을 수 있을까. 라구나 또레에서 흘러나온 뽀얀 빙하수가 쉼없이 흘러내리는 피츠로이 강(Rio Fitz Roy) 상류는 빙하기를 견뎌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여행자를 반긴다.
분재를 옮겨 놓은 듯 바람의 땅에서 자란 나무들이 고목을 닮았다.
크기는 한 뼘 남짓 한 것부터 겨우 수 십센티미터짜리 나무들이 강 옆에 즐비했다.
저 멀리 우리가 이른 새벽부터 걸어왔던 길.
라구나 또레가 가까워지면서부터 산화철이 섞인 돌과 이끼를 품었던 돌들이 버려진 듯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빗방울이 가끔씩 후드득이는 라구나 또레 가는 길
바람이 얼마나 모질었으면 다 성장한 나무의 크기가 겨우 이정도일까?...
땅 바닥에 납짝 엎드린 강인한 생명들을 보니, 생명은 어디서나 발 붙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피츠로이 강 옆으로 쌓인 돌과 바위들은 빙하의 이동 흔적들이다.
한 떼 이곳까지 진출했던 빙하가 간빙기를 거치면서 점점 후퇴하기 시작해,
지금은 라구나 또레만 남기고 피츠로이 산군(山群)에 남았던 것.
우리가 걷는 산길은 빙하가 물러난 자국을 따라 라구나 또레로 이어진다.
비가 올듯 말듯 비구름을 잔뜩 머금은 피츠로이 산군은 지각변동이 있기 전엔 바닷속이었다.
바다속에서 융기된 이 땅이 바람의 땅으로 바뀌기까지 이어진 시간은 1억 5천만 년 전...
1억 5천만 년 전의 땅 위를 걷고 있자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가 모두 신기해 보일 따름이다.
그게 한 여행자에게 주어진 '하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바람의 땅에 몸을 낮추고 살아가는 강인한 생명들도 그런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갈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 바람 한 점,빗방울 몇 개...여행자의 추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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