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가 작사.작곡한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며칠전에 민족문제연구소 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안익태, 최승희, 포함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4천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해방 이후 최초로 시도된 '친일인사' 선정 작업을 통해 발표된 친일인사들은
매국, 중추원, 관료, 경찰, 군, 사법, 종교, 문화예술, 언론출판 등 16개 분야에 걸쳐 설정된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그 명단 중에서도 유독 '안익태'가 눈에 띄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방이후 우리는 친일파가 작곡한 애국가를 마르고 닳도록 불러왔단 말인가?
애국가의 곡은 너무도 익숙하여 해외에서 또는
스포츠 경기중 국가 대항전에서 연주되는 그 곡을 듣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벅찻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사실인가?
1.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 - 궁화 삼 - 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 - 궁화 삼 - 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 - 궁화 삼 - 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4.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 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무 - 궁화 삼 - 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그래서 애국가 가사까지 다시 살펴보았는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구구절절이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가사였다.
혹시 곡이나 가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없었을까?하여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으로 알려진 '윤치호'를 찾아서 그의 행적을 쫒아보니
흥사단의 이영일(차장)이라는 분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
'친일파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http://blog.naver.com/ngo201/60005104781'라는 글을 통해서
애국가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알아 봤다. 그는 칼럼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경향신문(4월)19일자에는 저명한 역사학자 이이화님의 [한국사 바로보기] 14. 태극기·애국가의 왜곡된 상징성이라는 글이 있다.
이이화 선생님은 한말 대표적 친일파인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것으로 사실상 기정사실화하면서
“우리 대한만세","바람 이슬 불변함은"등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애국가 가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윤치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과 애국가의 하나님이라는 상관관계에 대한 자세한 해석까지 담고 있다.
그러나 일제 귀족인 지식인 친일파 윤치호가 과연 애국가의 작사자인가? 필자는 그 의문을 떷려 버릴 수 없다.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고 주장하는 쪽은
윤치호가 자신이 설립한 한영서원 교재로 찬미가를 편찬해 보급하고
1945년 10월경에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를 남겼다는 것을 주요 증거자료로 주장한다.
윤치호가 개성에 설립했던 한영서원은,
안창호가 신민회 조직 2년후인 1908년도에 평양의 유지인 김진후의 지원으로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윤치호가 도산의 배려로 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얻은 경험이 큰 동기가 되어 세운 것이라
주요한은 안도산전서에서 서술하고 있다.
안창호는 그 자신이 대성학교 설립의 사상적, 실질적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에게 교장을 맡기고 자신은 대리 교장으로 자신의 공과를 모두 윤치호에게 돌렸다 전해진다.
이는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대성학교가 도산의 작품이자 그의 혼과 땀이 서린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윤치호는 당시 여러 직책을 맡아 유명한 소위 인기있는 민족운동가였는데
도산의 헌신으로 개화된 특수교육기관인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느낀 바 있어
자신의 작품격인 찬미가를 저술하며 여기에 도산의 애국가를 수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한말 독립운동가인 안태국(안창호,양기탁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피검)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안태국의 말을 회고하는 안도산전서의 내용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는 것.
또한 주요한은 안도산전서에서,
원래 끝구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도산이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의 내용과도 확연히 일치하는데,
이광수는 상해임시정부 정청(政廳)이 매일 애국가를 불렀으며
역시 마지막 구절의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도산이 수정하였고
이 노래가 널리 불려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도산은 애국가의 작사자를 도산이라고 묻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애국가가 도산의 작이 분명하다고 저술하고 있다.
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친일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했고
그 후 윤치호는 1915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이 일선동화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3.1운동이 일어난지 며칠후 경성일보를 통해 평화를 위해 일제에 순종하라는 매국적 발언을 일삼기 시작했다.
1943년 일제의 총동원령이 나자 11월 18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 학도병 독려의 적극적 친일행위에 열을 올린 윤치호는
1945년 2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출, 일본 귀족이 되기에 이른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자마자 자신이 애국가를 지었노라는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를 남긴다.
왜 그는 해방후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을까?
선진 미국과 일본을 동경했던 그에겐 일제가 패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테니
해방이라는 천지개벽후 자신의 친일을 불가피한 선택임과
독립협회 회장까지 지낸 자신의 애국정신을 알아주길 원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애국가는 단순히 나라를 상징하는 차원을 넘어
해방을 위해 초야와 같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서린 것이기에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자랑찬 역사를 설명해 주기도 하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보지 않는 이상 과연 누가 애국가를 완벽하게 만들어내었는지는
더 확실한 자료와 배경등이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과연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만민공동회의 최고지도자까지 지내고도
일제의 개가 되어 나라를 배신한 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것은
감정을 넘어 객관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만이 아닌가!"
옳은 표현으로 나는 글쓴이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있었다.
자신의 철학과 사상이 담기지 않은 글들은 오늘날도 심심찮게 보고 있다. 표절이 바로 그것이다.
애국가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가사의 내용은 친일파 윤치호가 쓴 글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가 애국가의 가사를 작사했다면 일제의 냄새가 펄펄 풍기겠지만
애국가의 가사 에서는 일제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다.
다만, 작곡에 있어서 친일파라고 하는 안익태가 매우 맘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네티즌들 중 어던 분들은 차라리 '아리랑'을 우리의 애국가로 지정하자는 목소리도 일고있다.
친일 논쟁은 그 파문의 크고 작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며
그 과거사를 정리하지 못하여 오늘날 우리들은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허둥대고 있다.
최소한의 조치로 애국가의 작사.작곡자를 특정인으로 하지 말고 우리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불특정 다수인 '독립유공자'라는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어쨌던 윤치호나 악인태의 이름을 애국가와 관련하여 더이상 입에 올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럼에도 애국가는 계속 불려져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언제쯤 일제나 미제의 덫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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