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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나와 우리덜/나와 우리덜

'친미주의자'가 되고 싶은 작은 이유!

'친미주의자'가 되고 싶은 작은 이유!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님을 아세요?-


태안의 '천리포'가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되면서 전국민적인 관심이 태안으로 쏠렸고
기름유출의 피해가 심한 천리포가 만리포에 이어 자연스럽게 우리들에게 각인 되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만리포에 가려서 천리포라는 이름은 아는 사람만 아는 해수욕장이었고
실제로 천리포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천리포 근처에는 사랑을 고백하기만 하면 이루어 진다는 '백리포'도 있지요.



환경단체의 일을 하고 있던 지인과 이 지역에서 오랜동안 터전을 잡고 살던 친구의 안내로
방문한 곳은 '천리포수목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수목원'이라는 이름을 만든 효시였고 '원조'가 천리포수목원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광우병쇠고기 때문에 '반미정서'가 강하게 대두되고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 때문에 말썽이 일고 있는 이때 저는 한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반미정서든 친미정서든 칭일 정서든 친중정서 속에는 반드시 '정치인'들이 개입되어 있고
그들이 현안을 잘 살피지 못해서 일어난 사안이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특정인 몇몇이 잘못한 결과가 불특정다수를 욕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민족간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그들을 반대해야 될 것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글의 제목에 쓰여진 '민병갈님'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미국인이면서 한국에 귀화한 사람이자 지금은 세상에 많이도 알려진 천리포가
허름한 어촌일 때 그곳에서 뜻한 바 있어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분입니다.

그를 아시는 분들은 그의 너무도 귀한 업적 때문에 머리를 조아리는데
그의 업적을 '천리포수목원'에 소개된 글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목원의 효시는 천리포 해변의 절벽에 위치한 약 2ha의 사질 토양의 임야 및 잡종지를
1962년도에 천리포 수목원의 설립자인 민병갈( Carl Ferris Miller, 79년도 귀화)씨가 구입하면서 비롯되었다.

고 민병갈 전 이사장은 1921년 12월 24일 미국 동부 펜실베니아주의 West Pittston에서 태어 났다.
 콜로라도의 대학에서 일본어를 부전공한 그는 졸업 후 2차대전 당시 미 해군 통역장교로 근무하였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국해방 직후 한국으로 파견되어
1945년 9월 8일 한국에 첫 발을 딛은 그는 그 후 한국에 매료되면서 한국에 정착하였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는 전후 한국의 어렵고 힘든 생활환경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한국적인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된 것으로 보아서
본인이 전생에 한국인이었을 것이라고 자처한다.



 1946년 9월에 제대한 그는 1947년 2월 민간인으로 미 군정청 법무부에 지원하여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 1952년부터 1982년 3월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 동안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경제와 금융계에 정통한 그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은 결국 19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국적을 취득케 하였다.

그는 항상 타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다 생을 마감하기를 원해 왔으며
그의 이 나라와 한국민에 대한 애정은 결코 동요된 적이 없어 왔다.
화학을 전공하고 금융업에서 일해온 그에게 수목원 조성사업은 하나의 새로운 모험이었다.



 식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은 그가 사랑하는 한국의 산야를 두루 돌아보면서 싹터왔다.
자연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그에 관한 지식에 목말라 하던 그에게
임업연구원의 고 조무연씨나 전 서울대 교수이자 대한식물도감의 저자인 이창복 박사와의 만남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집념의 결실이 천리포수목원인 것이다.



1950년대 그의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한국의 각처에 있는 사찰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잘 닦여 쉽게 가까이 갈 수 있으나
 그 당시 사찰들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높은 산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 가기는 어려우나
식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잘 보호해왔던 관계로
다른 어느 지역 보다도 훌륭한 산림을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게다가 스님들은 그 주변의 식생에 관하여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식물에 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천리포를 여러 번 방문한적이 있던 그가 1962년에 천리포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한 노인이 찾아와 현재 주지역의 기와집이 자리잡고 있는
 낭새섬을 마주보는 바닷가 언덕 위의 6천 평의 토지를 구입해 줄 것을 수 차례에 걸쳐 부탁하였다.

그 당시에는 길도 전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척 가난한 지역이었으므로 땅값은 무척 싸기는 하였으나
 목적 없이 땅을 단순히 소유하는데 관심이 없었던 그는 여러 번 거절을 하였다.



그러나 돈이 필요했던 그 노인은 계속하여 간곡히 부탁하였고
아름다운 해변과 경관에 반한 그는 문득 훗날 전원주택을 짓기에 좋으리란 생각에 망설이게 되었다.
 결국 막연히 본인보다는 그 노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후 그대로 방치되었던 이 땅에
 8년 후인 1970년 서울에서 재개발로 해체된 한식 기와집을 천리포로 운송하여
한식기와집 3동을 해변의 절벽 위에 이축하면서 수목원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한옥이 들어선 이후 몇몇 해송만이 자라고 있던 황량했던 그 주변에 나무를 모아 심기 시작했으며
 1971년경부터 소문을 듣고 땅을 팔기를 원하는 마을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수목원의 면적도 점차적으로 늘어 갔다.

 이 당시만 해도 천리포에는 전화, 전기 및 진입도로 시설이 없어서 수목원 조성사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건물 3동 중(지금의 소사나무집, 소나무집, 등나무집) 가장 규모가 적은 등나무집에는
 자가 발전기를 설치하여 조명 및 급수를 위한 동력의 전원으로 사용하였다.

이듬해인 1971년도 봄부터 건물주위에 대한 식재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들 수목들은 산림청 산하기관인 임업시험장으로부터 기증받고,
1972년도에는 전라북도 임업시험장 및 국내의 묘목원으로부터 구입되었다.



1973년경에는
천리포수목원을 단순히 바닷가의 보기 좋은 정원 이상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으며
이것이 최초로 제대로 갖추어진 민간 수목원을 조성하게 된 효시이다.

이즈음 그는 당시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장인 이창복 박사를 알게 되었으며
이박사를 통하여 식물에 대한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고
그치지 않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영국 및 미국으로부터 전문서적을 구입하여 열심히 읽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책자에 소개되는 식물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천리포 부근에 있는 토지들을 수목원 부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구입하게 되었으며
 1978년까지 현재 소유하는 토지 대부분이 이 기간 중에 매입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는 많은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방문 하면서 '선교사업'을 통하여 지경을 넓힌 사람이 아니었고
그 스스로 우리나라가 좋아서 우리나라에 다시 건너 왔으며 이름까지 우리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아름다운 수목원은 다시 기증케 된 것입니다. 



그는 내셔널리즘과 전혀 관계없는 사업을 이 땅에 실현해 두었고
천리포수목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식물 사랑은 남달라서 천리포수목원을 방문 해 보신분들은 한결같이 그의 짧은 어록에 고개를 숙입니다.

민병갈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무를 키우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천리포는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곳으로
내가 할 일은 나무가 스스로 자라도록 돕는 것이다.
자연은 영원한 창조자이고
인간은 영원한 파괴자일 뿐이다."



그는 미국에서 이 땅에 와서 자연사랑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분이데
약삭빠르게 미국을 아는체 하는 사람들은 자연을 함부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명박정부와 그와 한 통속인 사람들은 '한반도대운하 계획'을 국민들 몰래 추진하면서
마침내 삽질의 신호를 쏘아 올렸습니다.

"...민간이 요청해 오면 대운하건설을 추진 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아 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작당'을 민간에 시발을 떠 넘기며
기어코 대운하를 파 보겠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국가를 함부로 하는 것은 이미 지도자가 아닙니다.
마치 가장이 가족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특정 가족사를 '깔보는'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우리들 안방에서 행패를 부리며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심한 것은 그들 행패를 쉬쉬하고 감추는 경찰들이며 정부인 것입니다.

천리포수목원 안에는 제가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귀한 수목들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들이 낮선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의 애정어린 보살핌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국민들이 휘청 거리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사랑하는 국민들 손에 '뱀을 쥐어주는' 한 장로 때문입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앞세워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꿈꾸었다는 '비젼'입니다.



** 위 그림들은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몇몇 희귀종을 촬영해 둔 것입니다. 민병갈님이 너무도 사랑하고 아낀 식물들입니다.
꼭 보호하고 싶었던 種들이며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룬 사업입니다.

저는 민병갈님이 다시 부활하여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되면 반드시 '친미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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