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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山들

환상적 '보라빛' 속에 묻힌 한확선생 신도비

환상적 '보라빛' 속에 묻힌 한확선생 신도비


지나치면서 늘 보고만 다녔던 한확선생(韓確 1403∼1456) 신도비는 서서히 녹음속으로 빠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연일 여름 날씨를 방불케하는 4월의 이상기후가 발길을 붙든 것은 아닌데
저는 상아빛 신도비 곁에서 신도비를 둘러싼 작은 울타리 사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역사는 '한확선생'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귀국길에 병을 얻어서  사하포沙河浦에서 세상을 떠난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것들은 큰 재미(?)는 없지만 그가 조선과 명나라를 오가는 사신으로 조선의 일을 하고 있었을 때
고모인 한확의 누이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으로 있었는데 누이와 만남을 또한 기뻐했을 법 합니다.





그 누이는 봄이면 환상적으로 피어나는 조선의 제비꽃을 너무도 보고 싶어했을지 모릅니다.
누이가 한확선생에게 부탁하여 다시 명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제비꽃 한묶음을 가져다 주길 원했던 것일까요?...





신도비 바로 곁에는 제비꽃이 무리를 지어 환상적으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꽃들은 가는 바람에 흔들거리며 한확선생이 누운 묘소곁 까지 물결을 이루며
누이에게 못다한 선물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얼마전에 종영된 SBS의 '왕과 나'에서  폐비윤씨의 남편으로 나온 성종(자을산군)의 할아버지가 바로 한확 선생입니다.

한확 선생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韓氏 (1437∼1504)는 세조의 원자였던 의경 세자와 결혼하여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자을산군者乙山君 그리고 명숙明淑 공주를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경 세자가 약관 20세의 나이로 죽고,
그의 아우 해양대군海陽大君이 예종으로 등극하였지만 그 또한 1년 만에 승하하였습니다.
그러자 야심가였던 소혜왕후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역사는 말합니다.



13세의 성종을 수렴청정하고 남편인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시키며
자신은 소혜왕후에 올랐다고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성종의 비였던 폐비廢妃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려
훗날 손자 연산군燕山君과 갈등을 빚었으며, 연산군의 폭정에 보이지 않는 동기가 되었다고 전해져 옵니다.



소혜왕후의 시호는  인수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徽肅明懿昭惠王后로 앞의 시호를 따서
인수대비仁粹大妃라고 불리우는데  '왕과 나'에서 그녀의 '권력욕'을 재조명한 부분은 명장면이었습니다.



"그녀의 성격은 강직하고 매우 유교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중전윤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중전이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자 진노하여 폐비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성종의 다른 후궁들과 합세하여 성종에게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약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위키백과>



 한확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를 둘러 보면서 그의 사후에 일어난 역사속 모습은 격랑속과 같았습니다.
특히 소혜왕후인 인수대비의 모습은 성종보다 12살이나 위였던 중전 폐비윤씨를 사사시킴으로써,



훗날 자신의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고 마침내 연산군의 폭정을 제지하려 하다가
 연산군과의 말다툼 끝에 기둥쪽으로 밀려 연산군의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향년 68세 죽고 말았습니다.



고부간의 나이 차이가  8살 밖에 차이가 나지않은 점도 인수대비가 폐비윤씨를 미워하게된 배경같기도 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성종이 연상의 여인(후궁)과 동침하여 낳은 소생이 '연산군'이었고
인수대비는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이 사사시킨 폐비윤씨의 아들인 손자 연산군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니 말입니다.



한확 선생의 신도비를 방문 하면서 신도비의 이야기보다 그의 딸 인수대비의 이야기로 길어졌습니다.
보라빛 제비꽃 무리 때문이었습니다.



때마침 SBS '왕과 나'에서 성종의 바람끼 때문에 질투가 극에 달한 폐비윤씨가 용안을 핥킨 사건이 등장하는데
권력의 뒷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랑 싸움'을 고요하게 잠재운 듯 바람에 살랑이는 제비꽃이,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 누운 한확 선생의 어지러운 마음을 잠재우는 듯 합니다.
그가 기댈만한 곳은 '명나라'라기 보다 '누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으로 말입니다.



 


한확선생 신도비에 쓰여진 글은 밖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기록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대단한 벼슬입니다.



宣授奉議大夫光祿寺少卿
 輸忠協贊衛社同德靖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事監春秋館事
 西原府院君贈諡襄節淸州韓公諱確之墓

선수봉의대부광록시소경
 수충협찬위사동덕정난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사감춘추관사
서원부원군증시양절청주한공휘확지묘
(연결된 글씨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힘든 하얀비석인데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 돌은 명나라에서 코끼리에 실려서 조선으로 운반되었다고 합니다.



비문에 의하며 '인수대비가 아버지의 묘에 비석이 없음을 슬퍼하자
성종25년(1494) 4월에 우참찬 어세겸魚世謙에게 명해서 비문을 짓게하고
한확선생의 세째아들에게 비의 건립을 맡게하여 이듬해 세웟으며
글씨는 성종의 사돈 임사홍이 썼다'고 전해져 옵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제 127호로 지정되어 있는 한확선생 신도비가 있는 이곳은 '능내리'라고 부르는데
이 묘역이 워낙 커서 주변에서 다 아는지라 앞쪽 능선 자락의 마을을 부르기 쉽게 '능안 마을'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며
 그 후 '능안'이 '능내陵內'로 바뀌었다고 전해 옵니다.



한확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500년이 지난 지금
그가 사랑했던 누이나 그를 사랑했던 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권력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나 능내리에서 농사를 짓고 산 평범한 사람들도
이 계절에는 모두 환상적인 보라빛 그리움속에 묻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한확 선생의 자字는 자유子柔, 호號는 간이재簡易齋로, 군수郡守 영정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 후궁이 된 누이를 따라 1417년 21세의 나이로 명나라에 들어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의 벼슬을 하사 받았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그는 또 명나라로 들어가 태종의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호諡號를 하사 받아 돌아왔다.

그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이조판서·병조판서·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 등의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3년에는 좌찬성左贊成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정난일등공신이 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1455년에는 좌의정으로 서원부원군이 되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귀국 도중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 한확선생 신도비는
 '경부운하 예정지 500미터 이내 지정문화재'속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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