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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GONIA/lago llanquihue

그래도 '화초'가 필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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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화초'가 필요한 사람들
-빠따고니아를 점령한 꽃과 식물들-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은 어디까지 일까.

무엇이든 절제하지 못하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게 사람들의 모습. 배고픔이 간절하여 허기를 면하면 더 배부르게 먹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고, 더 이상 먹지 못할 때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면 이번에는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돈이 그렇고 권력이 그렇다. 죽을 때까지 펑펑 쓰고 남아도 창고에 쌓아두어야 하는 건지 돈의 노예를 자처하는가 하면, 권불십년(요즘은 5년)이라는 교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모든 것을 바친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 때문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사자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

칠레의 로스 라고스 주 뿌에르또 바라스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보다 주변을 좀 더 돌아보고 싶어서 걸음을 옮긴 자리에는 화초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세상이 온통 꽃밭이자 식물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던 것. 우리나라에서는 식물원에 가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화초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던 것. 그래서 화초들의 이모저모를 살피다가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 했다. 화초의 매력에 깊숙히 빠져들며 시간 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언뜻 이해할 수 없는 풍경 하나를 만나게 됐다. 오래된 목조건물의 창틀에 화분 네 개가 나란히 줄지어 선 모습. 이 모습만 보면 별로 이상할 것 없지만, 화초가 지천에 널린 이곳에서 굳이 화분이 필요한 가 싶은 것이다. 문 밖을 나서면 화분 속에서 위태롭게(?) 자라고 있는 식물 보다 더 나아보이는 화초들이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30분 정도 살펴본 이 마을에선 화초들을 신기해 하며 셔터를 누르고 있는 필자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집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이방인의 태도가 오히려 수상해 보인 것. 들풀처럼 널려있는 화초를 보고 환장한 듯한 여행자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래서 담벼락에 서서 갸우뚱해 하는 표정에 묻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ㅎ...꽃들이 넘 이뻐서요....^^ " 

 



빠따고니아 투어를 마치고 여행기를 끼적거리면서 빠따고니아의 화초들은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관련 포스트를 통해 잠시 언급되기도 했지만 꽃과 식물들의 삶이 사람들의 삶과 매우 닮아있다는 것.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줄 것 같지않은 식물들은 겉씨식물 또는 속씨식물로 구분되어, 남자사람과 여자사람 혹은 내성적이거나 외형적인 성격 등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속씨식물은 
피자식물, 꽃식물, 꽃피는 식물이라고도 하고. 꽃을 피우는 모든 식물을 가리킨다는 건 오래 전에 학습했다. 또 겉씨식물은 씨가 성숙한 씨방이나 열매 안에 들어 있는 꽃피는 식물, 즉 속씨식물과는 서로 대조되는 것 등. 필자가 여행 중에도 그랬지만, 여행기를 끼적거리는 지금도 박물학을 공부했으면 여행이 얼마나 더 풍요로웠을까 싶은 괜한 욕심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종의 기원'을 발표해 세상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찰스 다윈이 새삼스럽게 회자되고 있는 것. 그를 통해 '식물의 생활사'를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 되거나 재조명 되게 된 것. 다윈이 성직자를 마다하고 박물학에 남다른 업적을 남긴 것까지는 좋았지만, '꽃과 식물이 사람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것도 자기 생각을 토로해 두었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빠따고니아 투어를 통한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대도시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순박했다. 도시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시골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이웃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우리와 별로 다를바 없는 도시와 농촌을 뚜렷이 구분하는 경계선 내지 색깔은 꽃과 식물이었다. 대도시에도 꽃과 식물들이 적지않았지만, 그곳은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과 도로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도시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꽃과 식물이 넘쳐난 것. 




이런 차이는 뻔한 듯 도시와 농촌사람들의 정서를 도드라지게 갈라놓았다. 예컨데 도시에서 상습적으로 일어나는 범죄는 시골에서 찾아볼 수 없거나 매우 드문 것 같은 이치이다. 화초가 사람들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 이런 경험은 칠레의 행정수도 발빠라이소(Valparaiso)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른바 '천국의 계곡'으로 불리우는 발빠라이소의 봄은, 흙이 한 톨이라도 박힌 곳이라면 풀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 골짜기에 들어서 마자 가난하고 힘들게 산 부두노동자들의 하루가 천국을 시작으로 천국으로 이어지는 삶을 단박에 느끼게 됐다. 힘들게 사는 소시민들의 하루 일과는 언덕 아래로 가는 아센소르(엘리베이터 일종)를 타거나 걸어 갈 텐데, 그 때 마다 이들을 배웅하는 건 화초들이었으며, 하루종일 노동에 시달려 파김치가 된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도 이들 화초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화초들에 눈길 조차 주지않았다. 입장을 바꾸어 놓아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 출근길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 생각해도 유쾌하지 못할 텐데 화초가 보일 것이며, 파김치가 돼 귀가하는 언덕길에 화초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 당장이라도 된장찌게(?) 끓여놓은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그러나 아주 가끔씩은 가로등에 희미하게 비친 풀꽃들과, 은가루로 변한 달빛을 두른 풀꽃들이 눈에 띄며 고달픈 삶을 치유해 주지않았을까. 발빠라이소 언덕과 골짜기에 빼곡하게 피어난 꽃과 식물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단박에 든 것. 그런 생각들이 뿌에르또 바라스의 언덕 위의 마을에서 다시금 회상되는 것이다. 

커튼을 열어 창 밖을 보는 순간 그곳에는 작은 화분에 속씨식물의 생활사가 우리네 가족사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꽃과 식물을 가까이 두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럴 것. 네가 귀한 것 만큼 '나 또한 귀한 삶'을 일깨우고 있었던 게 창틀에 기댄 화분들의 존재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소박한 욕구와 욕망은 세속적인 게 아니라 꽃과 식물이 선물해 준 천상의 모습. 
 

꽃의 신으로 부활한 세상의 영혼들





















































































아쉽게도...이들 꽃과 식물 중에 필자가 아는 건, 울타리에 기댄  양치식물 외 정글로 자라난 '아이비'나 낮선 모습의 '철쭉'이 전부. 그러나 꽃과 식물의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꽃의 신 클로리스(chloris, Flora)가 숲의 요정(
nymph)를 사랑해 꽃이 된 것 처럼, 이들 화초 전부는 영혼들의 축제. 풀꽃을 곁에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수 많은 영혼과 자기를 사랑하고 가꾸는 천사가 아닌가.

지천에 널린 풀꽃이라도 곁에 가져다 놓은 화분 몇 개는 선택받은 것일까.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가까이 해야하는 게 우리 영혼을 살찌게 만드는 꽃과 식물들 같다. 도시는 영혼을 창백하게 만들고 꽃과 식물은 영혼을 살찌우게 만든다. 이유를 묻지말자.

화초를 보는 순간 '아름답다'고 느끼면 꽃의 신이 당신의 가슴에 치유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이며, 
욕망의 화신이 된 사람들은 모를 것. 그 아름다움을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은 '신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지천에 풀꽃들이 넘치고 창가에 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풍경. 여행자의 피곤이 한 순간에 풀린다. <계속>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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