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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나와 우리덜

아웅산수치,나는 이렇게 싸웠습니다


-독재자의 딸, 나는 이렇게 개갰다-
 



나는 이렇게 개갰다.

사람들은 나를 일컬어 '독재자의 딸'이라고 합니다.
외국의 언론에서 조차 나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본국 황실에 피로 충성을 맹세하고
5.16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기간 동안 민주.애국시민을 짓밟은 '인혁당사건'이나
남의 재산을 강탈해 만든 정수장학회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헌법을 뜯어 고쳐 장기집권 하려는 유신독재 횡포도 발생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여자 가수를 데려 놓고
시바스리걸 위스키를 마시다 총살을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아꼈던 중앙정보부장 한테 총살을 당한 거죠.
그게 다 유신 독재의 횡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 차지철은 '버러지 만도 못한 놈'으로 규정 됐고 
결국 아버지는 버러지 만도 못한 놈과 놀아난 꼴이었습니다.
그게 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졸지에 부모님은 흉탄에 돌아가시고...를 녹음기 처럼 되풀이 하며 개갰습니다.
이게 다 나와 상관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광주학살 주범이 아파트 30채 값에 해당하는 6억원을 주었습니다.
그 돈 6억원과 정수장학회의 천문학적 재산은 소녀가장 한테 위로가 됐습니다.
국민방송 MBC도 장악하고 부산일보도 장악할 수 있는 거금이었습니다.
그 돈이면 세상에 어떤 풍파가 닥쳐도 개갤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물론 서민들은 꿈 조차 못 꿀 엄청난 재산입니다.
이게 다 나와 상관있는 일입니다.
 

그게 다 아버지가 국민들을 잘살게 만들어서 생긴 돈 입니다. 
그게 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여 생긴 정치적 자산 입니다. 
그게 다 아버지의 정치적 놀음에 놀아난 노인들이 챙겨준 유물 입니다.
그게 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부모님의 덕분입니다.
그런 나에게 국민 15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직을 주었습니다.
거기에 야당의 후보와 정당은 수개표도 안 하는 호의를 배풀어 주었습니다.
그게 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부모님의 덕분 입니다.
이게 다 나와 상관있는 일입니다.
 

나는 곧 대한민국의 대통령 교대식을 치룰 겁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국민의 행복시대는 이렇게 시작될 겁니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오명은 누가 씌웠습니까.
미얀마의 아웅산수치 여사와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대통령 입니다. 
나로부터 독재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걷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다 나와 상관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Aung San Suu Kyi 
아웅 산 수치 

영화 'The Lady (2011 film)'에서 '아웅산 수 치' 여사 역의 양자경(Michelle Yeoh)의 모습. 얼굴이 많이 닮았다.


아웅 산 수 치 (Aung San Suu Kyi, 1945년 6월 19일 출생), 미얀마(옛 버어마)의 독립 영웅 '아웅 산' 장군과 '킨 치' 전 인도대사의 딸. 15살 때 이후로 미얀마를 떠나 오랜 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됨. 어머니를 따라서 인도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 런던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 박사와 두 아들(알렉산더, 킴)을 둠.

영국에서 지내다 어머니의 병간호 때문에 1988년 4월 귀국한 아웅 산 수 치는 얼떨결에 미얀마 민주화 항쟁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에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8888 항쟁'과 이에 대한 군부의 무자비한 무력탄압, 독재자 네윈 장군의 사임 이후 소 마웅 장군의 신군부 쿠데타와 무자비한 학살 등, 급박한 미얀마의 상황을 직접 몸으로 겪게 되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 달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민족민주동맹(NLD)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가로 활약하게 되며  그녀는 "
권력은 권력을 유지하기위해서 잔혹한 행위를 한다. 최악을 대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남편 마이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는 비폭력주의를 고집하며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 나가지만 군부 측에서 아웅 산 수 치를 가택 연금하기 시작. 무려 15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다.

그 동안 민족민주동맹의 활동은 결실을 맺어 1990년 미얀마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이 의회 의석의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군부의 정권 이양 거부로 선거는 무효화 된다. 절망이 연속되는 가운데 그녀는 1991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위해 힘쓴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가택 연금 상태였던 그녀는 직접 수상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대신 수상하고 라디오로 수상소식을 전해 듣는다.

1995년, 그녀는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2003년 민족민주동맹 지지자와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발생한 유혈 충돌 때문에 그녀는 다시 구금된다. 아웅 산 수치라는 이름은 구금의 대명사. 그렇지만 2010년 11월 13일, 마침내 기나 긴 투쟁 끝에 자유를 얻게 된 아웅 산 수치. 그녀는 2012년 4월에 치뤄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2012년 6월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지 21년만에 수상 연설을 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녀는 민주화의 화신이었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킨다." 
 

-아웅 산 수 치의 '
공포로부터의 자유' 연설 중에서-
 
 


조중동(중앙)이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의 방한을 앞두고 "닮은꼴 두 지도자 박근혜.수치"라고 한다.미얀마인들이 아웅산 수치 여사를 존경의 의미로 "The Lady"라고 부르는 것을, 독재자의 딸이 유신 독재정권에서 퍼스트레이디를 대행을 한 것과 비교하며 둘다 "Lady"란 호칭을 받았다는 것. 어쨌던 무늬는 닮았다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미얀마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딸과 친일혈서 반민족 독재자 박정희의 딸과 비교하는 것도 명예훼손인데 닮은 꼴이라니 정의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수치에게 수치(羞恥)이며,독재자의 딸과 조중동 등 언론을 포기한 자들에겐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민주의 밤이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베스트 블로거기자Boram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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