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장이 내민 '新불휘' 확 당겨
-불휘, 국산 양주에 붙여진 독특한 한글 이름-
여러분들께서는 언제 쯤 '용비어천가'를 불러본 경헝이 있는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본래의 뜻과 달리 지나친 아부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찬양을 빗대어 부르기도 한다. 주로 지나친 아부를 일러 용비어천가를 빗대 온 게 사실이다. 실제 용비어천가가 지어질 당시에도 '남의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면서 알랑거린' 게 없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용비어천가는 조선 세종 때 건국의 시조들을 찬양하고 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여 노래한 서사시이기 때문이다.
총 125장으로 구성 된 용비어천가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행해진 전통의 재현이었다. 일반에서 아부격으로 부르는 용비어천가와 조금은 다르게 보일지라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서열이 엄격하고 확실하게 매겨지는 왕실 등 권력의 세계에서는 늘 불러오던 게 용비어천가였다는 말일까.
총 125장으로 구성 된 용비어천가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행해진 전통의 재현이었다. 일반에서 아부격으로 부르는 용비어천가와 조금은 다르게 보일지라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서열이 엄격하고 확실하게 매겨지는 왕실 등 권력의 세계에서는 늘 불러오던 게 용비어천가였다는 말일까.
대략 일주일 전(지난3~4일), 글쓴이는 수원 화성에서 이름도 생소한 '파워소셜러투어'에 초청받아 수원 화성의 성곽을 하루 종일 셔터를 누르고 다녔다.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미션'을 너머 만추에 뿜어대는 수원성의 매력 깊숙히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성(城)이 한 두 곳에 있는 것도 아니건만, 부드러운 곡선미에 세세함과 과학을 더한 수원 화성의 성곽은 여행자로 하여금 셔터에서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후 1시부터 투어를 시작하여 오후 8시가 다 되어 투어를 끝마치고 저녁을 먹게 되었으므로 강행군인 셈이었다. 피곤하고 촐촐했다. 주최측에서 그 유명한 '수원갈비'를 대접하겠다는 말만 하지않아도 촐촐함은 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수원갈비는 커녕 칼국수든지 라면이든지 순대든지, 아무거나 무엇이든지 눈에 띄기만 하면 막걸리 한 잔과 더불어 촐촐함을 떼우고 싶었다. 이런 심정 모르는 사람들 있나. 그러나 점잖으신 염태영 수원시장님이 동행하고 있었으므로 일정은 착실히 소화해야 했다.
오후 1시부터 투어를 시작하여 오후 8시가 다 되어 투어를 끝마치고 저녁을 먹게 되었으므로 강행군인 셈이었다. 피곤하고 촐촐했다. 주최측에서 그 유명한 '수원갈비'를 대접하겠다는 말만 하지않아도 촐촐함은 덜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수원갈비는 커녕 칼국수든지 라면이든지 순대든지, 아무거나 무엇이든지 눈에 띄기만 하면 막걸리 한 잔과 더불어 촐촐함을 떼우고 싶었다. 이런 심정 모르는 사람들 있나. 그러나 점잖으신 염태영 수원시장님이 동행하고 있었으므로 일정은 착실히 소화해야 했다.
이날 수원시장은 특별히 우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취소해 가며 전국에서 모인 이른바' 파워소셜러'를 환대해 주었다. 웬만하면 어께에 힘이라도 주실 시장이었지만 염 시장은 달랐다. 마치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하고 넉넉한 품성을 지닌 그는, 일행이 지동 벽화골목을 둘러보고 수원에서 제일 높은 지동 제일교회의 종탑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시종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일행과 함께 투어에 나선 소셜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빠듯한 일정 중에 미처 해내지 못한 투어를 일행과 함께 즐기는 동안, 종탑 꼭대기에서 수원의 자랑인 수원성의 (조명)문제점을 발견하고 비서관에게 즉시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투어 또한 업무의 연속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수원 투어에 나선 소셜러에게는 '착한 시장님'이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수원시장의 몸에 밴 친절과 사심없는 대화 등으로 일행은 슬슬 찬가를 준비하지않으면 안 될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글쓴이 뿐만 아니라 일행들도 촐촐하기는 마찬가지. 염 시장은 수원갈비가 준비되는 동안 수원갈비의 특징에 대해 일러주었다. 염 시장은 수원 토박이였으므로 수원갈비의 특징 등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었다.
"수원갈비는 요. 다른 갈비와 다르거든요."
"(일행 중 한 분 생뚱맞은 질문)돼지갈비인가요..."
"하하 수원갈비는 소갈비죠. 수원갈비는 요. 일반 갈비와 좀 다름 점이 있거든요. 갈빗대 크기가 대략 8cm 정도 됩니다. 작은 거 여러 개 보다 큰 갈비 하나가 다 나은 셈이지요. 그리고 특징이라면 수원갈비는 양념을 미리해 두고 숙성시켜 두고 먹는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원의 우시장은 일제때부터 전국의 3대 우시장으로 꼽히 정도로 번창했는 데요. 장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소장수와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곤 했습니다. 이런 배경이 수원갈비의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수원갈비 전부가 한우라고 볼 수는 없는 점이 안타깝긴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갈비 한 대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수원갈비는 요. 다른 갈비와 다르거든요."
"(일행 중 한 분 생뚱맞은 질문)돼지갈비인가요..."
"하하 수원갈비는 소갈비죠. 수원갈비는 요. 일반 갈비와 좀 다름 점이 있거든요. 갈빗대 크기가 대략 8cm 정도 됩니다. 작은 거 여러 개 보다 큰 갈비 하나가 다 나은 셈이지요. 그리고 특징이라면 수원갈비는 양념을 미리해 두고 숙성시켜 두고 먹는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원의 우시장은 일제때부터 전국의 3대 우시장으로 꼽히 정도로 번창했는 데요. 장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소장수와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곤 했습니다. 이런 배경이 수원갈비의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수원갈비 전부가 한우라고 볼 수는 없는 점이 안타깝긴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갈비 한 대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그리고 숯불이 피워올리는 갈비굽는 냄새가 진동할 즈음, 비서관 한 분이 막 도착해 작은 포장지를 시장 한테 건넸다. 즉석에서 꺼내보인 염 시장. 갈색톤의 오크 빛깔이 감도는 양주였다. 시바스리갈? 발렌타인?...아니었다. 염 시장이 꺼내 든 양주병에는 금빛 상표에 '불휘'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염 시장 건너편 앞 자리에 앉아있던 '한사 정덕수' 선생이 즉석에서 상표를 확인했다.
"불휘?... 불휘 기픈 남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불휘는 33도의 국산양주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휘는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에 위치한 주류명가 '(주)불휘'의 제품이다. 리뷰 포스팅을 하고싶은 마음 없었다. 그러나 소맥 몇 잔에 이어 도착한 불휘를 한 모금 혓 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려보니, 외국산 고급양주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막힌 맛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이런 맛 때문에 값비싼 양주에 빠져드는 지. 염 시장은 불휘를 이렇게 소개했다.
"불휘는 요. 중국의 덩쌰오핑이 상시 복용했다고 하는 동충하초에 홍삼, 오미자, 구기자, 복분자 등 12가지 한약재가 들어간 수원산 양줍니다. 동충하초가 들어간 불로장생의..."
불휘는 지난 1999년 동양 유일의 국제주류품평회(International Wine & Sprit Competition) 판정관이자, 35년간 오직 술과 인생을 함께한 '마스터 블렌더 김철환(현 불휘 고문)'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로 개발됐다고 한다. 김철환 고문은 (주)진로에서 33년간 진로소주를 비롯해 수많은 제품을 개발한 장본인이었다. 그럼 그렇지. 한 때 거리불문 종류불문 도수불문 등 주당파에 끼었던 '한 주당' 한 글쓴이는 어느덧 불휘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며 '新용비어천가, 한 잔 더'를 부르고 있었다.
"캬...이거 괜찮은 데요. 한 잔 더...입에 착 달라붙는 데요..."
"불휘는 요. 중국의 덩쌰오핑이 상시 복용했다고 하는 동충하초에 홍삼, 오미자, 구기자, 복분자 등 12가지 한약재가 들어간 수원산 양줍니다. 동충하초가 들어간 불로장생의..."
불휘는 지난 1999년 동양 유일의 국제주류품평회(International Wine & Sprit Competition) 판정관이자, 35년간 오직 술과 인생을 함께한 '마스터 블렌더 김철환(현 불휘 고문)'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로 개발됐다고 한다. 김철환 고문은 (주)진로에서 33년간 진로소주를 비롯해 수많은 제품을 개발한 장본인이었다. 그럼 그렇지. 한 때 거리불문 종류불문 도수불문 등 주당파에 끼었던 '한 주당' 한 글쓴이는 어느덧 불휘 깊숙한 곳으로 빠져들며 '新용비어천가, 한 잔 더'를 부르고 있었다.
"캬...이거 괜찮은 데요. 한 잔 더...입에 착 달라붙는 데요..."
우리 일행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 비서관을 시켜 가져오게 한 국산양주 불휘는 모두 2병이었으며 가정용이었다. 염 시장이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인 데 수원 자랑 삼아 내 놓은 게 하필이면 용비어천가 2장의 핵심 '불휘(뿌리)'였다. 용비어천가 제2장은 2절 4구의 형식으로 1행은 기초가 튼튼한 나라. 문화가 번성하는 나라를 노래하고, 2행은 연원이 깊은 나라, 왕조의 무궁함을 노래하고 있다. 즉 조선 왕조는 국기(나라의 기반)가 튼튼하고 유서가 깊어 문화의 번성과 왕조의 발전이 무궁할 것이라는 송축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나 국산양주 불휘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불휘는 곧 <한계령>을 불러내기에 이르렀다. 글쓴이가 염 시장과 일행들에게 '한사 정덕수' 선생을 소개했다. 정 선생은 내게 있어서 시 낭송의 일인자였다. 그는 양희은 선생이 노래한 <한계령>의 원작시자였다. 그의 시낭송을 들고 있노라면 온 몸의 세포가 숨 죽이고 그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설악골의 바람과 안개가 가져다 준 세찬 비바람이 한 순간 몰아치는 듯, 다시 고요하게 잠든 동해바다 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불휘가 바닥을 드러내자 마침내 정 선생의 노래가 시작됐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그러나 국산양주 불휘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불휘는 곧 <한계령>을 불러내기에 이르렀다. 글쓴이가 염 시장과 일행들에게 '한사 정덕수' 선생을 소개했다. 정 선생은 내게 있어서 시 낭송의 일인자였다. 그는 양희은 선생이 노래한 <한계령>의 원작시자였다. 그의 시낭송을 들고 있노라면 온 몸의 세포가 숨 죽이고 그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설악골의 바람과 안개가 가져다 준 세찬 비바람이 한 순간 몰아치는 듯, 다시 고요하게 잠든 동해바다 처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불휘가 바닥을 드러내자 마침내 정 선생의 노래가 시작됐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일행의 큰 박수가 쏟아졌다. 아름다운 시어와 함께 설악의 바람과 구름이 수원갈비와 불휘를 한 순간에 잠재운 듯 했다. 염 시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셨다.
"와 멋집니다...한계령이 원래 그렇게 길었어요?...넘 좋은 데요."
이날 저녁을 함께 먹은 일행은 10명도 더 되었는 데 염 시장 앞자리에 앉은 대가로 다섯 잔은 더 비운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아부 하는 심정으로 불휘의 비하인드스토리를 뒤적여 봤더니, 한 주류 전문가는 "불휘는 33도의 고도주이지만 최고의 기술과 좋은 약재로 제조된 만큼 술에 약한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이 없을 정도의 맛과 향취를 자랑한다"며 "술의 최대 단점 중 하나인 숙취 부분도 상당히 개선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불휘 덕분에 우리는 밤이 늦도록 숙소에서 잠 못이루며 3차에 열중하고 있었다. 불휘가 문제였다.
수원에서 마신 한 양주 상표 때문에 한동안 잊고 지내던 세종대왕님과 훈민정음을 짓게한 정인지(鄭麟趾).권제(權踶).안지(安止)는 물론,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신숙주(申叔舟) 등 참으로 귀한 선조님들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더 새기게 되었으니, 일석이조의 투어가 수원 화성 '소셜러투어'였던 것이다. 또 용비어천가의 한글 번역본을 다시금 들여다 보니 아부와 찬양일색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명문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도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고 솟아나므로,
내가 되어서 바다에 이르니."
돌이켜 보니 오늘날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세계 속에서 인터넷은 물론 IT강국으로 자리매김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 한글 때문이며 한글을 창조하신 세종대왕과 그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특히 평민들이 한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귀족과 평민간 신분 격차를 대등하게 만든 혁명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글로 키워드를 토닥토닥 두드리게 해 주신 선조님들께 깊은 감사드린다. (우리 일행을 환대해 주신 수원시민과 수원시장은 두 말 할 것도 없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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